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평양 외교사령부 ‘김정은 전용열차’ 실체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3.29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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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정보 당국 의식해 스텔스 기능의 특수 그물망 설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2011년 12월 추모 방송을 이어가던 북한 관영 선전매체들은 그가 열차에서 숨졌다고 알렸다. 노동신문은 “한밤을 꼬박 새우시고 이른 아침 병사들과 인민들을 찾아가시던 강행군 현지지도의 길에서 뜻밖의 청천벽력같이 우리 곁을 떠났다”고 전했다. 그가 이동수단으로 이용한 건 이른바 ‘야전열차’로 불리는 최고지도자 전용열차였다. 이동 집무실과 회의실·실침은 물론 수행원 공간과 승용차 탑재도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알려진 김정일은 항공기 대신 열차를 이용해 군부대와 공장·기업소 등을 방문한 것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를 오갔다고 한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전용열차가 7년 만에 베이징에 다시 등장함으로써 전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3월25일부터 28일까지 중국을 비공식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과 회담하고 오찬을 함께했다. 비핵화 문제와 관련해 ‘한·미의 단계별 조치에 따른 비핵화’를 언급하는 등 관심을 끌 만한 대목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소원했던 북·중 관계를 복원시키고 혈맹임을 재확인 게 북한으로서는 성과일 수 있다. 부인 리설주를 정상외교 무대에 처음 데뷔시킴으로써 정상국가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한 점도 눈길을 끈다.

 

베이징과 서울 외교가는 김정은이 항공편을 마다하고 열차를 이용해 중국을 방문한 배경을 두고 설왕설래했다.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은 집권 초기부터 항공기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고 실제 전용기인 ‘참매-1호’를 이용해 북한 지역을 돌아보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보조 비행사가 옆에 타고 있었지만 항공기를 직접 조종하는 젊은 최고지도자의 모습을 조선중앙TV로 공개함으로써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드러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3월25일부터 나흘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초청으로 중국을 비공식 방문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8일 보도했다. 사진은 지난 26일 전용열차로 베이징역에 도착한 김정은·리설주 내외가 마중 나온 중국 고위간부들의 환영을 받는 모습. © 사진=조선중앙통신 연합


 

김정은, 종종 전용기 ‘참매-1호’ 조종해

 

2013년 5월 최룡해 북한군 총정치국장이 특사 자격으로 방문했을 때나, 2016년 6월 리수용 당 부위원장의 방중 같은 주요 인사의 중국 방문에 주로 항공편이 이용됐다. 지난 2월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 당 중앙위 제1부부장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도 전용기 ‘참매-2호’를 타고 왔다. 이 때문에 김정은이 해외 방문 시 항공편을 이용할 가능성이 크고, 사전 징후를 포착하기도 열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은 이런 예상을 깨뜨려버렸다. 보란 듯이 전용열차를 타고 접경지역을 거쳐 베이징에 도착했다. 김정은이 열차를 이용해 중국에 간 건 “북·중 간의 오랜 전통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이 열차 노선 자체가 김일성과 덩샤오핑(鄧小平)을 비롯한 양국 정상이 오간 ‘혈맹(血盟)과 친선의 길’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경호에 유리하기 때문이란 지적도 나온다. 북한은 2004년 4월 평북 용천역 폭발사고 이후 김정일 전용열차에 대한 테러 대비책을 강화했다. 당시 폭발은 중국 방문을 마치고 귀환하던 김정일을 노린 계획적 테러로 알려져 북한 경호 당국을 긴장시켰다.

 

철저한 보안대책도 강구된다. 정보 관계자는 “2009년 일부 언론에 김정일 전용열차가 이용하는 철도역의 숫자와 위치 등이 구체적으로 공개되자 운행코스를 바꾸었다”고 말했다. 김정은의 경우 평양 용성 1호역 등 약 20곳에 전용역을 갖고 있으며, 전용열차론 90량의 객차로 6개 열차를 편성해 놓은 것으로 파악된다. 선두에 선로 점검 열차가 움직이고 김정은이 탄 열차 뒤에는 경호원과 지원 인력이 탄 열차가 뒤따르는 등 2~3개 열차가 동시에 이동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방식이다.

 

북한 TV나 영상을 통해 공개된 전용열차는 외관상 녹색에 노란색 줄무늬가 있는 게 특징이다. 김정일 시기 사용하던 것과 큰 차이는 없다. 또 중국 측 인사들을 함께 태우고 이동하는 장면에서는 열차 객실에 꾸며진 장방형 공간에 소파를 놓아 환담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한 게 드러났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곳에서 중국 고위 인사들과 환담했다.

 

 

특수 방호시설 깔린 ‘움직이는 요새’

 

북한 최고지도자가 이용하는 열차와 관련해 구체적으로 외부에 설명해 준 인물은 콘스탄틴 풀리콥스키 전 러시아 극동지구 대통령 전권특사다. 그는 2001년 여름 김정일의 방러 때 3주간 동행했다. 풀리콥스키 전권특사는 자신의 저서에 “김정일 열차의 바닥에 방탄용 철판이 깔려 있고 영화 감상과 전자지도로 쓰이는 스크린이 2개 있다”고 전했다. 열차에 위성항법시스템과 위성TV, 전화가 설치돼 있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런 배경에서 2011년 한 러시아 매체는 김정은의 특별열차를 ‘움직이는 완벽한 요새’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앞서 북한은 김일성 집권 시기 김정일이 전용열차 내부에서 노동당과 군부 핵심 간부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수차례 공개한 바 있다. 대북 정보 관계자는 “전용열차의 핵심 시설은 경호·암호통신 장비 등이 실린 칸”이라며 “집무 공간의 경우 공개해도 큰 문제가 없다는 판단에 따라 조선중앙TV 등이 영상을 내보내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북한 전용열차와 핵심 인사들의 동향을 미 정보 당국이 파악하지 못하도록 특수 방호장비가 설치돼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북한이 2010년 말 김정일 전용열차에 스텔스 기능을 갖춘 특수 그물망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대북 정보 관계자는 “정보 세계에서 ‘그물망(net)’으로 통칭되는 이 설비는 실제로는 RAM(레이더 흡수물질)이 포함된 얇은 필름 형태”라고 설명했다. 이 필름을 열차 표면에 감싸듯 입힐 경우 열차 내 핵심 인물의 움직임이나 이동 경로 등을 포착하기 쉽지 않아 보안에 유리하다.

 

김정은 위원장은 중국에 이어 러시아도 방문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대북 부처 당국자들은 전한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의 진행 상황 등을 볼 때 김정은이 재차 중국을 찾아야 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이 경우에도 사회주의 후견 국가와의 교류·협력 전통을 고려해 열차를 이용할 공산이 크다. 전용열차는 김정은의 국제 정상회담 무대 데뷔와 함께 철통 보안망을 갖춘 외교 사령탑으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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