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 ‘23인 낙점’의 비밀
  • 손장환(<중앙일보>) 체육부 부장 ()
  • 승인 2002.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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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환 길들이고 김남일·최진철 크게 키워…차두리는 행운아
월드컵에 출전할 선수 23명이 마침내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낙점되었다. 대부분은 오래 전부터 출전이 예상되었던 선수였지만, 막판까지 선발이 될지 안될지 궁금했던 선수도 없지 않았다. 차두리(22)와 이동국(23)이 대표적이다.




알려진 대로 차두리는 히딩크호에 승선했고, 이동국은 하선했다.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동국은 열아홉 살에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했던 ‘축구 천재’다. 0 대 5로 대패했던 네덜란드전에서 후반 교체 멤버로 나서 활발한 몸놀림으로 축구 팬들에게 희망을 던져주기도 했다. 프로 축구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아 독일 분데스 리가에서 6개월 동안 활약했었다.



차두리는 어떤가. 월드컵 대표팀에 뽑히기 전까지는 대학 선발에도 끼지 못했던 선수였다. 현재 국가 대표팀 선수 가운데 유일한 대학생이다. 차범근 전 대표팀 감독의 아들이라는 사실로 유명했지만 실력으로 각광받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차두리는 한국에서 열리는 월드컵 본선에 뛰게 되었다.



왜 이런 결정이 났을까. 여기에 히딩크 감독의 생각이 숨어 있다. 히딩크 감독 스스로도 차두리와 이동국을 비교해 ‘차두리가 이동국보다 낫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포지션 문제라고 말했다. 이동국은 최전방 공격수다. 윙이나 처진 스트라이커로 활용하기 어렵다. 히딩크 감독이 원하는 멀티 플레이어가 아니다. 그런데 최전방 공격수에는 황선홍과 최용수가 있고, 설기현도 그 자리에 설 수 있다. 즉 이동국은 차두리에게 밀려서 탈락한 것이 아니고 황선홍과 최용수에게 밀린 것이다. 차두리는 오른쪽 윙으로서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월드컵 최종 엔트리는 한국에서 가장 축구를 잘하는 23명을 뽑는 것이 아니라, 전술과 포메이션에 따라 적재적소에 필요한 선수들을 뽑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히딩크 감독은 이동국을 미워했을까? 아니다. 히딩크 감독도 이동국의 자질은 인정했다. 신체적인 조건이 좋고 득점력도 뛰어나다고 말했다. 그래서 끝까지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러나 이동국은 히딩크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라운드에서 자기의 실력을 드러내지 못했고 악착 같은 면모도 보여주지 못했다.



히딩크가 싫어했던 윤정환이 선발된 까닭



윤정환(29)과 비교하면 더 잘 드러난다. 사실 윤정환은 히딩크 감독이 싫어하는 타입이다. 체력이 약하고 스피드도 없고 수비 가담 능력도 떨어진다. 멀티 플레이어도 아니고 오로지 플레이메이커로만 쓸 수 있다. 그래서 히딩크 감독은 처음부터 윤정환은 안중에 없었다. 주위에서 계속 윤정환을 추천할 때도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나 북중미 골드컵을 계기로 찬스를 만들어주는 플레이메이커의 필요성이 대두하자, 내키지 않았지만 윤정환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다. 윤정환은 기회를 살렸다. 그는 훈련에 최선을 다했고, 평가전 때도 뛰어난 패스 능력으로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막판에 히딩크 감독의 마음이 달라져 발탁된 선수가 윤정환이라면, 안정환(26)은 철저히 길들이기 대상이었다. 한국 선수로는 유일하게 빅 리그인 이탈리아 리그에서 뛰는 안정환은 히딩크호 출범 이후 줄곧 붙박이 베스트 멤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히딩크 감독의 입에서 “누구도 안심해서는 안된다.




경기를 자주 뛰지 못하면 대표팀에서도 뛰지 못한다. 유럽파의 체력이 많이 떨어진다”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속 팀에서 자주 벤치를 지켰던 안정환도 예외가 아니라고 말했다. 안정환 처지에서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체력 문제를 강조하는 히딩크 감독이 안정환의 체력이 후반에 급격히 떨어진다고 말했을 때는 안정환이 탈락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유럽 전지 훈련 때 튀니지와의 평가전에서 안정환은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들기 위해 엄청나게 뛰었다. 돌파도 좋았고 패스도 좋았다. 수비에도 적극 가담했고 누구나 합격점을 줄 만했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의 평가는 인색했다. 그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초조해진 안정환은 더욱 분발했다. 그런데 최종 엔트리를 발표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히딩크 감독은 “안정환은 튀니지전 직후 최종 엔트리로 확정했다”라고 말했다. 길들이기였음을 인정한 것이다.



새롭게 떠오른 선수로는 김남일(25)과 최진철(31)이 있다. 김남일은 국내 프로 축구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선수였다. 히딩크호에 탑승할 때도 해외파가 빠져나간 자리를 메우는 역할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김남일이야말로 히딩크식 축구에 꼭 필요한 선수였다. 강한 압박을 할 수 있는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 상대 플레이메이커를 꽁꽁 묶어 공격을 지연시키는 임무를 하는 위치다.


히딩크 감독은 그동안 이 임무를 유상철·송종국·이영표에게 번갈아 맡겼으나 김남일이 적격이라고 일찌감치 판단했다. 그리고 김남일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몇 차례 평가전을 통해 ‘수비형 미드필더로는 세계적인 선수’라는 평을 얻기에 이른 것이다. 최진철의 경우도 극적이다. 최진철 역시 심재원 등 해외파가 빠져나간 자리를 메운 선수였다. 그러나 큰 키(187cm)를 이용한 공중전과 유럽 선수들에게 밀리지 않는 체력으로 낙점되었다. 오히려 독일에서 뛰는 심재원이 밀려났다.



홍명보·김병지는 어쩔 수 없어 뽑았다?





무어니 무어니 해도 히딩크호의 최고 행운아는 차두리다. 대학 선발에도 끼지 못했던 선수, 올림픽 대표팀 연습 파트너였던 그가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끼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히딩크가 편애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히딩크 감독의 총애를 받다가 결국 월드컵호에 최종 승선했다. 과연 차두리와 히딩크 감독 사이에 뭔가 알지 못하는 끈이 있을까. 그것은 히딩크 감독이 최근 “내 선택이 옳았다”라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차두리는 한마디로 그가 원하는 선수였다. 히딩크 감독이 70명에 가까운 선수들을 테스트한 결과 오른쪽 윙에서 뛸 수 있는 선수는 설기현·최태욱·이천수·차두리 정도였다.



그러나 설기현은 오른쪽 윙보다는 최전방 스트라이커나 처진 스트라이커로 더 어울린다. 최태욱과 이천수는 폭발적인 스피드는 있지만 체격이 왜소하다. 유럽 선수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체격과 체력 그리고 스피드를 겸비한 선수는 차두리가 거의 유일하다. 히딩크 감독은 거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마무리가 어설프고 세기가 부족했지만 인내를 갖고 그를 중용했다. 그러자 지난 코스타리카전에서 첫 골을 넣으면서 차두리는 만개하기 시작했다. 최태욱의 두 번째 골을 어시스트하는 장면은 히딩크 감독이 딱 원하던 장면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처음부터 자신의 밑그림을 그려놓고 선수들을 맞추어 나갔다.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자기 입맛에 맞는 선수들로 최종 엔트리 23명을 고른 것이다. 예외가 있다면 윤정환·김병지·홍명보 정도다. 이들은 원래 ‘히딩크 타입’이 아니었지만 주변 여건에 따라, 그리고 선수 자신의 노력에 따라 히딩크 감독의 마음이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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