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위원회 위원장 사퇴한 전성철 교수
  • 장영희 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2.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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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성 없는 무역위는 죽은 조직”
마늘 파동의 후폭풍을 맞은 셈인가. 무역위원회(무역위) 전성철 위원장(세종대 교수)이 자진 사퇴했다. 관가에서는 전위원장의 사퇴를 둘러싸고 정치적 의도를 가진 돌출 행동이라는 곱지 않은 시각이 보이는가 하면, 기관의 명예 실추에 수장으로서 희생을 자원했다는 동정론도 나온다.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그의 사퇴는 내년 초 새 정부가 출범할 때 통상 조직 개편과 관련한 논의를 촉발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지난 7월 세계무역기구(WTO)의 다자 무역 라운드인 도하개발어젠다 서비스 분야 협상이 시작되는 등 내년부터는 통상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질 전망이어서 개편 논의도 활기를 띨 것으로 관측된다.



임기가 2년 4개월여나 남았는데 사퇴한 이유는?






한마디로 무역위원회의 위상이 실추한 것에 책임을 통감했고 리더십의 한계를 느꼈다. 7월25일 정부의 마늘 대책이 발표되고 나서 며칠 만에, 6월 말 농협이 제기한 세이프 가드(긴급 수입 제한 조처) 4년 연장 요청에 대해 정부로부터 사실상 결론을 요구받았다. 7월29일 소집된 무역위 회의에서 그래도 무역위원 7명에게 ‘마늘 문제는 온국민이 지켜 보고 있는 사안 아니냐. 피해 조사를 시작해 보지도 않고 당장 결론을 내는 것은 스스로 무역위의 존립 근거를 흔드는 일이다’라며 강력하게 결정 연기를 호소했다. 그러나 다수 위원들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기각이라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고 거취를 표명하게 된 것이다.



2년 전 한·중 마늘 협상 때 세이프 가드 연장 불가를 합의한 상태에서 몇주 결정을 연기한다고 해서 결론이 달라졌을지 의문이다.



산업자원부장관은 연장 신청을 기각해야 한다는 공문까지 보내왔다. 무역위로서는 기각할 때 하더라도 피해 조사에는 착수해야 한다. 병원을 찾아온 환자에게 진찰조차 못하겠다며 돌려보낸 꼴이 되었으니 이래도 무역위가 살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나. 일부에서는 오해하는데, 피해 조사를 시작하는 것이 꼭 세이프가드 발동을 위한 전초 단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먼저 정부로부터 1조8천억원에 달하는 마늘 지원 대책이 나왔으니, 그것이 마늘 농가에 세이프 가드 발동과 엇비슷한 효과를 내는 것으로 최종 판단된다면 그 때 기각하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판단을 하라고 존재하는 무역위가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무장 해제를 당했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해 50만 마늘 농가에 죄송할 따름이다.



한국 정부가 연장 불가에 합의했다는 사실을 언제 알았나?



언론에 나오기 1주일쯤 전인가? 7월10일 재정경제부 차관보 주재로 마늘 대책 회의가 열린 직후 알게 되었다.



마늘 파동의 본질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2년 전 중국과의 협상에서 세이프가드를 연장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본다. 당시로서는 중국 정부가 취한 초강수 보복 조처(핸드폰과 폴리에틸렌 제품 수입 중단)를 철회시키는 것이 지상 과제였을 것이다. 더 큰 이익을 지켜내기 위해 다른 것은 양보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협상 아닌가.

중국산 마늘에 세이프 가드를 발동하면 반드시 보복하겠다는 중국 정부의 으름장을 한국 정부가 가볍게 여긴 것이 실책이라면 실책이다. 당시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도 아니어서 무슨 보복 조처를 취하더라도 국제법 틀 속에서 해결할 수도 없지 않았나. 무역위 관점에서 볼 때도 연장 불가 합의가 곧 무역위의 활동을 제한한다고 볼 수 없다. 합의를 했더라도 피해 조사를 할 수 있고 구조 조정(경쟁력 강화 방안) 같은 결론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마늘 파동의 본질은 이 사실을 고의적으로 정부가 은폐했느냐 여부일 것이다.



진정으로 무역위의 위상을 걱정했다면 조직에 남아 변화를 꾀하는 것이 더 건강한 방법 아니었나?



남아서 고군분투하느냐, 아니면 사퇴함으로써 무역위의 중요성을 알리느냐 두 갈래 길에서 왜 고심하지 않았겠나. 사퇴라는 방식을 택한 것은 그만큼 현실의 높은 벽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희생하는 충격 없이 여론을 환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친구가 정치적 잇속을 챙기기 위해 쇼를 한다’며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8개월 동안 나름으로 열심히 했다고 보는 이들은 충정으로 이해해 주더라.



그동안 무역위가 유명무실했던 것도 사실 아닌가?



무역위가 출범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인지도가 매우 낮은 것은 사실이다. 지난해 11월 취임 후 여론조사를 해보니까 중소기업 경영자 10명 가운데 6명은 무역위가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안다고 응답한 사람도 수출 촉진 기구쯤으로 여겼다. 그동안 정부의 무역 정책도 수출 쪽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무역위 활성화를 결과적으로 가로막은 것도 사실이다. 1980년대 중반 워싱턴 D.C.에서 통상 전문 변호사로 활동할 때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위력을 절감할 기회가 있었다.

수입 물품에 대해 반덤핑이나 세이프 가드 발동 조처 등으로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공정 거래 질서를 꾀하는 무역위가 제대로 기능하면 자국 기업이 얼마나 큰 혜택을 얻는지 생생하게 보았다. 법에 따라 제대로 행사하면 외국 정부나 업체도 승복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의 처지는 어떠한가. 언론이 바지저고리·거수기라고 칭할 정도로 무역위는 산업자원부라는 행정기관의 한 하위 조직일 뿐이다. 무역위에 속히 자율성과 독립성을 부여해야 한다.



반드시 행정 조직에서 떨어져 나와야 할 이유가 있는가?



명색이 무역위의 수장이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예산권과 인사권을 산업자원부장관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 하나 쓸 수 없으니 통상 관련 조직의 생명인 전문성을 높일 방도도 없다. 무역위를 산자부 산하 기구라고 하지만 현재의 위상은 산자부 내 조직과 하등 다르지 않다. 왜 다른 나라들은 무역위를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조직으로 만들었을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세이프 가드처럼 이해가 상충하는 결정을 행정 부처의 이해나 정치·외교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뜻에서다.

장관은 정치권에 취약하고 정치권은 기업에 기를 못펴는 것이 현실 아닌가. 민간인 신분인 위원장이 공무원 조직(무역조사실)을 거느려야 하고 비상임인 것도 말이 안된다. 위원장 등 위원 8명(총 정원 9명) 가운데 7명이 비상임인 데다 대우도 신통찮으니 위원회 활동이 활성화할 수 있겠나. 밥만 먹고 수입 시장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는 상임위원이 다수를 차지해야 ‘안에서도 깨지는’ 악순환을 막을 수 있다.

WTO 협상이 시작되고 미국의 압력이 거세질 것으로 보이는데.



미국 대통령에게 무역협정 신속처리권을 부여하는 통상법 안이 의회를 통과해, 미국의 통상 압력이 거세질 것이 뻔하다. 내년 3월 말까지 서비스 시장 개방 양허안을 세계무역기구에 내야 하는 등 굵직한 통상 현안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이렇게 통상 환경이 바뀌고 있는 만큼 통상 시스템에도 구조 개편이 필요하다.



통상 조직을 어떻게 손질해야 한다고 보는가?



자국 기업과 외국 기업을 구별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며 협상 방식도 양자 협상보다 다자간 협상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이제는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직접적인 지원을 하기도 어렵다. 우선 대외 협상의 전초기지인 통상교섭본부를 외교통상부에서 독립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본디 첨예한 경제적 이해를 둘러싸고 총성 없는 전쟁을 치러야 하는 통상 쪽과 선린 우호 관계를 앞세워야 하는 외교 쪽이 한 울타리에 있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통상교섭본부와 무역위에 독립성과 자율성을 부여하고 전문성을 높이는, 다시 말해 전쟁을 치를 여건을 만들어준 후 ‘밖에서도 밀리고 안에서도 깨진다’는 비판을 해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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