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삼성 공화국에 공감” 48.8%
  • 장영희 전문기자 (view@sisapress.com)
  • 승인 2005.09.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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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미디어리서치 공동 조사 ‘삼성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X파일 사건이 물 위로 불거진 뒤 국민들의 날 선 시선을 받는 곳은 적어도 세 군데일 것이다. 불법 도청을 자행한 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와 이 도청 사건의 수사 주체이자 삼성으로부터 로비를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검찰, 그리고 핵심 수사 대상 삼성그룹이다.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의 한 인사에게 요즘 분위기를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 삼성에 대한 들끓는 여론이 가라앉을 줄 모르고 검찰 수사의 향방도 예사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어떤 대응을 하기에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어서 쥐죽은 듯 조용하다는 것이다. 정중동일까. 이건희 회장에 대한 검찰 소환 여부가 국민적 관심사가 되어버렸고 국회에서도 증인 채택 여부로 시끄럽지만, 정작 그는 예전처럼 외부 인사를 만나고 골프도 치고 ‘편안하게’ 지낸다고 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국 사회에서 삼성과 이회장은 대통령 빰치는 최대 뉴스메이커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한국인에게 삼성그룹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삼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제왕처럼 군림하고 있다는 이회장은 국민들에게 또 어떤 존재로 각인되어 있을까. 삼성그룹과 이회장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엿보기 위해 <시사저널>은 최근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여론조사를 했다.

이 조사 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분열’이었다. 한국인들은 삼성과 이회장에 대해 일관된 인식을 갖기를 난처해 하는 듯하다. 삼성과 이회장의 한국 경제 기여도를 인정하면서도 정치권 등에 로비나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이나, 특히 경영권을 3세로 대물림하는 데 비판적인 경향이 뚜렷했다. 삼성과 이회장의 어떤 면은 인정하고 또 어떤 면은 배척하고 있는 것이다. 한 집단과 인물에 대한 평가가 어떤 한 방향으로 수렴되지 않는 이런 인식 코드는 ‘분열’이라고 볼 수밖에 없지만, 어쩌면 분열적인 현상을 제대로 보려는 ‘균형 감각’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재벌이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은 ‘삼성 민심’을 결정하는 원초적 조건에 해당한다. 예상대로 재벌이 한국 경제에 기여했다고 보는 견해(77.0%)가 그렇지 않다는 응답(19.5%)보다 월등히 많았다. 한나라당 지지자(75.4%)보다 민주노동당 지지자(87.5%)가 재벌의 경제 기여도를 높게 평가한 것은 이변에 속했다.

 
재벌 가운데 삼성 기여도를 가장 높게 평가하리라는 예측은 전혀 빗나가지 않았다. 10명 가운데 6명 가까운 한국인들이 삼성이 한국 경제에 가장 많이 기여했다고 생각했다. 삼성과 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한국인은 현대자동차·현대그룹 기여도도 적지 않게 평가하고 있다. 한나라당 지지자는 삼성, 민노당 지지자는 현대자동차 ‘강추’ 경향을 보인 것이 이채로운데, 두 그룹에 대한 평가가 정치 성향 별로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LG나 SK그룹은 그 경제적 위상에 걸맞지 않게 기여도가 현저히 낮게 평가되어 의문을 낳았다.

국민들은 한국 최대 재벌인 삼성이 다른 그룹에 비해 나은 점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국내외 시장에서 하늘을 찌른다는 삼성 제품과 서비스의 명성은 이번 조사에서도 잘 드러났다. 10명 가운데 4명은 삼성 제품이나 서비스 질이 다른 그룹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애니콜 휴대전화에 지펠 냉장고, 센스 노트북컴퓨터, 호텔 및 병원 서비스가 한국인의 삶 속에 깊숙이 침투한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응답률이 낮게 나왔다는 인상마저 든다.  또 10명 중 2명 가까운 사람들이 삼성이 국제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지위를 격상시켰다고 생각했다. 글로벌 기업 이미지가 어느 정도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오너·CEO의 경영 능력에 대해서는 연령별 편차도 컸지만 정치 성향별 간극도 컸다. 한나라당 지지자는 평균(14.4%)을 크게 웃도는 20.0%, 민노당 지자자는 고작 5.1%만이 이회장과 삼성 사장들의 경영 능력을 인정한 것이다. 반면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은 정확히 두 집단의 평균 지점을 택했는데, 이같은 경향은 다른 문항에서도 비슷한 궤적을 보였다. 일관되게 어정쩡한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로비·경영세습이 가장 큰 잘못 1·2위”

또 국민들은 삼성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여기고 있을까. ‘정치권·언론 등에 대한 로비나 영향력 행사’를 삼성이 가장 잘못한 점으로 꼽았다. 삼성이 이른바 지배 세력이나 여론 주도층을 일상적으로 ‘관리’해 왔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에 속하지만, 일반 국민에게는 7월21일 불거진 X파일 사건이 이런 인식을 갖게 하는 데 크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 단체와 일부 학자들의 끈질긴 ‘타도 운동’이 주효한 것일까. 물론 X파일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삼성의 어두운 면이 들춰진 데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야 하지만, 한국인들은 삼성이 두 번째 잘못한 점으로 ‘(이건희 회장) 아들에 대한 그룹 경영권 승계’(19.7%)를 꼽았다.

 
이런 반응은 ‘경영권 승계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묻는 별도 문항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매우 혹은 어느 정도 문제가 있다는 응답률이 60.8%에 달한 것이다. 50대 이상에 비해 20~40대가 현격히 비판적이었고 특히 30대가 도드라졌으며, 고학력자와 중산층 월수입(2백만~4백만 원), 민노당 지지자(78.6%)가 삼성의 ‘JY(이재용 상무) 시대’를 여는 데 비판 세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이 잘못한 것 세 번째는 단골 메뉴인 ‘노조 설립 금지 원칙’이 차지했다. 이 부분은 삼성과 친삼성 인사들이 ‘무노조 경영’으로, 노동운동 진영이나 삼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전투적 노동 통제’로 각각 사뭇 다른 뉘앙스로 표현해온 오래된 논란거리다. 그동안 간헐적으로 삼성이 어떻게 노조 설립을 저지했는지 폭로되었던 터에 지난 5월2일 발생한  ‘고려대 파동’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X파일 사건의 본질이 테이프에 담긴 내용의 위법성 여부(29.9%)보다 국가기관의 불법 도청(55.8%)에 있다는 응답률이 두배 가까이 높은 것은, 이 사안의 폭발력에다 누구나 도청당할 수 있다는 공포 심리가 발동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반응을 테이프 내용의 위법성 여부를 따지지 말아야 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위법성 여부에 대해서는 30대와 학생, 대학 재학 이상 학력자들의 지목률이 높았다.

 
이런 해석은 이회장에 대한 검찰의 수사 여부에 대한 견해와도 관련이 있다. ‘삼성 관련 내용이 나오므로 최고 책임자를 수사해야 한다’는 의견(56.8%)이 ‘수사에 무리가 있다’는 의견(38.2%)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특히 20대(70.8%)와 30대(66.8%), 호남 거주자(66.8%), 학생(77.8%), 민노당 지지자(75.5%)들은 이회장을 수사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수사에 무리가 있다는 데는 50대(53.8%), 영남 거주자(43.9%), 한나라당 지지자(49.8%)들이 평균치보다 높은 응답률을 보여 극명한 시각차를 보였다. 이회장 수사에 대한 견해는 X파일 사건, 나아가 삼성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인식과 무관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조사의 교차 분석 결과가 계층간 분열을 드러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회장을 수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삼성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X파일 사건이 터진 직후부터 언론이 연일 삼성 때리기에 나섰기 때문일까. 뜻밖에도 국민들은 삼성에 대한 언론의 보도 태도가 우호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응답률이 40.7%나 되었다. 대체로 혹은 매우 적대적이라는 응답률은 19.4%에 그쳤다. 30대·20대·40대가 50대 이상 응답자에 비해 현격히 우호적이라고 반응했고, 호남과 서울 거주자가 다른 지역 거주자에 비해 우호적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물론 민노당 지지자는 무려 60%가 언론이 삼성에 우호적이라는 불만을 드러냈고, 한나라당 지지자는 28.2%만이 그렇게 생각했다.

지난 8월 ‘1997년 대선 자금 수사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는 대통령의 발언을 ‘삼성 수사 중단 요구’로 해석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동안 삼성과 노무현 정부는 밀월 관계를 구가해온 것일까. 이번 조사 결과는 이런 관측과는 사뭇 달랐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관계라는 응답률이 거의 절반에 달했던 것이다. 특히 호남 거주자(66.0%)와 열린우리당 지지자(62.7%)들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관계라고 생각했다. 매우 혹은 대체로 좋은 관계라는 응답률은 22.3%에 그쳤고, 나쁜 관계(17.1%)라고 보는 사람들은 더 적었다.

하지만 삼성과 노무현 정부가 처음부터 정서적 교감을 한 것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서로의 필요에서 기능적 유착 관계였다는 정황은 적지않다. 삼성은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 국정 아젠더를 제공했다. 이 연구 보고서는 물론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 70여명이 수행했지만, 구조본 지시 사항이었다. 노무현 정부에 삼성을 연결한 파이프라인은 이광재 의원으로 알려져 있다. 또 삼성이 노무현 정부 정책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는 것은 정설로 통한다. 이미 삼성이 기업 경영 차원을 넘어 국가 경영과 미래 담론까지 집중 제기하는 오지랖 넓은 행보를 보인 것인지, 노무현 정부의 요청 사항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상호 작용해온 흔적은 역력하다.

 
이것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에 함축되었듯이 정치 권력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 권력이 막강한 현실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삼성은 ‘독주’라는 말이 결코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홀로 앞서 나갔다. 재벌을 삼성과 기타로 분류하는 사람마저 생길 정도였다. 마침내 삼성은 ‘삼성공화국’으로 칭해지기에 이른다. 막강한 경제력을 원천으로 한국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집단으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 경영 능력 점수, 77.54점

삼성의 지배력을 뜻하는 삼성공화국 주장에 대해 한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매우 혹은 대체로 동의한다는 의견이 48.8%에 달했다. 국민의 절반이 삼성의 경제력과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진 데 반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별로 혹은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률도 45.1%에 달했다. 한국 사회는 삼성에 우려 혹은 반감을 갖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 정확히 갈려 있는 것이다.

설령 삼성공화국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삼성이 한국 사회에 막강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는 데는 비교적 동의하는 듯하다. 특히 국회 등 정치권(23.9%)과 검찰 등 법조계(22.8%)에 영향력이 크다고 한국인들은 인식하고 있다. 그 다음이 언론계와 정부나 공무원 조직, 문화·예술계 순이었다.
삼성이 역대 선거에 영향을 미쳐왔다는 인식 또한 삼성의 지배력과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다. 무려 10명 가운데 7명 가까운 한국인들은 삼성이 과거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생각했다. 별로 혹은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응답률은 20.9%에 그쳤다.

삼성그룹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막강 집단이다. 적어도 경제적 영향력은 그렇다. 해외에서 삼성의 힘을 실감한 한국인들은 삼성이 자랑스럽고 국가적 자존심으로까지 여긴다. 삼성을 빼놓고는 한국 경제를 생각할 수 없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 국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의 비대함과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지배적 모델이 되었다는 점이 지극히 위험스럽다는 주장이 나올 지경이다(장경섭 서울대 교수).

그렇다면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삼성에 대한 비판이 국가 경제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게 될까. 무려 46.1%의 응답자가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고 답했다.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는 응답률은 12.1%였다. 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응답(37.0%)을 합해야 '균형'에 이른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한국인의 절반 가량이 왜 삼성과 이회장에게 비판적이냐에 있다. 삼성이 주장하듯이 비판 세력이 단 1%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강준만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삼성이 이른바 초현실적 권위로 이건희와 삼성에 대한 비판 목소리를 ‘관리’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삼성은 삼성이라는 기업과 이건희를 집요하게 등치시키고 있으며, 심지어 삼성에 좋은 것은 한국에도 좋은 것, 혹은 삼성에 나쁜 것은 한국에도 나쁜 것이라는 비이성적인 이데올로기를 유포해 왔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아무리 힘이 세도 경기 규칙에 따라야 할 기업과 기업인이 입맛대로 경기 규칙을 만들어 한국 사회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그래서 제기되는 것이다. 오늘의 삼성을 만든 데 혁혁한 공로자인 이회장이 국민들에게서 받은 경영 능력 점수가 평균 77.54점인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조사만 했다 하면 존경받는 기업인 1위로 지목된 이회장이고 보면 결코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업적 성공의 결과로 나타난 삼성의 힘과 부정적 뉘앙스가 강한 삼성공화국(혹은 삼성왕국)은 달리 보아야 한다. 삼성과 이회장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두려운 차원을 넘어 무섭다고 느끼고 있다. <시사저널> 여론조사 결과가 웅변하듯이, '코쿤족'이라는 이회장은 누에고치에서 나와 ‘민심의 실체’와 만나야 한다. 그래서 민심과 진정으로 ‘소통’에 나서야 한다. 그것이 삼성도 이회장도 살고 한국도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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