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세상에 이런 일이…
  • 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2.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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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변·좌절·환희 넘쳐난 ‘예선전 15일’ 핵심 정리
한국과 일본은 우승 후보의 무덤인가. 한·일 월드컵에서 이변이 속출하고 있다. 우승 후보 0순위였던 프랑스와 아르헨티나는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갔고, 이탈리아와 잉글랜드는 천신만고 끝에 16강에 턱걸이했다. 6월14일에는 유럽의 자존심 포르투갈마저 예선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나마 우승 후보의 면모를 보인 나라는 브라질과 독일뿐이다. 이제 우승 후보는 이 두 나라와 스페인·영국·이탈리아로 좁혀졌다. 승리한 나라에는 희열과 긍지를, 패한 나라에는 좌절과 눈물을 안겨준 한·일 월드컵 예선전 15일을 정리했다.





징크스에 혼쭐난 팀들


월드컵에는 유령처럼 징크스가 따라다닌다. 특히 강팀일수록 징크스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징크스는 선수들에게 덫과도 같지만, 관중에게는 재미를 배가하는 흥분제나 다름없다. 징크스의 첫 희생자는 프랑스였다. ‘전 대회 우승팀은 개막전에 부진하다’는 징크스를 깨뜨리지 못하고 5월31일 개막전에서 세네갈에 0-1로 패해, 결국 예선도 통과하지 못하는 망신을 샀다. 그러나 2006년 독일 월드컵부터는 개막전 징크스를 보기 힘들 수도 있다. 전 대회 우승팀의 자동 출전권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축구 종가 잉글랜드도 징크스 탓에 애를 먹었다. 잉글랜드는 1968년 이후 스웨덴을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그간의 전적은 3패6무. 6월2일 잉글랜드는 스웨덴 출신 스벤 고란 에릭손 감독(54)의 지휘 아래 그 징크스를 깨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전반전에는 베컴과 마이클 오언의 활약으로 1-0으로 앞서며 징크스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후반 들어 힘으로 밀어붙인 스웨덴에 1점을 내주어, 결국 지긋지긋한 징크스를 계속 짊어지고 다니게 되었다.


이탈리아도 신흥 축구 강국 크로아티아를 이기지 못하는 징크스가 있다. 지난 8년간 세 차례 싸워 1무2패를 기록했다. 지난 6월8일 조별 예선전에서도 이탈리아는 징크스를 깨는 데 실패했다. 1-0으로 앞서다가 2골을 내주고 역전패한 것이다.


한국 덕에 가까스로 16강 진출에 성공한 미국은 묘한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 ‘먼저 골을 넣으면 필승(必勝)하고, 먼저 골을 먹으면 필패(必敗)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지난해 7월 이후 A 매치에서 18승(4무9패)을 기록했는데 그 가운데 열다섯 번이 선취 득점한 경우였다. 반면 역전승은 한 번도 없었다. 9패 가운데 일곱 번이 먼저 골을 먹은 경우였다. 6월14 밤에도 미국은 징크스에 몸서리를 쳤다. 폴란드에 전반 5분 만에 2골을 내주고 맥없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반면 월드컵 때마다 우승 후보로 거론되는 스페인은 1962년 칠레 월드컵 때부터 지고 다니던 소름끼치는 징크스(1차전은 이기지 못한다)를 떨쳐냈다. 3무5패가 그동안의 1차전 성적이었는데, 6월2일 슬로베니아를 3-1로 격파하면서 1차전 무승(無勝) 징크스에서 훌훌 벗어났다. 한국과 일본도 징크스 부담에 시달렸다. ‘개최국=16강 진출’이라는 징크스가 그것이다. 전문가들은 두 개최국의 전력이 약하다는 점을 들어 그 징크스가 이번 월드컵에서 깨지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약속이나 한 듯 가볍게 16강에 진출해 징크스를 이어갔다.





비운에 통곡한 우승 후보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인 프랑스 대표팀의 푸른 유니폼에는 수탉과 별 하나가 새겨져 있다. 수탉은 프랑스 팀을 상징하고, 별은 월드컵 한 번 우승을 뜻한다. 월드컵이 개막되기 전 프랑스 선수들은 자신들의 가슴에 별이 2개가 되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처녀 출전한 세네갈에 불의의 일격을 당했을 때도 그들은 설마 했다. 슈퍼스타 지네딘 지단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6월11일 지단도 바이킹의 후예들이 지키는 덴마크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오히려 역습으로 2골을 먹고 로제 르메르 감독과 함께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월드컵에서 전 대회 우승 팀이 1라운드에서 탈락한 것은 1950년 이탈리아와 1966년 브라질에 이어 세 번째이다. 단 한 점도 내지 못하고 탈락한 것은 프랑스가 처음이다. 프랑스 선수들에게 이제 한국은 ‘저주스러운 땅’으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아르헨티나가 1회전에서 탈락한 것은 1962년 칠레 월드컵 이후 두 번째이다. 4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재앙 앞에 득점왕을 노리던 크레스포도, 월드컵 3연속 해트트릭을 노리던 바티스투타도 울었다. 2002 한·일 월드컵과 칠레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보인 모습은 너무나 흡사하다. 칠레 월드컵 때 아르헨티나는 첫 경기에서 불가리아를 1-0으로 이겼지만, 잉글랜드에 3-1로 패한 뒤 헝가리와 비겨 탈락했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아르헨티나는 나이지리아를 1-0으로 이겨 산뜻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역시 잉글랜드에 0-1로 발목을 잡혀 40년 만에 또다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6월4일 ‘약체’ 한국에 패한 뒤 집으로 향한 포르투갈 선수들에게도 한국은 잊지 못할 땅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포르투갈 안토니우 올리베이라 감독의 말처럼 ‘강한 팀이 패할 수도 있고, 약한 팀이 이길 수 있는 것이 축구’인 것을….


세네갈·파라과이의 ‘기막힌 각본’


월드컵에서는 반드시 이변이 있었다. 한·일 월드컵의 첫 이변은 세네갈이 일으켰다. 국제축구연맹 랭킹 42위인 세네갈이 1위 프랑스를 1-0으로 누른 것이다. 사실 프랑스를 이겼을 때만 해도 세네갈의 16강 진출을 점친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6월16일 카마라의 황금 골로 스웨덴을 침몰시키고 8강에 진출해,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카메룬 신화’를 재현했다.


파라과이의 괴짜 골키퍼 칠라베르트는 예선 마지막 경기가 시작되기 전 ‘16강 각본’을 떠올렸을 것이다. 1무1패인 자신들이 슬로베니아를 2골 차 이상으로 꺾고, 1승1무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스페인에 패한다는 각본. 사실 그 각본은 현실이 될 가능성이 적었다. 그런데 후반 20분을 넘어서면서 각본은 현실이 되어갔다. 1-1 점수를 2-1로 뒤집는 데 성공한 것이다. 후반 38분 마침내 각본은 현실이 되었다. 교체 선수로 들어가 동점골을 넣은 쿠에바스가 또다시 그림 같은 슛을 성공시킨 것이다. 3-1.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스페인에 2-3으로 패해 두 팀 모두 1승1무1패에 골득실도 같았지만, 파라과이가 다득점에서 앞섰다. 파라과이는 이탈리아·미국·터키 등과 함께 한·일 월드컵에서 가장 극적으로 16강에 진출한 팀이 되었다.





“나를 주목하라”…떠오르는 별


수탉으로 상징되는 프랑스의 목을 처음 비튼 선수가 세네갈의 부바 디오프였다면, 완전히 숨통을 끊어놓은 선수는 덴마크의 욘 달 토마손(26·덴마크)이었다. 182cm에 74kg인 토마손은 예선 세 경기에서 4골을 넣으며 강력한 득점왕 후보로 떠올랐다. 하지만 6월15일 팀이 16강전에서 패해 그의 모습은 이제 이탈리아 AC 밀란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머리 좋은’ 미로슬라프 클루제(24·독일)는 월드컵 역사를 다시 쓸지 모른다. 6월11일 클로제는 카메룬과의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또다시 헤딩골을 성공시켜 머리만으로 연속 5골을 넣는 진기록을 수립했다. 세계 언론은 그가 ‘6골=득점왕’이라는 최근의 월드컵 징크스를 깨리라 예상한다. 그러나 클루제는 더 큰 욕심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대선배인 게르트 뮐러가 지키고 있는 월드컵 최다골(14골)을 경신하는 것이다. A 매치 열두 번에서 8골을 넣을 정도로 슈팅 감각이 좋고 나이도 어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대기록을 작성할 가능성이 있다.


브라질이 우승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우승 후보들이 대거 탈락한 데다, 4년 동안 부상으로 신음하던 호나우두(26·브라질)가 부활한 덕이다. 호나우두는 월드컵이 열리기 전 경기마다 골을 넣겠다고 호언장담했다. 6월13일까지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가 토마손과 클루제와의 득점 경쟁에서 이기고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끈다면, 한·일 월드컵은 그를 위한 잔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별


뜨는 별이 있으면 지는 별도 있는 법. 지네딘 지단(29·프랑스)이 대표 선수이다. 월드컵이 열기기 전까지 그가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라는 데 이견을 다는 전문가는 없었다. 그만큼 그의 드리블과 볼 컨트롤, 패스는 세계 최고였다. 당연히 몸값도 세계 최고이다. 이적료를 8백50억원이나 받았고, 연봉이 7백만 달러나 된다. 하지만 그는 부상으로 이번 월드컵에서 한 골도 못 넣고 ‘종이 호랑이’로 전락했다. 더구나 나이 때문에 이제 그의 모습을 월드컵에서 보기 힘들 것 같다. 2006년이면 그는 만 33세가 된다.


‘득점 기계’ 가브리엘 바티스투타(33·아르헨티나)도 쓸쓸히 퇴장했다. 이번 대회에서 그는 월드컵 3회 연속 해트 트릭을 노렸다. 하지만 팀이 16강 고지에 오르는 데 실패해 헤트 트릭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나이도 적지 않아, 한국의 축구팬들이 바티스투타를 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을 전망이다. 루이스 피구(30·포르투갈)의 현란한 드리블과 송곳 같은 패스도 이제 월드컵에서는 보기 힘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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