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란국이 있어 풍성한 한가위
  • 이영미 (문화 평론가) ()
  • 승인 2002.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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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음식을 생각하면 나는 늘 분열을 경험한다. 내가 먹고 싶은 것과 내가 하고 있는 것 사이의 분열 말이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은 엄마와 할머니가 힘들여 해주셨던 음식인데, 18년 전 추석부터 나는 시댁에서 내가 먹고 싶은 음식과는 다른 음식을 내 손으로 해먹고 있다.


나는 결혼을 하고서야 토란국과 송편, 녹두전이 한민족 보편이 아닌 단지 서울 중심의 추석 음식이라는 걸 알았다. 경남 출신인 시어머님은 추석에 무와 콩나물을 고춧가루에 버무려 얼큰한 쇠고기 국을 끓이고 부추전(경상도 방언으로는 정구지전), 고구마전을 부치셨다. 송편도 서울에 올라와서부터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실컷 일만 하고 먹는 재미조차 없었던 그 해 추석은 정말 재미없었다. 그 다음 해이던가, 큰동서와 친척들이 추석에 올 수 없는 사정이 생겨 새색시 티를 못 벗은 나 혼자 장을 보게 되었다. 난 시어머님한테 상의도 안하고(지금 생각하니 참 당돌하지!) 소고기 사태와 토란·다시마·두부 같은 것을 잔뜩 샀다. 낑낑 들고 간 장바구니를 보신 시어머님은, 한숨을 폭 쉬더니 ‘네 맘대로 해봐라’ 하셨다.


실력 발휘를 할 때가 되었다고 착각(?)한 나는 심혈을 기울여 토란국을 끓였다. 사태 고기를 덩어리째 폭 고아 국물을 내면서 다시마까지 넣어 달착지근한 맛을 더했다. 역시 고깃국은, 고기를 썰어 넣어 끓이는 것보다, 통으로 폭 삶아내는 것이 좀 귀찮기는 해도 국물 맛을 제대로 낸다. 다시마를 넣을 때 두부를 썰지 않고 통으로 넣어 함께 삶았다. 삶아 건진 고기를 썰어 찢고 다시마도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두부도 건져 손가락만 하게 길쭉길쭉 썰었다. 그리고 그 국물에 다듬은 토란을 넣었다.


삶은 두부를 다시 썰어 넣는 그 대목에서 나는 입에 저절로 군침이 돌았다. 추석 토란국 속의 두부는 특히 맛있다. 두부를 썰지 않고 통으로 넣어 한참 삶으면, 두부의 구수한 맛이 국물에 우러나오고 두부 속에 구멍이 펑펑 나면서 사이사이에 국물 맛이 밴다. 물론 두부를 처음부터 썰어 넣으면 속에 구멍도 안 생기고 국 맛과 어우러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국은 명절 때나 먹어볼 수 있었다.

국을 큰솥으로 많이 끓일 때에만 두부 한두 모를 통으로 넣을 수 있으니, 평상시 조금씩 끓여 먹을 때에는 하기 힘든 조리법이다. 한식 때에는 토란국 대신 무국을 끓이는데, 그때 무도 두부와 함께 통으로 넣어 삶아 나중에 썬다. 나는 어릴 적 물컹하고 맛은 맹탕인 삶은 무 건더기 때문에 무국을 싫어했었는데, 한식 때 끓이는, 무 건더기까지 고기 국물 맛이 밴 그 무국만은 아주 좋아했다. 이 역시 명절 때만 이렇게 끓였다.


마지막으로 파·마늘을 넣고 조선간장으로 간을 하니 국 맛이 살아났다. 그제야 추석이 된 것 같았다. 입에 짝 붙은 국물 맛에 아릿한 토란 냄새. 아, 몇 년 만에 먹는 제대로 된 추석 토란국인가.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나는 맛있어 죽겠는데, 시댁 어른들은 아무도 맛있다는 말씀을 안 하셨다. 그 달착지근한 국물이 느끼하셨는지 시아버님이 급기야 국에 고춧가루를 푸시는 걸 보고 내 실수를 깨달았다. 경상도 분들 입에는 입에 착 감기는 국물도 아릿한 토란 냄새도 안 맞았던 것이다. 그 다음해 추석부터는 다시 무국으로 되돌아왔다. 어쩌랴, 나는 며느리인 걸.


최근에는 서울 음식에 좀 익숙해진 시어머님이 가끔 토란국을 끓이시는데, 토란 냄새가 너무 강하다고 한 번 데쳐서 넣으신다. 이제 난 아무 말도 안 하지만 속으로는 ‘토란 냄새가 좋아서 먹는 건데, 데쳐 그 국물을 버리면 무슨 맛이람’ 하고 궁시렁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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