[보이스피싱 공화국①] “한국은 피싱하기 좋은 저수지”
  • 박성의 기자 (sos@sisajournal.com)
  • 승인 2019.09.16 09:00
  • 호수 1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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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공화국의 민낯
‘조’ 단위 넘어선 피해액…스타벅스 매출과 맞먹는 액수 편취

“통장의 돈을 모두 빼서 집 안 냉동실에 넣으세요.”

갑자기 걸려온 전화. 자신이 서울 광역수사대 형사라며 다짜고짜 이 같은 지시를 내린다면 어떨까. 10명 중 5명은 전화를 끊는다. 황당해서다. 그러나 나머지 5명은 대화를 이어간다. 궁금해서다. 그러자 ‘형사’가 재촉한다. “당신의 통장이 대포통장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범죄에 연루되기 전에 돈부터 찾아서 안전한 곳에 두시고,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시죠.” 이쯤 되면 5명 중 4명은 이상한 낌새에 전화를 끊는다. 그러나 1명은 이 지시를 따른다. 불안해서다. 그러고는 자신의 집 비밀번호까지 알려준 뒤 ‘형사’가 말한 약속 장소로 나선다. 그사이 냉동실에 넣어둔 현찰 1500만원은 사라진다. 그 ‘형사’란 사람의 연락두절과 함께.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6월 경기도 고양에 사는 한 70대 할머니가 당한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사건 개요다. 누군가는 ‘왜 속냐’고 비웃는다. 하지만 지난해 이 같은 보이스피싱에 속아넘어간 피해자만 3만여 명. 이들이 잃은 돈만 하루 평균 12억원, 총 4000억원에 달한다. 갈수록 대담해지고 치밀해지는 보이스피싱 집단의 미끼 앞에 서민들의 주머니가 위협받고 있다. 시사저널과 만난 보이스피싱 전·현직 조직원들은 “한국은 정말 피싱(낚시)하기 좋은 저수지 같은 곳”이라며 암세포처럼 퍼져가고 있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시스템과 실체에 대해 털어놨다.

ⓒ 일러스트 김세중
ⓒ 일러스트 김세중

‘시나리오 작가’ 뺨치는 보이스피싱 조직

보이스피싱이란 음성(Voice)과 개인정보(Private Data), 낚시(Fishing)를 합성한 신조어다. 직역하면 ‘음성을 이용해 개인정보를 낚아 올린다’는 뜻이다. 스마트폰과 같은 전기전자통신수단을 이용해 남을 속여 재산상의 손해를 입히는 일종의 ‘특수사기범죄’다.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공공기관 혹은 지인을 사칭해 금전 송금을 요구하거나 금융정보를 탈취하는 식이다. 2000년대 초반 대만에서 시작돼 중국, 일본, 한국 등 동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보이스피싱 사건이 처음 발생한 것은 지난 2006년이다. 당시 범인은 국세청 직원을 사칭하며 “과징금을 환급해 주겠다”며 피해자를 ATM(현금자동입출금기)으로 유인한 뒤, 범행 통장으로 800만원을 이체하도록 했다.

이후 한국은 보이스피싱 집단에게 떠오르는 블루오션으로 각광받게 된다. 한국의 빠른 정보통신(IT) 기술의 발전이 보이스피싱 집단에게는 기회가 됐다. 2000년대 중반부터 전자금융을 이용하는 대중이 늘어났고, 시중은행들이 인터넷뱅킹을 포함한 모바일 서비스를 경쟁적으로 내놓기 시작하자 보이스피싱 집단의 ‘전화사기’도 활개를 치기 시작한다.

한국에 뿌리를 내린 보이스피싱은 매년 기승을 부렸다. 2013년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가 2만1643건, 이듬해인 2014년에는 2만2205건에 이르는 등 관련 범죄는 계속 증가했다. 그러자 경찰도 칼을 빼들었다. 2015년 각 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에 ‘보이스피싱 전담팀’을 구성하면서 합동 단속에 들어간다. 동시에 국내에서 활동하는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의 근원지로 꼽혔던 중국에서도 2015년 강력 단속을 천명한다. 당시 중국에서만 한 해 1만5000명이 넘는 보이스피싱 사범이 검거됐다. 효과는 있었다. 이후 2015년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는 1만8549건으로 전년 대비 16.5% 가까이 줄었고, 2016년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는 1만7040건으로 전년 대비 8.1% 감소했다.

그러나 2017년 들어 잠잠하던 보이스피싱이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2015년 단속 때 숨어들었던 중국 핵심 조직원들이 ‘시나리오’를 다시 짜 보이스피싱에 나선 탓이다. 이에 1만 건대에 머물던 보이스피싱 범죄는 2017년 들어 2만4259건으로 전년 대비 42.3% 가까이 급증한다. 이듬해인 2018년에는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가 3만4132건을 기록, 국내에 보이스피싱 범죄가 알려진 이래 처음으로 ‘한 해 3만 건’을 넘어선다. 올해는 상황이 더 좋지 않다. 올해 상반기(1~6월)까지 발생한 보이스피싱 범죄는 총 1만9828건으로, 이 추세라면 올해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가 4만 건에 육박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피해액도 매년 증가하고 있다. 2013년 보이스피싱 탓에 발생한 피해액은 1429억원이었다. 이후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2014년 1887억원 △2015년 2040억원 △2016년 1468억원 △2017년 2470억원으로 점진적으로 늘었다. 그러다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가 전년 대비 1만 건 가까이 늘어난 지난 2018년에는 피해액이 4040억원을 기록, 전년 대비 63.56% 가까이 폭증했다. 올해 상반기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3056억원으로, 이미 2017년 한 해 동안 발생했던 보이스피싱 피해액을 넘어섰다.

학계에서는 보이스피싱이 단순 금전 피해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적 비용까지 발생시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보이스피싱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쓰이는 각종 직간접 비용 및 시간까지 고려하면 보이스피싱이 야기하는 피해가 드러난 수치를 상회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미국의 보안 소프트웨어 회사인 시만텍은 ‘2011 노턴 사이버 범죄 보고서(Norton Cybercrime Report 2011)’를 발표하면서, 사이버범죄의 시간손실비용은 경제적 비용의 2.4배에 이른다고 공언했다. 이를 대입하면 지난해 보이스피싱 탓에 발생한 전체 손실은 총 1조3736억원에 이른다는 결론이 나온다. 지난해 스타벅스코리아가 벌어들인 총 매출액(1조5224억원)에 버금가는 돈이 보이스피싱 탓에 증발해 버린 셈이다.

“알면서도 당하는 게 보이스피싱”

보이스피싱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지만, 대중에게 보이스피싱은 아직 ‘남 일’이다. 투박한 옌볜(연변) 사투리로 대표되는 보이스피싱 범죄집단의 어설픈 연기에 어떻게 속을 수 있냐는 비아냥거림도 나온다. 그러나 시사저널과 만난 보이스피싱 전·현직 조직원들은 “알면서도 당하는 게 보이스피싱”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들이 들려준 보이스피싱 범죄의 방법은 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체계화돼 있었다. 한 조직원은 범죄를 일으킨 뒤 ‘치고 빠지는’ 시스템을 설명하면서 “한 마리의 고기를 낚기 위해 수십 명의 조직원이 기술, 행정, 법, 심리 등을 연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취재 결과 보이스피싱 조직은 중국에 거점을 둔 ‘중앙 총책’을 중심으로 전산팀, 텔레마케터, 시나리오팀, 통장모집팀, 현금인출팀, 송금팀 등으로 구성된다. 전산팀에서는 자동 통화 프로그램을 운용하거나 해킹을 통해 개인정보를 탈취한다. 시나리오팀은 국내 사정에 밝은 조선족이나 범죄 경력이 있는 한국인이 주로 들어가는데, 이들이 국내 사정기관의 구조도 및 행정 시스템 등을 공부해 가장 현실감 있는 ‘대본’을 구현한다. 이후 송금책이나 현금인출책은 아르바이트 사이트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계약직 형태로 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우선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이 짚은 가장 많이 ‘낚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과거 한 조직에서 1년여 동안 송금책 구인담당으로 일했다는 김상중씨(가명)는 “어차피 대부분 안 속는다. 중요한 건 많은 사람에게 통하는 방법이 아니라, 한 명만 걸리더라도 확실하게 경찰을 따돌릴 수 있는 방법이 가장 베스트(best·최고) 피싱법”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들려준 가장 많이 쓰인다는 보이스피싱 방법은 쉽게 말해 ‘얼굴 보고 돈을 뜯는’ 대면편취형 수법이다.

”안녕하세요 XXX씨, 대검찰청 소속 OOO 수사관입니다. XXX씨 통장이 불법통장으로 발견돼 연락드렸습니다. 명의 도용이 의심된다면 빨리 XXX씨 계좌에 있는 돈을 인출해 저희에게 증거로 제출해 주셔야지 억울한 상황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일단 저희팀 수사관을 보낼 테니 계좌 내 돈을 모두 인출하셔서 집 안 세탁기나 냉장고에 보관하고 계세요.”

김씨의 설명에 따르면 OOO 수사관은 실제 대검찰청에 근무하고 있는 간부 이름이다. 최근 스마트폰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해당 간부의 이름이 실존하는지 검색하는 이들이 늘자, 직책과 이름까지 외우고 ‘작전’에 들어간다는 게 김씨의 전언이다. 과연 이같이 어설픈 연기에 속아넘어가는 이들이 있을까. 김씨는 “대부분은 대검찰청이라는 부분에서 그냥 전화를 끊지만, 노인들이나 사회 초년생의 경우 의외로 많이 걸려든다”며 “일단 피해자 목소리에서 걱정이나 불안이 느껴지면, 그때부턴 강하게 몰아붙여 빠르게 돈을 뽑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돈을 금고나 서랍이 아닌, 세탁기나 냉장고처럼 ‘이상한 곳’에 숨기라고 하는 것일까. 그는 “돈을 집으로 가지고 들어가면, 전화를 다시 걸어 집 앞으로 잠시 나오라고 한다. 그러면 그사이 다른 조직원들이 그 집 문을 따고 들어가 돈을 가지고 나오는 수법”이라며 “그런데 집 구조가 다 제각각이지 않나. 책상이나 서랍이 2~3개인 집에 들어가면 동선도 엉키고 시간도 많이 걸릴 수 있다. 그래서 집마다 보통 딱 1대씩 있고 찾기도 편한 가전에 돈을 숨기라고 하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김씨는 “돈을 계좌이체가 아닌 현찰로 뺏어오면 경찰을 따돌리기도 훨씬 수월해 자주 이용되는 방법”이라며, 유사한 수법에 노인뿐 아니라 중소기업 CEO와 대학생도 속아넘어갔다고 덧붙였다.

대면편취형 외에는 ‘대출사기형’이 자주 쓰이는 보이스피싱 기법으로 알려졌다. 대출사기형 보이스피싱은 최근 불경기 탓에 빚을 낸 서민들이 많다는 점을 이용,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저금리대출 상품이 있다고 미끼를 던지는 수법이다. 피해자들은 실제 자신이 이용하는 은행과 대출 사실 등을 줄줄이 꾀는 조직원의 ‘감언이설’에 속아넘어가 계좌와 연결된 체크카드와 비밀번호 등을 건네게 되는데, 해당 통장은 대포통장(사기계좌)이 돼 보이스피싱 조직이나 불법 도박사이트 등으로 흘러들어간다.

“안녕하세요 XXX씨. 저는 OO은행 대출업무 담당하는 김철수 계장입니다. 이번에 기존 금리보다 4%p 가까이 낮은 대출상품이 있어 소개해 드리려 연락드렸습니다. 수수료는 0원인데, 다만 고객님 신용등급이 낮은 게 문제가 되네요. 입출금 거래 실적을 쌓으면 금방 올라갑니다. 500만원씩 3번 입금해 드릴 테니, 인출해서 저희 직원에게 주시면 5000만원을 대출해 드리겠습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을 이용해 돈을 쉽고 빠르게 보낼 수 있는 간편송금서비스가 활성화되면서, ‘지인사칭형’ 보이스피싱도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가족이나 애인 등 ‘각별한 사이’의 지인을 빙자해 돈을 요구하는 탓에,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의심 없이 돈을 건네는 것으로 알려졌다. 급박한 상황을 연출해 수분 내로 돈을 강탈해 가는 수법으로, 전화를 끊지 못하게 해 의심할 여지조차 주지 않는 게 특징이다.

“안녕하세요 XXX씨. OOO씨 여자친구분 되시죠? 다름 아니라 저는 OOO 친구 김철수라고 합니다. OOO이 지금 다쳐서 병원에 실려 갔어요. 지금 당장 수술비를 입금하라는데, 제가 정신이 없어서 지갑을 두고 왔네요. 50만원만 제가 불러드리는 계좌로 지금 당장 입금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너무 급한 상황이라 전화 끊지 마시고 지금 바로 부탁드릴게요.”

 

경찰이 공개한 보이스피싱 조직 관련 증거물 ⓒ 연합뉴스
경찰이 공개한 보이스피싱 조직 관련 증거물 ⓒ 연합뉴스

정부 대책 마련에도 “일망타진 어려워”

보이스피싱에 대한 심각성이 대두되면서, 정부는 금융위원회가 중심이 돼 보이스피싱 종합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우선 대포통장의 양·수도에 대한 처벌을 징역 3년 이하에서 징역 5년 이하로 강화하고, 대포통장 조직에 범죄단체죄를 적용하는 등의 내용으로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아울러 대가를 전제로 통장의 매매·대여를 권유·중개하는 행위를 처벌하고, 계좌번호 등을 보이스피싱 조직원 등에게 대여하고 보이스피싱 피해자금을 전달하는 행위도 처벌하도록 관련 법률을 개정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외교부는 수사당국으로부터 해외 체류 중인 보이스피싱 범죄자 내역을 통보받아 여권 발급·재발급 거부 등 여권 제재를 적극 시행한다는 계획이다.

여기에 지난 8월20일부터 부패재산의 몰수 및 회복에 관한 특례법이 시행에 들어갔다. 약칭 ‘부패재산몰수법’으로 수사기관이 직접 법인으로부터 피해금액을 추징해 피해자에게 환부하도록 하는 제도다. 그동안에는 보이스피싱으로 피해를 당할 시 민사소송을 통해서만 금전적 배상을 받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국가가 직접 보이스피싱 범죄자의 재산을 몰수해 피해자에게 돌려줄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다만 이 같은 대책이 실제 보이스피싱 시장을 옥죄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우선 최근 보이스피싱이 기승을 부리는 이유가 ‘솜방망이 처벌’ 탓은 아니란 점이다. 보이스피싱은 형법상 사기죄에 속해 최대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처벌 수위가 센 편이다. 무엇보다 아무리 강한 대책을 강구하더라도 보이스피싱 핵심 조직원들을 잡아들이는 게 쉽지 않다. 조직 간부들이 중국이나 대만에 있는 탓에 국내법으로는 검거와 처벌, 범죄자금 환수 모두 어렵기 때문이다. 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소속의 한 경찰관은 “보이스피싱 범죄 특성상 조직의 몸통이 보통 중국이나 대만에 있어 ‘일망타진’이 쉽지 않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정부도 경찰도 믿지 말고, 피해자 스스로가 보이스피싱에 대한 경각심을 항상 갖고 조심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전했다.

부패재산몰수법에 대한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보이스피싱 조직에 한 번 흘러들어간 돈을 국가가 나서서 찾아오는 과정이 복잡해서다. 김경은 변호사는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 금액의 대부분이 해외로 송금되는데, 이 경우 해외에 있는 부패재산을 환수하기 위해 우리나라 검찰총장을 거쳐 법무부 장관이 환수요청서를 외교부 장관에게 송부한 후, 외교부 장관이 해당 국가로 송부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며 “실질적으로 신속한 피해회복이 될 것인지 여부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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