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도식 냉면·막국수의 참맛
  • 이영미(문화 평론가) ()
  • 승인 2002.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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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하시는 어떤 분 말씀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흰색을 느끼는 감각이 매우 민감하다고 한다. 흰색과 검은색 같은 절대적인 색은 질의 차이가 없을 것 같지만 그건 인위적인 색상표 위의 이야기일 뿐, 현실 속에서 흰색이란 아주 다양한 질이다. 눈과 우유와 창호지와 소복의 색깔은 다 흰색이지만 얼마나 다른가. 도자기 가게에 지천으로 쌓인 것이 백자이지만, 질감은 얼마나 다양한가. 물론 그것들을 구별하는 눈이 금방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옛말에 밥맛 알고 물 맛 알면 어른이라고 했는데, 희고 맑은 맛이란 많이 접해 보아야만 비로소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생활 속에서 흰색을 많이 접하고 살았기 때문에 흰색에 대한 감각이 매우 예민하다는 것은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서론이 길었는데, 오늘 이야기할 것은 냉면과 막국수 맛에 대한 것이다. 자극적이기 이를 데 없는 비빔냉면을 즐기던 청소년 시절에 물냉면이란 참 매력 없는 것이었는데, 스무 살을 넘기면서 시원한 물냉면이 좋아졌다. 시원하면서도 새콤달콤한 국물에 쫄깃한 국수가 참 매력적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매력을 느끼던 부분은 ‘새콤달콤’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대학 시절 지도교수를 따라 평안도식 막국수 하는 집에 간 적이 있었다. 안암동에서 용두동 가는 길, 골목 안쪽에 간판도 없는 집이었는데, 찜닭과 막국수, 빈대떡 등 몇 가지 종류만 만드는 집이었다. 그 막국수를 처음 먹어본 느낌은 정말 이상했다. 그저 맑은 동치미 국물에 메밀국수를 말아 내놓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달콤하기는커녕 새콤한 자극도 없는 그냥 밍밍한 맛이었다. 고추 양념을 넣어봐도 겨자를 넣어봐도 별 맛이 나지 않았다. ‘도대체 이런 걸 무슨 맛으로 먹지?’ 하면서도 어른 앞이라 한 그릇을 억지로 먹었다.


그 뒤로 나는 그 맛을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이후 나는 국물보다는 면발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다. 제품화된 면을 사다 삶아 내어놓으면 고무줄처럼 질기면서도 별 맛이 없는데, 주문을 받는 즉시 국수틀에다 눌러 주는 면은 쫄깃하면서도 부드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냉면집보다는 막국수집을 선호했다. 냉면은 웬만한 한식집 메뉴에 구색을 갖추어 끼어 있어 국수틀을 놓은 집은 흔치 않았지만(어쩌다 들어간 음식점에서도 주방을 기웃해 보고는 국수틀과 물 끓는 솥이 없으면 ‘죄송합니다’ 하고 그냥 나와버리곤 했다), 막국수는 닭갈비·보쌈 등 몇 종목만 취급하므로 국수를 믿을 만했기 때문이다. 전분이 적게 섞이고 메밀이 많이 든 부드러운 국수에, 진한 양념을 얹어 차게 식힌 닭 국물을 부어주는 춘천식 막국수는 찬 음식이면서도 시원하기보다는 강하고 자극적인 맛으로 먹는 음식이었다.


맑은 동치미 국물에 말아놓은 국수에 맛을 들인 것은 30대 중반을 넘기면서이다. 메밀로 반죽해 갓 뽑은 구수한 국수에 맛을 들이고 나니, 국물도 점점 맑은 것을 찾기 시작했다. 구수한 메밀 자체의 맛을 즐기려니 국물에 참기름이니 깨소금 같은 향이 강한 양념이 든 춘천식 막국수보다는 별 양념이 없는 편이 나았던 것이다. 당연히 물냉면도 오장동 냉면 같은 것이 아니라, 장충동 평안면옥 냉면의 맑은 맛이 좋아졌다. 그러다가 결국 나는 그 평안도식 막국수에 맛을 들이고야 말았다.

장충동 족발집에서 유일하게 ‘원조의 원조’를 내건 집이 ‘평안도집’인데, 그 집의 막국수가 옛날 안암동에서 억지로 먹던 그 평안도식 막국수 맛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맹물처럼 맑은 동치미 국물에 만 메밀국수가 지금은 왜 그렇게 맛있는지, 이제 나도 나이가 들 만큼 들었나보다.

이영미의 음식 이야기는 격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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