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화선>으로 칸 영화제 본선 진출한 임권택 감독
  • 이문재 편집위원 (moon@sisapress.com)
  • 승인 2002.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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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업은 나와 참 많이 닮은 사람”
임권택 감독(66)의 오른손 손등에는 붉은 반점이 있다. 상처처럼 보인다. 임감독은 “이 점이 있는 사람은 전생에 사람이었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전생에 ‘취화선’이었을까. 임감독의 삶과 영화는 장승업(1843~1897)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서편제>와 <춘향뎐>에서 소리를 찍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동양화 같은 풍경에 비중을 두었다. 장승업의 방황과 죽음에서는 멀리 <만다라>의 잔상까지 보인다. 장승업의 붓과 임권택의 풍경이 호흡하는 속도감 있는 몽타주다.





회갈색 눈동자, 어눌하지만 뼈가 있는 말투, 가볍게 떨리는 손, 입가에 잔잔하게 번져 있는 고양이 수염 같은 주름. 40년 넘게 100편 가까운 영화를 찍어온 노장의 세월이 낯빛에서 배어나온다. 지난 4월26일 오전 10시, 서울 한남동 태흥영화사. 임권택 감독은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과 머리를 맞대고, 막 팩시밀리로 받은, 칸 영화제 본선 출품작 명단을 살피고 있었다. 오는 5월10일 개봉하는 <취화선>은 칸 영화제 본선, 즉 경쟁 부문에 올라 있다. 그랑프리(황금종려상)를 거머쥘 확률이 제법 높은 것이다. 이사장은 “감이 좋다”라고 말했고, 임감독은 “귀신이 도와준 영화”라고 말했다.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칸에 가 있는 것 아닌가?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다. 이번에는 무슨 성과가 있어야 한다. 나이도 뉘엿뉘엿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들을 했다. 그림·서예·도자기·세트 등 여기저기서 지원도 많았다. 시중에 없는 소도구는 박물관에서 빌려올 정도였다.



전에 없던 일인가?



이번처럼 다방면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내 영화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취화선>은 만드는 데서 오는 고통도 컸지만, 내 영화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한 영화다.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보답하려면, (칸 영화제에서) 어떤 성과를 내야 한다.



재작년 5월 <춘향뎐>을 들고 칸에 참가했을 때, 박수를 받고 눈물을 흘렸다는데, 왜 그랬나?



베니스 영화제에서 <씨받이> 시사회를 마치고 5분 동안 박수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그 5분이 너무 길어서 감당할 수가 없었다. 지난번 칸에서는 우리가 2층에 앉아 있었는데, 아래층 관객은 보이지도 않고 위층도 끝이 안보일 정도로 큰 극장이었다. 그렇게 만당한 자리에서 박수를 받으니, 상이고 뭐고를 떠나서, 오랜 세월 동안 노력해온 결과가 한꺼번에 보상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펑펑 우는 인간은 아니다.



<취화선>은 예술과 시대, 개인과 전체와의 긴장 관계에 주목한 것 같다. 하지만 장승업과 시대와의 마찰이 조금 어색해 보인다.



전해지고 있는 장승업 선생의 행적을 보면, 그 시대의 큰 사건들과 맞물려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시대를 비켜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뿔나게 혼자 그려서, 혼자 즐긴 게 아니었다.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준다는 보람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정도에 그치는 삶이었다면 영화로서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래서 이 떠돌이 환쟁이로 하여금 세상을 개혁하려는 동학운동의 한 곁다리와 부딪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장승업이 고부 관아에서 그린 ‘민중화’(매와 되새떼 그림)을 동학농민군이 불에 태워버린다. 그렇다면, 임감독은 장승업을 비판한 것인가?



나는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흐름이 있고, 세가 형성이 된다고 해서 반드시 거기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안에 직접 가담할 수 없는 무수한 사람이 더 많다. 장승업 선생이 그런 시대를 반영하는 그림을 그린 적은 없다. 되새떼 그림도 허구다. 그러나 그 분은 민중의 아픔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성격이다. 그림이라는 장르 안에 깊이 살고 있지만, 정신 자체가 맑았고, 신분도 중인 중에서도 아주 낮았다.



장승업을 따라가면서, ‘이건 바로 나다’라고 무릎을 많이 쳤을 것 같은데.



정 선·김홍도·장승업 등 조선 시대에 화가가 많지 않은가. 20년 전부터 그 세계를 그려보고 싶었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인물이 누구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1970년대 후반, 장승업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왕이 불렀어도 자기가 싫으면 궁궐을 뛰쳐나간 용기 있는 자유인이라는 단순한 사실에 혹했다. 그때는 군사 정권이 우리를 심하게 조이던 시절이어서, 그런 얘기가 검열에 통과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접어두었던 묵은 소재였다. 나는 장승업과 같은 점이 많다. 그 분은 고아로 떠돌았고, 나는 고아는 아니었지만 떠돌이로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1960∼1970년대 이른바 B급 영화를 만들던 시절이, 장승업이 춘화도를 그려보라는 유혹을 받던 시기와 오버랩되지 않았는가?



그렇다. 또 그 분이 술꾼이었는데, 나도 B급영화 만들 때 감독보다는 술꾼으로 훨씬 유명했다. 그 다음에, 그 분이 여자를 좋아해서 맨날 미인을 옆에 놓고 있었다는데, 나도 뭐 미추를 가리지 않고 여자를 좋아했다(웃음). 그 분은 결혼도 마흔이 넘어서 했다. 나도 마흔이 넘어서 결혼했다. 제일 비슷한 것은, 그 분은 아주 젊어서부터 50대가 되도록 환쟁이로서, 직업인으로서 살아낸 분이다.


나 역시 20대에 데뷔해서 40년 넘도록 밀려나지 않고 그럭저럭 살고 있다. 장승업 선생이 조선시대 4대, 3대 화가로 불렸다는 것은 그냥 천재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부단히 거듭나려는 노력이 없으면, 얻을 수 없는 세계다. 내 영화는 어떤지 몰라도, 나도 부단히 거듭나려고 필사적으로 살아왔다. 내가 더 흥미가 있었던 것은 그 양반의 죽음이었다. 그 분이 50대에 행방불명이 되자 금강산에 들어가 신선처럼 살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 분을 완성자, 화선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절대 그렇게 볼 수 없었다. 완성의 세계가 어디 있겠는가.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인물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자전적 영화 아닌가?


자전적 영화는 아니다. 왜냐면 영화에 들어간 에피소드가 내 삶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에서, 알려진 행적이 거의 없는 분의 삶에 기구한 픽션을 가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불타는 가마로 들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강한데.



그것은 드라마틱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분의 행방불명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 고민이 많았다. 마지막 장면은 시나리오를 처음 쓸 때부터 구상했던 것이다. 장승업은 거듭나려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도리 없이 그런 죽음 쪽으로 가야 한다. 자신의 한계를 느낀 화가였다면 인간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그 아름다운 세계로 함몰되고 싶었을 것이다.



풍경과 세트(100년 전 종로 거리, 기와집과 초가집)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화가의 생을 다루는 영화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그림 같은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왜 이 사람이 이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가라는 당위성과 필연성을 살려야 했다. 그리고 <취화선>은 내 영화 중에 인서트가 가장 많은 영화다. 시대가 암울하고 나라가 기울어 간다는 것을 색깔로 드러내면서도, 그 안에서 화사한 그 무엇을 내비쳐야 하는 영화다.



칸을 염두에 둔 영화여서 그렇겠지만, 서양인들을 위해 동양화를 설명하는 대목들이 눈에 띈다. 동양화 강좌처럼 보인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도 대부분 동양화에 대해 잘 모를 것이다. (동양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주기 위해 찍은 영화가 아니다. 단지, 서양화하고 다른 세계를 지향한 그림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다. 아, 동양화란 이런 거구나라는 어림짐작만 갖는다 해도 나는 만족이다.



영화가 속도감이 있다.



어떤 사람은 영화를 못 따라온다. 굉장히 빠른 편이다. 서양 영화와 우리 영화를 비교했을 때, 우리는 속도감보다는 여운을 우선하는데, 서양에서 보면 우리의 여운이 사족으로 비친다. 그렇다고 해서 서양 관객에게 맞추기 위해 속도감 있는 편집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다.



영화 감독은 예술가이기도 하지만, 경영자이기도 하다. 조직을 이끌어가는 노하우가 있을 텐데.



노하우가 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있다면 단지 내가 보여주는 것이다. 배우나 스태프에게 내가 이 영화를 얼마나 열심히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안 따라온다.



그래서 늘 현장에 제일 먼저 나가는가?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는, 현장에 먼저 가서, 내가 그 장소와 친숙해지기 위해서다. 현장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면, 거기서 새로운 앵글이 찾아진다. 또 하나는 ‘감독은 저렇게 먼저 나와 있는데, 우리가 게으름을 피울 수 있겠는가’라는 마음가짐을 전해주기 위해서다. 이런 것이 현장을 운영해 가는 노하우가 아닐까.



‘그 장면이 될 때까지’라는 임감독의 연출 원칙은 언제 생긴 것인가?



연기자나 스태프가 소화할 수 없다고 그냥 넘어가 버리면, 영화만 죽는 게 아니고 나도 죽고 연기자나 스태프도 다 죽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버틴다. 아마 그런 원칙이 없었으면, 나도 벌써 밀려났을 것이다.



영화 관객이 거의 다 20대이고, 감독이나 배우도 다 젊은층이다. 염려스럽지 않은가?



참으로 개탄스러운데, 도리가 없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다. 우리 감독들 중에 30대, 40대, 50대를 소화할 수 있는 감독이 없다. 나는 기대하기를, 이렇게 인기를 모은 감독들이 관객을 끌고 가라는 것이다. 관객과 함께 늙어가야 한다. 만일 지금의 관객을 놓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한국 영화가 세계 시장을 겨냥하고 있는데,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서양 영화의 아류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쉬리>가 좋은 성적을 냈지만, 할리우드 스타일로는 그 사람들을 뛰어넘지 못한다. 한국형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요즘 젊은이들이 장승업 같은 인물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 것 같은가?



내가 알고 싶은 것이다(웃음). 외면할 것 같기도 하다. 한 가지 기대를 거는 것은, 인터넷에 <취화선>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많을 때는 하루에 3만 명이 들어와서 부하가 걸릴 정도라고 한다. 그 젊은이들의 관심을 지켜 보고 있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정일성 촬영감독이 찾아왔다. 한국 영화의 삼총사가 모인 것이다. 영화사 앞에 있는 음식점에서 삼총사와 함께 점심을 했는데, 화제는 단연 칸 영화제였다. 임감독은 5월19일 칸으로 떠난다. 칸에 가면 임감독은 사흘 동안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한다. 전세계에서 몰려든 영화 담당 기자들의 숱한 질문에 일일이 답해야 한다. 그리고 5월25일, 임감독은 칸 영화제 시상식장에 앉아 있을 것이다.


<취화선>은 임권택 감독의 99번째 작품이다. 100 번째 작품이 무엇이냐고 묻자 임감독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게는 모든 영화가 첫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아직 다음 작품을 정하지 않았다는 임감독은, 최근 김 훈의 <칼의 노래>를 읽었는데 그렇게 생생한 묘사력을 발휘한 소설은 처음 읽었다고 말했다. 정일성 촬영감독도 ‘대단한 소설’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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