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우습게 알면 인생이 ‘피곤’
  • 안은주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2.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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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갑상선·폐·심장 질환 의심해야
요즘 당신의 컨디션은 어떠한가.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겁고 나른하지 않은가? 특히 점심 식사 후 졸음이 쏟아지는가? 어깨가 뻐근하고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몸이 찌뿌드드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춘곤증에 시달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춘곤증은 몸에 특별한 이상이 있어서 나타나는 병은 아니다. 말 그대로 봄철에 흔히 나타나는 증세로서, 변화하는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일어나는 일시적 현상이다. 점심 식사 후 졸린 까닭은 음식을 소화하느라 뇌로 가는 피의 양이 적어 나른한 데다 생체 시계가 야간과 비슷한 상태로 맞추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체온이나 호르몬 등은 일정한 주기로 바뀌게 되는데, 체온은 점심 시간 전후에 밤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



극심한 피로에 구역질 나면 급성 간염 가능성
춘곤증을 이기려면 적당히 운동하고,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한 식품을 섭취하고, 몸과 정신을 무리하게 쓰지 말아야 한다. 특히 싱싱한 채소와 봄나물을 충분히 먹고 고단백질을 섭취하면 훨씬 덜 하다(80쪽 상자 기사 참조).



그러나 피로가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면 단순한 춘곤증으로 보아 넘겨서는 안된다. 남재현 원장(프렌닥터 내과) 말대로 지속적인 피로는 몸 어디엔가 이상이 생겼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남원장은 “생활 주기가 전과 다름없는데도 부쩍 피곤하고, 푹 자도 개운하지 않으면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 보라”고 권했다. 그는 피로 때문에 병원을 찾는 환자 10명 가운데 1∼2명에게서는 성인병과 같은 특정한 질환이 발견되었다고 덧붙였다.



내과 의사들은 피로의 원인을 찾기 위해 환자가 호소하는 피로감 외에 다른 증상을 함께 살핀다. 예컨대, 발열·기침·호흡 곤란·체중 감소·두통 등 여러 가지 증상 중 어떤 것이 동반되었는지를 살피고, 몇 가지 간단한 검사를 한다. 대개 피로감 때문에 병원을 찾는 환자는 엑스선·혈액·소변 검사 등을 한다. 간 질환이 의심되는 경우에는 복부 초음파 검사도 한다. 이종경 부장(세란병원·내과)은 “간단한 검사만 해도 피로를 부른 웬만한 질병은 찾아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윤홍석씨(44·회사원)는 얼마 전부터 피로를 자주 느꼈다. 왼쪽 가슴께가 묵직하고, 속이 더부룩해서 소화도 매끄럽지 않았다. 처음에는 일이 많아서 그러려니 했는데 오전에는 참을 만하다가도 오후로 갈수록 못 견디게 피곤해졌다. 또 소변 색깔이 눈에 띄게 탁해졌다. 내과를 찾아 진료와 간단한 검사를 받은 결과 급성 간염이었다. 윤씨의 경우처럼 간염이나 지방간과 같은 간 질환은 극심한 피로감을 몰고 온다. 급성 간염은 소변 색깔이 샛노랗게 변하며 구역질이 나고, 만성 간염은 황달 없이 지속적으로 피곤한 증상만 나타난다.



주로 남자를 피곤하게 만드는 질병이 간 질환이라면, 여자를 피곤하게 만드는 질병으로는 갑상선 질환과 빈혈을 꼽을 수 있다. 이선미씨(33·회사원)는 몇 달 사이에 체중이 5kg이나 늘고 유난히 추위를 탔다. 전보다 심하게 피로감을 느꼈지만 계절 탓만 했다. 겨울이어서 운동량이 줄어 살이 찌고, 그로 인해 더 피곤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날이 풀린 뒤 먹는 양을 줄이고 운동을 해도 몸이 나아지지 않고 피로감은 더 심해졌다. 이씨는 병원을 찾은 뒤에야 문제의 원인이 갑상선 저하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박혜영 교수(가천의대·내과)는 “갑상선 저하증에 걸리면 체중이 늘고 추위를 잘 타는 반면, 갑상선 항진증에 걸리면 체중이 급격하게 주는 대신 더위를 탄다”라고 설명했다. 갑상선 질환자는 더러 목 부위가 튀어나오고, 월경 주기나 양에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 이 질병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많다. 미국에서는 환자 1천3백만명이 피로하다고 느꼈을 뿐 자신의 갑상선 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지낸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갑상선 질환은 상당히 진행되기 전까지 눈치 채기 어렵다.



‘에이즈 사촌’ 만성피로증후군 환자 수두룩






오영미씨(41·주부)는 몇 달 전부터 부쩍 피곤해졌다고 느끼던 차에 주변 사람들이 ‘얼굴이 누렇게 떴는데, 간이 나쁜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바람에 병원을 찾았다. 검사 결과는 뜻밖에도 빈혈이었다. 자궁에 근종이 있어서 피가 났는데, 오씨는 월경량이 늘어난 줄로만 알고 있었다. 빈혈에 걸려도 간이 좋지 않을 때처럼 얼굴이 누렇게 뜨고, 피로가 심해진다. 흔히 빈혈에 걸리면 어지럽다고 알고 있지만, 모든 빈혈 환자가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특히 빈혈이 서서히 진행되면 몸이 적응하기 때문에 잘 모르고 지내기 일쑤이다. 그러다 맥박이 빨라지고 숨이 차며 쉬 피로해지는 증상이 나타나고 나서야 병원을 찾는다.



피로를 심하게 느낄 때 의심할 수 있는 또 다른 대표적인 질환이 만성피로증후군이다. 남녀노소 관계없이 누구나 걸릴 수 있다. 만성피로증후군에 걸리면 특별한 원인 없이 6개월 이상 심한 피로감에 시달린다. 피로감과 함께 근육통과 인후염 등 가벼운 몸살 증상이 6개월 이상 지속되기도 한다.


원인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스트레스와 환경 오염으로 인체 면역력이 떨어져서 발생하는 면역 질환으로 보고 있다. 일본에서는 ‘에이즈의 사촌’쯤으로 보기도 한다. 만성피로증후군 전문 클리닉을 운영하는 박태홍 원장(박태홍내과)은 “지금까지 내가 본 환자만 4천명이 넘는다.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사람이 만성피로증후군에 노출되어 있다. 정신 질환이 아닌데도 제대로 진단받지 못해 정신과에서 엉뚱한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국내에서 만성피로증후군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전문가가 드물어 환자 실태조차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 질환은 면역 이상에서 오는 뇌혈관 질환이기 때문에 장기간 방치하면 뇌졸중과 같은 마비로 이어진다고 박원장은 설명했다. 그는 온갖 검사를 다 해보아도 특정한 질환이 발견되지 않고 극심한 피로감이 계속되는 사람이라면 만성피로증후군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가운데서도 피곤함을 부르는 질병이 있다. 코골이가 심할 때 생기는 수면무호흡증이 대표적이다. 안영록씨(36·자영업)는 잠잘 때 베개를 머리가 아닌 목에 대는 것만으로 피로감을 확 줄였다. 수면무호흡증이 있는 안씨는 잠자는 동안 산소를 충분하게 공급받지 못해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 그래서 늘 피곤했는데, 목에 베개를 댄 이후부터는 코골이가 줄고 피곤함도 훨씬 감소했다.



신체 질환만 피로를 부르는 것은 아니다. 우울증과 같은 정신 질환이 있을 때에도 극심한 피로를 느낀다. 미국에서는 의사를 찾는 피로 환자의 절반이 우울증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정적인 생각이 몸을 쇠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질병에서 오는 피로는 오후보다는 아침에 덜한 편인데, 우울증에 의한 피로는 아침이라고 해서 덜하지 않다. 오히려 자고 일어나서 더 피로한 경우가 많아 ‘아침에 눈 뜨기가 무섭다’고 토로하는 우울증 환자가 많다.



이밖에도 피로를 부르는 질환은 상당히 많다. 가래를 동반하는 기침이 있으면서 저녁 무렵에 매우 피곤함을 느끼면 폐결핵, 비만한 사람이 갑자기 목이 타고 소변량이 많아지면서 쉬 피로함을 느끼면 당뇨병을 의심해 봐야 한다. 심장 질환이 있을 때에도 피로가 몰려오고, 암도 몸을 지치게 만드는 대표적인 질병이다. 특히 체중이 갑자기 줄고 쉬 피로해지며 밥맛이 없을 때에는 악성 종양의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피로와는 무관한 것 같은 알레르기 질환도 사람들로 하여금 진이 빠지게 만든다.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날 때 분비되는 화학 물질이 졸음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질환에서 말미암는 피로는 병을 적절히 치료하지 않으면 점점 더 심해진다. 따라서 늘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전문의를 찾아 정확한 검진을 받아 볼 필요가 있다. 몸이 보내는 위험 신호를 무시하면 병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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