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김정은, 여름휴가 포기하고 달려간 곳은?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7.20 13:47
  • 호수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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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인사이트] 7월 들어 주로 북방지역 체류…비핵화와 개혁·개방 주저하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올여름 통치 행보가 심상치 않다. 7월 들어 그는 북부지역에 주로 체류하며 공장·기업소와 건설현장을 돌아봤다. 6월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돌아온 뒤 평양 집무실에 머물며 후속 전략을 짤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대신 중국과의 접경지대를 따라 이동하며 ‘민생 챙기기’ 행보를 부각시키는 동선을 이어갔다. 7월6~7일 평양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도 김정은과의 만남을 예견했지만 결국 불발됐다. 

 

김정은의 행보를 두고 여름 휴양을 겸한 현지지도 행보라는 분석도 일각에서 제기됐다. 북부지구 특각(별장)에 가족과 함께 머물며 휴식을 취하면서 틈나는 대로 인근 산업시설이나 공사현장을 돌아보는 일정이란 얘기다. 하지만 북한 관영매체를 통해 파악된 김정은의 행보는 휴양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강행군이다. 더욱이 김 위원장이 쏟아낸 발언들이 경제현장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나 경제관료들에 대한 경고성 질책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뭔가 석연치 않은 분위기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함경북도 어랑군 수력발전소인 어랑천발전소 건설현장을 시찰했다고 조선중앙TV가 7월17일 보도했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金, 경제관료 향한 경고성 질책 쏟아내

 

북한 당국이 ‘현지지도’라고 일컫는 일련의 방문 일정을 통해 김정은 위원장은 경제실태에 대해 전례 없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평안북도 신의주화학섬유공장에 들른 자리에서는 “마구간 같은 곳에 현대식 기계를 들여놓았다”고 질책했다. “숱한 단위들에 나가보았지만 이런 일꾼들은 처음 본다”는 강도 높은 비판도 제기했다. 김정은의 이 같은 행보는 백두산이 있는 양강도 삼지연군을 거쳐 함경북도 지역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이어졌다. 어랑군에 짓고 있는 어랑천발전소 현장을 방문한 김 위원장은 “도대체 발전소 건설을 하자는 사람들인지 말자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고 격노했다는 게 선전 매체들의 보도다.

 

이런 움직임과 관련해 박영자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상반기 외교 행보로 소홀했던 민생시찰 및 간부 기강 잡기”라는 분석을 제기했다. 또 북·중 경협 본격화에 대비한 포석이란 진단도 내놓았다. 평북의 황금평·위화도 경제지대와 신의주 국제경제지대, 압록강 경제개발구 등이 북한의 개방정책이 집약된 곳이란 얘기다. 하지만 이런 분석과 달리 북한 매체에선 김정은이 특구 형태의 개발구 등지를 방문했거나 관심을 보였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는 어떤 보도도 나오지 않고 있다. 또 ‘외교 행보로 인한 민생 소홀’을 벌충하기 위한 움직임이라고 보기엔 현재의 북·미 관계 움직임이나 한반도 정세가 엄중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 때문에 김정은의 북부지역 체류와 북한 매체를 통한 일정 공개가 북한 당국에 의해 치밀하게 의도됐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싱가포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난 직후라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합의 이행 등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시점에서 김정은이 의도적인 지방 장기체류 일정을 보여주는 것이란 얘기다. 트럼프 특사로 방북한 폼페이오 장관을 김정은 위원장이 만나주지 않고 미국이 조속한 이행을 바라고 있는 6·25 전쟁 전사 미군 유해를 송환하는 문제를 한동안 지연시킨 것도 대미 협상술의 하나일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특히 북·미 정상회담 직후 김정은이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난 것도 중국 카드로 미국을 견제하겠다는 북한 측 의도일 공산이 크다. 앞서 2차례의 북·중 정상회담과 달리 6월 방중은 중국의 관영매체들이 김정은 베이징 도착 사실을 실시간 보도하는 등 부각시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김정은이 북·미 정상회담 합의의 신속하고 성실한 이행보다는 지연 전술을 펼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세기의 담판’이라고까지 불린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마치고 평양으로 귀환한 김 위원장이 어떤 행보를 보일 것인가 하는 점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가 얼마나 북·미 간 합의와 비핵화 이행에 성의를 보일 것인지를 판단할 잣대가 된다는 점에서다. 김정은 스스로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서명하는 자리에서 “과거를 걷고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인 서명”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세상은 아마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이라며 김정은 체제의 북한이 예전과 다른 변혁의 길을 갈 것임을 예고했다. 마치 비핵화 약속 이행뿐 아니라 개혁·개방과 인권 증진, 민생 문제 등 북한 체제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의 조치들을 취할 용의가 있음을 공언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김 위원장은 북·미 정상회담 전야에 싱가포르 야경을 돌아본 뒤 “오늘 참관을 통해 싱가포르의 경제적 잠재력과 발전상을 잘 알게 됐다”며 “앞으로도 여러 분야에서 귀국(싱가포르)의 훌륭한 지식과 경험을 많이 배우려 한다”고 말했다. 북·미 정상회담 준비에 막바지 공을 들이던 시점에 이뤄진 북한 노동당 핵심 간부들의 중국 개혁·개방 현장 학습도 눈길을 끌었다. 이 같은 움직임은 향후 북한이 개혁·개방이나 경제개발 노선에 힘을 기울일 것이란 관측에 힘을 싣는 듯했다.

 

7월17일자 노동신문은 12면 중 무려 9면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현지시찰 보도에 할애했다.


 

군비 증강 원하는 군부 강경파 의식하나

 

하지만 김정은의 최근 행보는 이런 예상이 적잖이 빗나가고 있음을 말해 준다. 담대한 개혁·개방 조치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 아닌 체제 내부의 경제관리 방식의 문제점을 짚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더욱이 시진핑을 필두로 한 중국 지도부의 지원사격을 뒷심 삼아 유엔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모면하려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형국이다.

 

김정은이 국제사회에 공언한 것과 달리 아직 개혁·개방이나 국제무대에서 정상국가로 변신하는 문제에 대해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무엇보다 미국과의 ‘비핵화’ 합의 이행 등이 현실로 닥칠 경우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등에 공들여온 군부와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살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외부 세계와의 접점이 커질수록 군부 쿠데타나 김정은 위해(危害) 시도, 주민들의 민주화 요구 등이 표출될 공산이 커질 것이란 우려도 작용했을 수 있다.

 

물론 70년 노동당 집권과 3대 세습 통치를 거치며 구축된 철저한 감시체제와 공포정치를 깨뜨릴 세력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노동당과 군부 파워 엘리트들의 불만과 체제 이반은 여전히 복병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게 고위 탈북인사들의 귀띔이다. 김정은의 경우 적어도 향후 30~40년 통치를 꿈꾸고 있을 게 분명하다. 절대왕국을 거머쥔 최고지도자 김정은에게 진짜 적(敵)은 변화와 개혁·개방에 목말라하고 있는 북한 주민일 수 있다. 미국과의 정상회담 합의이행이나 관계개선 행보에서 속도조절에 나설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배경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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