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해 공동체 한농복구회 마을 현장 르포
  • 경북 울진·오윤현 기자 (noma@e-sisa.co.kr)
  • 승인 2001.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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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닌 '우리'가 사는 환경 천국/의식주 · 교육 · 의료 공유
비경으로 소문 난 왕피천(경북 울진) 주변의 경사진 언덕 곳곳에 자리 잡은 한농복구회(한농) 마을은 마치 무릉도원 같은 곳이다. 들어가는 길은 구절양장 흙길이고, 사방에는 곧게 뻗은 금강송이 빽빽하다.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개울은 금방이라도 발목을 잡아챌 것처럼 매혹적이다. 한마디로 반하지 않을 수 없는 풍경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외지인들은 또 하나의 풍경에 반하고 만다. 이채로운 주민들 모습이 눈길을 끄는 것이다. 그들은 철저히 공동체를 위해 움직인다. 일하는 동안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우리'와 이웃을 위한 봉사만이 있을 뿐이다. '네 것' '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농마을 이기송 회제(會弟=회장)는 "우리는 경천애인을 이념으로 이상촌을 세우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상향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병든 땅과 병든 몸 그리고 병든 정신을 완전히 회복하는 세상을 뜻한다.


한농마을은 현재 상주·진천·장흥·청송·원주 등 전국 10여 곳에 있다. 최근에는 미국·러시아·케냐·일본 등지에 해외 지부를 두었다. 전체 가족은 약 7천명인데, 본부 마을이 있는 울진 지부 가족이 제일 많다. 울진 지부는 병위·실둑·거리고·햇내 등 열세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족은 천 명이 넘는다.


가족들의 전직은 다양하다. 약 30%만이 농사를 짓던 사람이고, 나머지는 흙과 상관없던 사람들이다. 이기송 회제(43)와 마동운 지부제(47)는 잘 나가던 박사와 해병대 대대장이었다. 개중에는 한의사와 약사였던 가족도 있고, 미용사·차량정비사·학원 강사 출신도 있다. 한농마을의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힘들게 오른 자리를 박차고 외진 산골로 들어오게 한 것일까.




역사와 정신 : 한농의 정신적인 지주는 경북 상주에 사는 석선(石仙) 박광규씨(58)이다. 박씨는 충남 보령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30년 넘게 농사를 지으며, 20여 년간 지구 환경 회복 운동과 천연 농법(유기농)을 실천해 오고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나보다 남을 위해 봉사하라고 말해왔다. 물론 자신의 삶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 모습에 매료된 사람들이 하나둘 그의 곁에 모여들면서 한농이 탄생했다. 울진 지부는 1994년부터 형성되었다.


한농에는 직책은 있지만 직위는 없다. 회장·교장·총재·원장 같은 직위 뒤에는 항상 장(長) 대신 아우 제(弟)가 붙는다. 즉 회제·교제·총제가 되는 것이다. 책임을 맡고 있지만 아우가 형을 모시듯 주민을 섬기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은 직책상 호칭일 뿐 일상 생활에서는 서로를 삼촌·이모·형님·아우님으로 부른다.


금고 돈 마음대로 가져다 써


일상 생활 : 대개 아침 4∼5시에 일어난다. 기침한 뒤에는 마을 별로 체조나 명상, 등산을 한다. 7시쯤 아침 식사가 끝나면 회원들은 자기가 속한 농사부·생활부·건축부·차량부·교육부에 나가 일한다. 사회에서는 사무직을 선호하지만, 이곳에서는 특이하게도 농사부가 제일 인기 있다. 이기송 회제는 "흙에 씨앗을 뿌리고, 거기에서 싹이 틀 때의 신비함을 맛본 사람만이 그 이유를 안다"라고 말했다. 요즘은 해가 짧아져 오후 네댓 시에 일이 끝난다. 연장을 제자리에 놓으면 회원들은 각자 가정으로 돌아간다.




의식주 : 모든 생활 용품은 공동으로 나누어 쓴다. 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은 D마트는 주인 없는 쌀독이나 마찬가지이다. 뒤주에 든 쌀·콩을 누구나 언제든지 퍼갈 수 있기 때문이다. D마트에는 그 외에도 냄비·감자·달걀·과일·편지 봉투·옷과, 자체 개발한 라면·숯치약 등 없는 물건이 없다. 물론 모두 무료이다.


D마트 한쪽에는 돈이 잔뜩 든 금고도 있다. 금고 밑에는 '필요한 만큼 가져가세요'라는 안내 글이 써 있다. 그러나 돈 쓸 일이 없어 금고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경우란 거의 없다.


의료 : 한농 사람들은 병이 들면 수치스럽게 여긴다. 좋은 환경에서 신선한 음식을 섭취해 병이 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 충치나 소화 불량 따위에 걸리면 약사나 한의사였던 주민이 처방한다. 때문에 정부가 운영하는 왕피리 보건소는 깃발만 힘차게 펄럭일 뿐, 한국에서 제일 한가하다.


천연 농사법 : 8년 전 처음 땅을 개간할 때는 어려움이 많았다. 미생물이 모두 죽어 땅은 호미가 퉁길 정도로 딱딱했다. 천연 농약과 퇴비를 써서 땅을 부드럽게 만드는 데 꼬박 3년이 걸렸다. 벌레와 병충해도 들끓었다. 농약 대신 씀바귀 즙과 연기, 그리고 고춧가루와 숯 탄 물을 이용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고생은 연구로 이어졌다. 미생물연구소가 갖가지 천연 농약과 비료를 개발해낸 것이다. 채소와 과일의 당도를 높이는 인분(人糞) 액비를 개발해 냈는가 하면, 병충해 퇴치용 니코틴 액을 만들어 냈다. 미나리·쑥 따위를 갈아 만든 천연 액즙을 식물 영양제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음지에 뒹구는 낙엽에 붙어 있는 토착 미생물은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천연 재료이다. 이 균을 퇴비에 넣으면 속성으로 발효한다. 그만큼 쉽게 많이 거름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자체 개발한 천연 농약과 비료는 쌀이나 채소 재배에 이용된다. 그밖에 한농에서는 양계·젖소 사육 등을 통해 나오는 달걀 같은 부산물을 팔아 수익을 올린다(www.hannong.com 참조).




식생활 : 스콧 니어링과 함께 자연적인 삶을 실천한 헬렌 니어링은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보리)에서 건강과 장수를 위한 생활 요소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적극성, 밝은 쪽으로 생각하기, 깨끗한 양심, 금연, 커피·차·술을 멀리함, 간소한 식사, 채식, 설탕과 소금을 멀리함, 저칼로리와 저지방, 되도록 가공하지 않은 음식물.


물 없는 변기…
오수 정화하는 미나리꽝


한농 주민들도 헬렌과 스콧처럼 철저히 유기농으로 지은 신선한 음식을 섭취한다. 채식을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생명력이 있고, 깨끗하고, 단순하고, 돈이 덜 들고, 온건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요 실천 지침은 '아침은 황제처럼, 점심은 적당히, 저녁은 거지같이'이다.


이색 시설 : 골짜기에 푹 파묻혀 있는 시골이지만 한농마을에는 도시 뺨치는 시설이 여럿 있다. 우선 중앙 난방 시설. 낡고 허름한 건물 안에 거대한 쇳덩이가 보인다. 이 쇳덩이 밑에 불만 지피면 온 마을이 따뜻해진다. 쇳덩이 옆과 위에 차 있는 물이 끓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증기를 이용해 각 가정에 난방을 공급하는 것이다. 효과는 '만점'이다. '개량 푸세식' 화장실도 이곳에만 있는 이색 시설이다. 실내에 자리 잡은 변기는 겉보기에는 양변기와 똑같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면 헉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물이 없기 때문이다. 맞다. 물 내리는 변기가 아니다. 변은 재래식 화장실처럼 기다란 관을 타고 2m 아래로 떨어진다. 관의 끝을 20cm 정도 위로 꺾어놓고, 중간에 팬을 달아 구린내가 절대 역류할 수 없도록 했다.


미나리꽝도 빼놓을 수 없다. 마을 단위로 10평 안팎의 미나리꽝을 한두 개씩 가지고 있는데, 각 가정에서 나오는 개숫물을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 개숫물이 들어오는 입구는 퀴퀴한 냄새와 함께 뿌연 물 천지다. 그런데 출구쪽 물은 떠서 마셔도 될 정도로 맑다.




교육 : 초등 과정에서 대학 과정까지 모두 마을 안에서 이루어진다. 교사도 마을 안에서 차출된다. 울진에는 현재 한농기술학교(고교)와 천연농업훈련원(대학)이 있고, 초등학생 31명은 삼근초등학교 왕피분교에 다닌다. 초등학생은 학교에서 남을 이기는 법이 아니라, 이웃에 봉사하고 남과 화해하는 법부터 배운다. 예절 교육도 빼놓을 수 없다.


점심은 마을이 제공하는 급식을 먹는데, 11월20일 메뉴는 현미밥과 끓인 생우유·군고구마·묵·파래무침·김치·콩나물무침·야채쌈·버섯국이었다.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도 바로 귀가하지 않는다. 부모의 일이 끝날 때까지 학교 옆 건물에서 한농 교사들의 지도로 악기를 배우거나, 국·영·수 과외 지도를 받는다. 부모들의 일이 끝나는 오후 5∼6시, 아이들은 마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땅을 위해 싸우고 투쟁한 사람들의 눈빛과 손에는 어떤 느낌이 있는 모양이다. 한농 주민들의 얼굴과 손에서는 울퉁불퉁하면서도 환한 느낌이 우러났다. 그만큼 공동 생활에 썩 만족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상향 만들기는 계속될 전망이다. 아직 병든 몸과 마음으로 병든 땅에서 고단한 삶을 지탱하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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