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동네 물건’에 반한 北 김정은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4.06 16:39
  • 호수 1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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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Insight] ‘남조선 부르주아 날라리풍’ 비판하던 北, K팝에 큰 관심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K팝으로 불리는 한국 대중가요에 각별한 관심을 나타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4월1일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방북 예술단의 공연을 직접 관람하고 가수들과 기념촬영을 한 건 물론이고, 남한 가수나 노래와 관련한 파격적인 발언까지 쏟아낸 것이다.

 

김 위원장이 공연 관람을 위해 일정까지 조정한 것으로 알려져 유명 가수로 짜인 남한 예술단의 공연을 꼭 보고 싶어 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현송월 단장을 비롯한 북한 삼지연관현악단의 2월 서울 공연 때 문재인 대통령 부부의 관람에 상응하는 움직임이란 해석을 넘어 한류 문화에 대한 개인적 관심 수준을 드러낸 것이란 분석도 제기된다. 김정은이 공연 관람 중 박수를 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고 공연 이후에는 출연진과 하나하나 악수하고 환담까지 했다는 점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드러난다.

 

특히 김정은이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라며 남매 그룹 현이와 덕이의 《뒤늦은 후회》를 신청한 사실이 전해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공연에서 이 노래를 부른 최진희는 “(공연이 끝나고) 김정은 위원장이 내려와 나와 악수를 했다. 그때 ‘그 노래를 불러줘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김정은이 남측 출연자에게 “내가 레드벨벳을 보러 올지 관심들이 많았는데…”라고 언급한 대목도 관심을 끌었다. 인기 걸그룹인 데다 대표곡인 《빨간 맛》이 북한 체제를 떠올리게 한다는 말까지 우리 사회 일각에서 나돈 점을 거론하며 관심을 보였다는 점에서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4월1일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남측 예술단 공연 ‘봄이 온다’를 관람한 뒤 남측 예술단 출연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K팝, 소형 USB에 담겨 북한 사회로 퍼져

 

이 같은 행보는 그동안 김정은의 공개 언급과 결을 달리한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12월 열린 제5차 노동당 세포위원장 대회에서 ‘부르주아 날라리풍’으로 불리는 이른바 비사회주의 현상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강조했다. 그는 “미제와 적대세력들이 우리 공화국에 대한 침략책동과 제재압살 책동을 전례 없이 강화하는 것과 함께 우리 내부에 불건전하고 이색적인 사상 독소를 퍼뜨리고 비사회주의적 현상들을 조장시키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류 문화의 유입을 체제 존폐의 문제로 직결시켜 보기 시작한 것이다.

 

2012년 김정은 체제 등장 이후 북한 당국은 ‘남조선 부르주아 날라리풍’ 또는 ‘자본주의 황색 바람’ 단속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쉽진 않다. 과거엔 VTR 또는 ‘알’이란 은어로 불리던 CD를 이용해 반입돼 적발이 쉬웠다. 그런데 요즘엔 휴대용 저장장치(USB)를 주로 쓰기 때문에 어렵다는 얘기다. 최근엔 손톱만 한 크기의 마이크로SD에 담아 유통되기도 한다. 한류 콘텐츠의 북한 내 유입과 유통 흐름이 매우 빨라지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음악과 영상을 함께 볼 수 있는 중국산 MP5가 20달러 정도의 싼값에 유통되면서 북한 내부에서 한류가 크게 확산됐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이 남한 대중가요를 열린 자세로 대하는 분위기를 연출한 것을 두고 남북 정상회담 등을 염두에 둔 고도의 대남 유화 제스처란 해석이 나온다. 남한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포용할 줄 아는 지도자란 이미지를 만들어 핵과 미사일 도발의 주도자로 비친 그동안의 모습을 탈피하려는 의도란 얘기다.

 

부인 리설주가 은하수관현악단 가수 출신이란 점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김정은은 이번 공연에 리설주와 함께 나왔다. 전격적인 중국 방문(3월25~28일) 때 퍼스트레이디로 외교무대에 데뷔시킨 부인을 남북교류 현장에도 등장시킴으로써 정상국가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한 것이란 분석이다. 그만큼 남측 가수들의 공연 무대에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공연에 등장한 일부 곡목을 두고 김정은과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사모곡(思母曲) 성격이란 말도 나온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의 경우 2004년 유선암으로 숨진 생모 고용희가 가장 좋아하던 심수봉의 곡 가운데 하나다. ‘김정일의 요리사’로 알려진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는 자신의 책에서 고용희가 자신에게 “김정일 장군님과 연애 시절 둘이 차 안에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같은 한국 노래를 밤새 들었다”고 털어놨다고 전하기도 했다.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거야》는 김정일(2011년 사망) 국방위원장이 즐겨 듣던 노래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 위원장도 남한 가요에 대한 애착이 특히 깊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2009년 8월 금강산관광 재개 문제 논의차 방북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묘향산 특각(별장)에서 김 위원장을 만나 오찬을 함께했다. 와인을 곁들인 식사에 흥이 오른 김 위원장은 “밴드 들어오라” 지시한 뒤 모두 11곡의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그 가운데 3곡이 한국 가요였다는 게 당시 현대 측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았던 정부 당국자의 귀띔이다. 여기엔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도 포함됐다.

 

서울에 온 탈북자 중 상당수는 북한에서 남한 가요나 TV드라마·영화를 접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특히 북·중 접경지역의 경우 이른바 ‘북한판 한류’로 불리는 한국 가요와 영상물을 접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주민들 사이에 ‘아랫동네 물건’이란 은어로 불리는 가요나 드라마의 영향력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한때 소녀시대의 율동을 가르쳐주는 학원이 생겼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였다. 가수나 배우들의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뿐 아니라 무대나 세트장의 소품 하나하나를 눈여겨보며 한국 사회를 동경하고 발전상을 깨닫게 된다는 진단도 있다.

 

북측 관계자들이 4월3일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남북 합동공연 리허설에서 걸그룹 레드벨벳의 공연을 지켜보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北 장마당 세대 “사랑해요 남한 제품”

 

특히 젊은 층들이 남한의 대중문화나 패션 트렌드에 민감하게 움직인다고 한다. 국가공급보단 시장에서 상품과 문화를 접하는 이른바 ‘장마당 세대’로 불리는 이들은 거침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한국산 ‘살결물’(스킨로션)을 쓰던 수준에서 이젠 아이크림과 색조화장·향수로 옮겨갔다는 말도 흘러나온다. 의약품의 경우 “후시딘(상처 치료제)을 달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 물품 사정에 밝아졌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방북한 우리 가수들과 만난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말을 잘해서, 이번에 ‘봄이 온다’(평양 공연의 주제)고 했으니까 이 여세를 몰아서 가을엔 ‘가을이 왔다’로 (공연 제목을 결정) 하자”고 말했다. 이번 가을에 다시 북한 예술단의 서울 공연이 이뤄지고, 남북한의 문화예술인들이 자주 오가려면 남북관계 진전과 신뢰구축이 긴요하다. 북한 비핵화 문제 등을 다룰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은 그 분수령이 될 수 있다. 남한 가요에 대한 김정은 위원장의 관심이 남북관계 개선과 북한 체제 개혁·개방의 촉매가 될 수 있을지 여부도 판가름 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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