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소설가 “저는 원로 선생님 옆에 ‘앉혀’졌습니다”
  • 박소정 인턴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2.12 10:36
  • 호수 1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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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소설가 A·B씨, 시사저널 인터뷰서 “분위기 몰아가는 젊은 남성 문인들이 더 문제”

 

#1. 여성 소설가 A씨는 2010년 한 신문사 문학상 시상식의 뒤풀이에 참석했다. 당시 나이는 20대. 그는 한 남성 원로작가 옆에 앉았다. 정확히는 ‘앉혀졌다.’ 30~40대 남자 선배 작가들이 “선생님 옆에 앉으라”고 부추겼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작가들이 모인 자리에 참석할 때마다 A씨의 자리는 고정돼 있었다. 불쾌한 기색을 보이면 선배들은 “좋은 날 왜 그래”라며 넘겨버렸다. A씨는 “환멸을 느꼈다”며 “점점 작가들과의 자리를 꺼리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2. “작가 말고 네 또래 여자 친구들 어딨어?” 젊은 남성 작가들이 한 시상식에서 다짜고짜 여성 소설가 B씨에게 말했다. B씨는 그들보다 5~6년 후배였다. 서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B씨는 “농담조였지만 불쾌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며 “하지만 혼자 삭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성범죄 피해를 고발하는 ‘미투(Me Too)’ 운동이 문단으로 확산되고 있다. A씨와 B씨는 2월7일 시사저널에 “일부 젊은 남성 작가들이 문단 내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부추기고 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 시사저널 임준선

 

남자 선배 작가들의 ‘자리배치’ 관행 비판

 

그동안 문단에서 불거진 여러 성추문에는 원로 문인이 얽혀 있었다. 최근엔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잘 알려진 최영미 시인이 자신의 작품 속에서 한 유명 원로 문인의 성추행을 폭로했다. ‘En선생’이라 표현된 이 문인과 관련, 류근 시인은 페이스북을 통해 “고은 시인(86)의 성추행이 수면 위로 드러난 모양”이라고 주장했다. 고은 시인을 만난 적이 있다는 칼럼니스트 S씨는 2월8일 시사저널에 “첫눈에도 그분의 언행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고 전했다. 이외에도 소설 《은교》의 작가 박범신(73) 또한 2016년 술자리에서 다수의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에 휩싸여 논란을 산 바 있다.

 

시사저널에 문단의 만연된 성추행·성희롱 사실을 고발한 A와 B씨의 증언은 다만, 그 성격이 앞서 언급한 원로 문인들과는 조금 다르다. 그 대상이 20~40대의 비교적 젊은 남성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A씨는 특히 자리배치를 주도하는 젊은 남성 작가들의 행동을 지적했다. 모임이나 뒤풀이에서 신인 또는 후배 여자 작가에게 원로작가 옆에 앉으라고 자꾸 강요한다는 것이다. A씨는 “남성 작가들이 문단의 어른을 위해 행하는 관성적 태도”라고 표현했다. B씨 또한 “또래 남성 작가의 일상적인 말에 성차별적 요소가 늘 들어 있다”고 했다. 이러한 지적이 비단 자신들만의 목소리는 아니라고 한다. A씨는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와 같은 경험을 한 동료 여성 작가가 많다는 걸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여성 작가는 자신의 감정을 감출 수밖에 없다고 한다. 지난해에 나온 책 《참고문헌 없음》에는 그러한 작가들의 고충이 묘사돼 있다. 이 책은 여성 문인들의 성폭력 고백을 담고 있다. 김소연 시인이 책에 쓴 ‘가해자의 리그에서’란 글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허벅지에 올라오는 손길을 슬그머니 뿌리치며 농담으로 무마할 줄 알아야 했고, 술을 따르라는 선배에게 대인배인 양 호방한 제스처로 술을 따라야 했고, 모욕적인 음담패설에 남자들의 본성은 어쩔 수 없다는 양 불쾌함도 유쾌한 듯 웃으며 받아내야 했고, 온갖 추근댐에 대한 모멸감도 세련되게 감추어야 했다.’

 

2011년에 등단한 한 남성 작가는 “평론가나 출판업자들이 신인 여성 작가들에게 ‘작품을 내주겠다’며 성적인 접근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고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전했다. 그는 “요즘같이 온라인에서 문단 내 성폭력을 지탄하는 목소리가 높은 상황에선 아무도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며 “여성 문인들이 문제를 공론화한 점이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여성 문인들이 문단 내 성폭력 사례를 직접 폭로하고자 펴낸 《참고문헌 없음》 © 시사저널 박소정


 

“문단만이 아닌 우리 사회 전체의 관행”

 

문단 내 성폭력 원인을 두고 남성인 김현 시인은 2월9일 시사저널에 보낸 휴대폰 메시지를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관행적 문화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김현은 문인들의 성폭력을 공론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16년 문예지 《21세기 문학》에 글을 싣고, 문학계에 여성 혐오와 성폭력이 만연해 있다고 폭로했다. 이때부터 SNS에서 각종 성폭력 고발이 ‘#문단_내_성폭력’이란 해시태그를 달고 이어졌다. 김현 시인은 “여성을 술자리의 ‘도우미’ 정도로 생각하는 문화나 분위기는 비단 문학의 장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기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어 “젊은 남성들이 자신보다 ‘계급’이 높다고 생각하는 늙은 남성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그들이 가정에서(가부장제), 학교에서(반여성주의), 군대에서(군사주의) 학습한 결과”라고 했다. 김 시인은 ‘도우미’ ‘계급’ ‘복종’ 등의 단어를 작은따옴표로 특히 강조했다.

 

서울지방변호사회의 한 관계자는 2월8일 노컷뉴스에 “문화예술계는 이른바 유력 인사에게 찍히면 작품마저 외면당하는 식으로 생계마저 위협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작동한다”며 “이 과정에서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고 했다. 서울변호사회는  2월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문화예술계 성폭력 문제를 다루는 토론회를 연다. 이 관계자는 “토론회의 취지는 보이지 않는 권력을 통하지 않더라도 작가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단 내 성폭력의 고리를 끊어낼 길은 없을까. 김 시인은 “희망적인 것은 있다”고 했다. 그는 “요즘은 출판사에서 송년회를 대신해 열던 술자리도 많이 없어진 편”이라며 “작가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성희롱적 발언이나 추행들이 다소간 사라지고 있고, 젠더적 관점에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일부 여성 신인작가들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 불쾌함을 마냥 삼키지만은 않겠다는 분위기다. 2010년 이후 문학계에 이름을 올린 한 여성 작가는 2월8일 “나와 비슷한 시기에 등단한 뒤 성폭력 고발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는 분들이 있다”고 말했다. 최영미 시인을 계기로 최근 문학계에 다시 퍼진 미투 운동도 그 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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