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제철인 싱싱한 나물들
  • 이영미 (문화 평론가) ()
  • 승인 2002.02.0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며칠 전 음식점에서 산채 정식을 사 먹었는데, 상에 놓인 나물의
절반 이상이 제철 것이 아니었다. 애호박 볶음·생취나물 볶음·돌나물
무침·오이 무침 등은 철이 아니니 온실 재배가 분명하고, 숙주나물과
콩나물은 늘 철 없이 먹는 것이다. 음식점에서는 제철 나물을 선택해
반찬을 바꾸는 일이 참 불안하고 번거로운 일인가 보다.


사람들은 겨울에는 생생한 제철 나물이 없는 줄 안다. 말렸다가 볶아
먹는 검은 나물만 생각한다. 물론 날이 추우니까 가짓수가 적기는 하다.
하지만 푸른 나물 중 시금치 같은 것은 겨울이 제철이다. 지금 시장에
가보라. 짝 벌어져 푸른 이파리 속에 빨갛고 노란 심을 드러낸 시금치가
지천으로 깔려 있다. 깨끗한 것 고른다고 단정하게 묶인 시금치 사는
것, 특히 여름철에 퍼렇고 길다랗게 자란 시금치를 사 먹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흙이 묻어 지저분해 보이는, 옆으로 짝 벌어진 겨울
시금치 맛과 비교하면 여름 시금치는 시금치도 아니다. 시금치는 전라남도
지방에 내려가면 푸른 이파리를 드러낸 채 밭에서 월동을 하는데, 겨울을
나기 위해 온힘을 다해 육질을 단단하게 하고 겨울 찬 바람을 덜 맞기
위해 옆으로 퍼져 땅에 붙은 그 시금치가 진짜 맛있는 것이다.



뿌리 쪽의 붉은 색 나는 부분을 가능한 한 잘라내지 말고 다듬어서
미지근한 물에 씻으면 흙이 잘 씻긴다. 먹기 좋을 만큼 데친 후 무치는데,
왜간장·깨소금·참기름 약간만 넣으면 된다. 식성에 따라서
파를 넣는 사람도 있고 고춧가루나 조선간장을 넣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나물 자체가 아주 맛있기 때문에 양념을 많이 안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


겨울에만 맛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나물은, 바로 물미역이다. 물미역은
겨울에만 나온다. 흔히 먹는 방법은 살짝 데쳐서(검붉은 미역을 데치면
녹색이 된다) 초고추장을 찍어 먹거나 새콤달콤하게 무쳐 먹는 것인데,
결혼 후 나는 경남 해안 지방 식으로 먹는 것을 배웠다. 우선 아주 싱싱한
물미역을 사야 한다. 검고 반짝거려야 하고, 만져 보아 부드러우면서도
손가락으로 문질러도 뭉그러지지 않아야 한다. 이런 물미역을 사다가
뿌리 쪽의 굵은 줄기들을 떼어내고, 약간 미지근한 물(너무 뜨거우면
파랗게 익어버린다)을 조금 넣은 후 마치 빨래를 하듯 부걱부걱 소리를
내며 빤다. 얇은 미역잎이 다 뭉개질 것 같지만 신기하게도 싱싱한 미역은
전혀 뭉개지지 않는다. 미역에 배어 있던 바닷물 소금기가 거품처럼
일어나 빠져나올 때까지 열심히 빨아서 찬물에 헹구어 놓는다. 해안
지방 사람들은 이것을 상추나 배추처럼 쌈을 싸먹는다. 양념은 당연히
멸치젓이나 갈치젓이다. 혹은 꽁치 과메기 같은 것도 이런 물미역으로
싸서 초고추장을 찍어 먹으면 비린내도 없이 맛이 그만이다.


좀 얌전하게 먹고 싶으면 썰어서 무치는데, 파·마늘은 넣지
않고 깨소금·왜간장·참기름만으로 양념을 한다. 이런
미역 무침은 내륙 지방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음식이고, 처음에는
바다 냄새가 너무 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몇 번 먹어보면 데친
물미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싱싱한 해초의 맛이 기막히다. 멍게나 해삼에서
나는 싱그러운 바다 냄새를 즐기는 사람이면 금방 길이 든다.


무엇보다도 이런 나물들은 싸다. 1천∼2천 원어치만 사면 실컷 먹고
남는다. 남아도 걱정 없다. 시금치는 된장국 끓이면 되고, 물미역도
미역국을 끓이면 된다. 물미역국은 싱싱한 맛으로 먹는 것이니 고기보다
굴이나 조개를 넣고 살짝 끓이는 것이 더 상큼하다.  


이영미 음식 이야기는 격주로 연재됩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