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에게 풀만 먹으라고?"
  • 오윤현 · 안은주 (noma@sisapress.com)
  • 승인 2002.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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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방송 후 채식 '이상 열풍'...
체질에 안 맞으면 질병 · 영향 불균형 불러
지난 1월12일 오전 11시55분. 서울 포이동의 SM채식뷔페에는 전에 없이 손님이 몰려들었다. 좁은 식당 안은 금세 손님 50여 명으로 북적거렸다. 밖에도 20여 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지배인 선우동섭씨는 그 날 오후 늦게서야 손님이 몰린 이유를 알았다. SBS 특집 다큐멘터리 <잘 먹고 잘 사는 법> 때문이었다. 방송에서 육식의 폐해를 심각하게 보여주자 허겁지겁 채식 식당으로 몰려든 것이다. 이 식당은 요 며칠 사이 매출이 세 배로 늘었다.




푸른생명채식연합 홈페이지(http:// vegtus.or.kr)에도 난리가 났다. 평소에는 하루 2백여 명이 접속했는데 SBS 방송이 나간 뒤 접속 건수가 무려 만여 건 가까이 늘어났다. 푸른생명채식연합 이광조 회장은 현재 3개월 이상 채식한 사람을 40만 정도로 추산하면서, 방송 영향으로 채식자가 급속히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채식이 열병처럼 번지고 있다. 갈빗집이나 정육점은 썰렁해지고, 대형 마트의 야채 코너나 채식 전문 식당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린다. 채식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매력을 갖고 있다. 육류에 들어 있는 환경 호르몬·성장 호르몬·유해 화학 물질을 섭취하지 않음으로써 몸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치명적인 질병을 유발하는 콜레스테롤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또 하나, 환경을 보호할 수 있다. 햄버거 하나에 들어가는 쇠고기를 얻기 위해서는 열대우림 2.5평을 파괴해야 한다. 매년 전세계 소가 먹어치우는 사료 양은 78억명을 먹일 수 있는 분량이다. 또 가축들은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끔찍하게 사육되고 도살된다.





그러나 일부 전문의와 한의사 들은 최근의 채식 열풍을 걱정스런 눈으로 본다. 채식이 반드시 건강을 보장하고 모든 사람에게 다 통하는 만병통치 방식이 아닌데도 너나없이 유행처럼 채식을 좇기 때문이다.



체질의학자인 한의사 권도원 박사는 모든 사람에게 채식이 좋은 것은 아니며, 육식과 채식도 체질에 맞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간이 강하고 폐가 약한 목양체질과 담이 강하고 대장이 약한 목음체질은 육식을 위주로 섭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폐가 강하고 간이 약한 금양체질과 대장이 강하고 담이 약한 금음체질은 채식을 위주로 해야 한다고 권박사는 주장해 왔다(<8체질 건강법> 참조). 목양체질이나 목음체질이 채식만 고집하는 것은 호랑이나 사자에게 풀만 주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한국인 절반 이상은 반드시 고기 먹어야”



강남의림한방병원 배철환 원장은 몇 년 전 채식 바람이 불 때, 채식 부작용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들을 여럿 보았던 경험이 있다. 배원장은 “반드시 고기를 먹어야 하는 체질을 가진 사람이 고기를 일절 안 먹고 채식만 하면 오히려 병을 얻기 쉽다”라고 말했다.


특히 한국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태음인은 반드시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태음인이 채식만 고집할 경우에는 힘이 빠지고 소화가 안되어 고생한다는 것이다.


이기수씨(52·서울시 노원구)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씨는 “몇 년 전 채식 열풍이 불 때 6개월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하고 힘이 빠졌다. 채식을 포기했더니 오히려 기운이 나고 몸이 좋아졌다”라고 말했다. 배원장은 체질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육식이나 채식 한 분야를 고집하는 것보다는 혼합식을 하는 것이 낫다고 강조했다.





고기를 일절 안 먹고 채식만 고집하는 현상을 우려하는 것은 영양학자와 양의사 들도 마찬가지이다. 영양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육류를 섭취하지 않을 경우 우리 몸에서 체조직을 구성하고 호르몬·항체 등을 합성하는 아미노산과 비타민 B12 등이 결여되기 쉽다.


한영실 교수(숙명여대·식품영양학)는 “육류에는 모든 아미노산이 필요한 만큼 골고루 들어 있고, 철분이나 칼슘과 같은 중요한 무기질의 함량도 높다. 그러나 식물성 단백질에는 대개 한 가지 이상의 아미노산이 빠져 있고, 무기질 함량도 채소마다 다르다”라고 말했다.


예컨대 옥수수에는 이소로이신과 리신이라는 필수 아미노산이 없고 콩에는 트립토판과 메치오닌이 없다. 따라서 육류·우유·계란 등은 한 가지 식품만 섭취해도 필요한 단백질이나 무기질을 얻을 수 있지만, 야채나 곡류는 여러 가지를 섞어 먹어야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비룡 교수(서울대·가정의학)는 “채식만 고집하면 빈혈이 생길 수 있고, 특히 성장기 어린이나 수술한 뒤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임산부 등은 적절한 양의 동물성 식품을 섭취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영국영양재단의 로버트 피커드 박사도 지난해 영양학 세미나에서 섭취하는 음식 종류를 채식으로 제한하는 것은 건강에 해롭다고 경고한 바 있다. 원래 잡식성 동물인 인간의 장에는 갖가지 음식을 소화하는 여러 가지 박테리아가 있는데, 섭취하는 음식의 종류를 제한해 이 박테리아들을 할 일 없이 놓아두면 병원균이 침입하기 쉽게 만들어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양학자들은 특히 이번 채식 열풍에서 우유마저 꺼리는 현상을 크게 염려한다. 방송에서 동양인 가운데에는 유당 분해 효소가 없는 사람이 많고, 우유 칼슘이 골다공증 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문제를 제기한 뒤 우유 소비량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문현경 교수(단국대·식품영양학)는 유당 분해 효소가 없는 사람은 엄마 젖도 못 먹는다고 주장한다. 모유를 먹을 수 있었던 사람이라면 우유를 소화할 수 있고, 우유 속의 영양소들이 건강에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에서 채식장려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진 가장 큰 이유는 지나친 육식으로 인해 지방이 총칼로리 중 40~50%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총칼로리 중 지방이 차지하는 비율이 19% 정도로 적정선이다(1998 국민건강 영양 조사결과). 그러나 단백질 총섭취량에서 동물성 단백질 섭취량이 차지하는 비율은 1971년 11.7%에서 1998년 48%로 무려 4배 이상 증가해 영양학자들이 권고하는 수준인 30%를 넘었다. 육류 소비량도 지난 10년 사이 2배 이상 증가했고, 고지방과 고단백질 섭취가 부른 성인병도 크게 늘었다.



이런 수치들은 우리의 육류 소비가 일으킬 수 있는 건강 문제가 아직 크게 걱정할 상황은 아니지만, 안심할 처지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고기는 가라, 채식만 이 최고다’라는 극단적 식이 습관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이야기이다.


음식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장기적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한때 유행을 좇아 극단적 식습관을 갖게 되면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윤현·안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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