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주택, 이렇게 구입하라
  • 오윤현 기자 (noma@e-sisa.co.kr)
  • 승인 2001.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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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생활 하려면 "환상부터 깨라"
서두르면 불행 자초…고생 각오하고 큰 집 피해야
도시가 체질에 맞아 번잡함을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도시는 언젠가 탈출해야 할 고단한 터전이다. 개인 사업을 하는 장관용씨(38)도 마찬가지이다. 강원도 인제가 고향인 그는 서울에 사는 10년 동안 늘 전원 생활을 꿈꾸었다. 처가가 있는 경기도 양평에 야금야금 땅을 사놓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10년 뒤 그곳으로 내려가 달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땅을 일굴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도시 환경이 점점 열악해지고, 주 5일 근무제 도입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장씨처럼 시골 살림이나 전원 주택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 많다. 전원주택 전문 시공 회사인 '미리내'의 윤경수 대표는 올 봄부터 실수요자 중심으로 손님이 점차 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충고한다. 농촌 생활의 고충이 무엇인지, 자신의 경제 형편이 어떤지 하나하나 따져 보고 나서라는 말이다. 그들은 선험자(先驗者)들의 정착기가 시골행을 꿈꾸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1999년 봄, 안성균(37·서울 대광중 교사)·김옥심(36) 부부는 꽤 용기 있는 시도를 했다. 도시를 떠나 시골로 이사한 것이다. 안씨는 "부산이 고향이어서 어릴 때부터 시골에 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들 부부가 살고 있는 남양주시 입석1리는 행정구역으로는 시이지만, 논밭이 많고 마을 앞으로 제법 널찍한 냇물이 흐르는 전형적인 시골이다.


부부는 두 아들과 함께 하천에서 조금 떨어진 20평 규모 전원 주택에 산다. 아내 김씨는 "30년 된 낡은 농가를 거의 그대로 쓰고 있어서, 전원 주택이라고 하기에 좀 뭣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본채에 딸린 10평 규모 별채도 축사를 개조한 것이라고 밝혔다. 값은 대지 1백30평을 합쳐 6천7백만원. 가격에 비해 집은 전체적으로 오밀조밀 아름다웠다. 뜰에 서 있는 두릅나무·후박나무·두충나무·오가피나무와 낡은 담에 기댄 표고버섯 원목 20여 개가 인상적이다.




부부는 도시를 뜨려고 꽤 오래 준비했다고 말했다. 2년 동안 마음에 드는 살림집을 구하기 위해 서울 인근의 시골이란 시골은 다 돌아다녔다고 한다. 지금의 집은 물놀이할 하천이 가까이 있고, 집 뒤로 펼쳐진 '벼의 파노라마'가 '예술'이어서 단번에 계약했다. 정말 행운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 될 줄은 몰랐다. 김옥심씨는 인간답게 살려고 왔다가 비인간적인 일을 수없이 겪었다고 돌이켰다.


우선, 뼈대만 남은 집에 '살'을 붙이는 일이 기운을 쏙 빼놓았다. 기둥 바로잡고, 벽 뜯어고치고, 배선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폭우로 앞개울 물이 넘칠까 봐 한밤중에 삽을 들고 나갈 때는 왜 왔나 싶었다. 못이 튀고, 손이 긁힐 때마다 기술자를 떠올렸지만 부를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다 보니 생전 하지 않았던 부부싸움도 했다. 김씨는 그때마다 자신이 시골에 환상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뒤늦은 후회였다. 그래서 김씨는 요즘 누가 시골로 이주하겠다고 하면 "1∼2년쯤 전세를 살아본 뒤 결정하라"고 충고한다.


"시골도 전쟁터, 전세 살아보고 결정하라"


만약 뚜렷한 사계절을 보여주는 자연이 없었다면 김씨는 벌써 남편의 등을 도시 쪽으로 떠밀었을 것이다. 김씨는 '내장산 뺨치는' 앞산을 바라보며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고 말했다. 집 앞 하천도 행복의 마당이었다. 온 식구가 어항이나 반도(족대)를 들고 나가 물놀이를 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모든 불만과 걱정이 씻겨 나갔다.


신기한 일은 또 있었다. 바로 몸의 변화였다. 남편 안씨는 서울에 살 때 비염을 달고 살았다. 1년의 4분의 1은 병원에 갈 정도였다. 그런데 시골로 옮긴 뒤 비염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서울 청량리 근처 직장을 오가는 데 3시간 가까이 걸리지만, 피로를 느낀 적도 거의 없다. 안씨는 "감기에 걸려도 금방 낫는다. 이곳에 온 뒤로 병원에 간 적이 한번도 없다"라고 말했다.




부부가 이사하면서 가장 걱정스러웠던 부분은 교육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불안은 안심으로 바뀌었다. 30명이 다니는 분교는 저절로 자연·인성 교육이 될 정도로 풍광이 아름답다. 아이들은 그 안에서 마음껏 장난치며 더없이 활달하게 생활한다. 부모는 부모대로 치열한 성적 경쟁이 없어 마음이 편하다. 김씨는 "얼마 전 작은 애 (1학년)가 '엄마, 어느새 은행잎이 이렇게 많이 졌어' 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시골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부부는 난개발로 앞개울 물이 점점 혼탁해지고 있어서 언젠가는 더 깊은 산골로 들어갈 예정이다. 그러나 5년 뒤가 될지 10년 뒤가 될지 아직은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바로 2년 전 봄처럼 시골에 환상을 갖지 않겠다는 것이다. 부부는 도시 탈출이라는 잠재적 욕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시골에 환상을 갖지 말라. 시골도 똑같은 삶의 전쟁터다. 힘들고 고생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겁낼 필요도 없다."


안성균씨 부부가 어렵게 시골에 터를 닦은 반면, 경기도 양평 남한강가에 '그림 같은 집'을 지은 박화명(61·경기도 양평군 교평리)·조병희(53) 부부는 경제력 덕에 비교적 쉽게 시골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부산 미군부대에서 정년 퇴직할 때만 해도 박씨는 시골로 갈 계획이 전혀 없었다. 아내 조씨가 자신의 고향인 양평으로 가자고 말할 때마다 그는 좋은 계획이 아니라며 묵살했다. 그에게는 이미 다른 계획이 있었다. 바로 형제들이 사는 미국으로 이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미국에 갖다온 뒤 그는 마음을 바꾸었다. 적응에 대한 두려움이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대신 3년 전 사놓은 땅도 볼 겸해서 양평에 내려갔다가, 넓은 들과 풍부한 물을 보고 그 자리에서 시골행을 결정했다.




박씨 부부 역시 처음부터 고생길이 열려 있었다. 내 땅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리면 '행복 시작'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집터가 상수원 보호 지역이어서 제한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관공서를 쉰번 넘게 드나들었지만 별 진전이 없었다. 간신히 설계도면까지 만들어 냈을 때 또 다른 복병이 발목을 잡았다. 농지전용분담금을 내야 했던 것이다. 2천만원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 따져 보니 집을 직접 짓는 것과 돈 주고 사는 것에 별 차이가 없었다. "서두른 게 잘못이었다. 결국 몇 백만원을 그냥 날리고 말았다"라고 박씨는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장만한 집은 두 사람이 살기에는 조금 넓은 2층짜리 전원 주택이다. 널찍한 유리창이 사방으로 나 있어 하루 종일 햇볕이 들어오고, 앞뒤에는 남한강 모래밭과 야트막한 언덕이 펼쳐져 있다. 양평 읍내가 승용차로 5분 거리여서 살림살이도 더없이 편안하다. 아내 조병희씨는 "시골치고는 문화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어 만족스럽다"라고 말했다.


박씨 부부는 집을 지으려던 땅에 내년부터 농사를 지을 참이다. 소일거리가 있어야 시골 생활이 적적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난 몇 달 동안 체득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주민들과 유대를 넓히기 위해 마을 행사에도 꼭 참여할 계획이다. 그들은 그동안 익힌 노하우라면서, 좋은 전원 주택을 구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잘 지은 전원 주택을 많이 보고 안목을 높인다 △가능하면 동호인끼리 집을 짓는다. 20∼40% 정도 싸게 장만할 수 있다 △출퇴근과 상관없으면 강원권·충청권도 살펴본다 △도로·전기·전화선이 제대로 연결되(었)는지 살펴본다 △자금이 부족하면 헌 집을 고쳐서 새집처럼 쓴다 △인간에게 가장 이상적인 공간은 1인당 5평이다. 대궐 같은 주택은 피한다 △평소 건축 관련 잡지나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건축에 관한 지식을 축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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