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이 땅에 쥐라기 공원 있었다
  • 대전·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2.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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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학자 이융남 박사의 ‘화석 찾아 삼천리’
공군에는 ‘폭발물 처리반’이라는 독특한 부대가 있다. 전국 각지에서 폭발물 신고가 들어오면 긴급 출동해 폭탄을 감별한 뒤 해체하거나 이송하는 것이 이 부대의 주요 임무이다. 그런데 지질학자인 이융남 박사(42·지질자원연구원)가 몇 년째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감별하고 판정하는 물체는 위험한 폭발물이 아니다. 폭탄처럼 딱딱하고 차갑지만 수많은 ‘옛날 이야기’를 담고 있는 화석이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화석 처리반’이라고나 할까.




1998년 초겨울. 안동대 지질학과 대학원생 서 아무개씨가 경북 의성군 봉양면 야산에서 이상한 돌덩이를 발견했다. 그리고 희고 긴 그 돌을 뼈 화석이라고 믿었다. 며칠 뒤 교수와 함께 다시 간 그는 주변 탐사를 통해 그 화석이 공룡 뼈라고 여겼다. 그러나 ‘공룡뼈’라고 발표할 수는 없었다. 동행한 사람 가운데 공룡 화석을 전공한 사람이 없어 확신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 화석을 공룡뼈라고 확인해준 사람은 다름아닌 이융남 박사였다. 그는 화석을 살핀 뒤 초식 공룡인 용각류(목이 길고 덩지가 큰 공룡들)의 뼈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그 공룡의 크기가 길이 15m 높이 3.5m쯤 된다고 추정했다.



5년 전에 그는 전혀 다른 판정을 내렸었다. 1973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공룡뼈 화석이 발견되었다. 연구자는 그 화석이 목이 긴 공룡의 오른쪽 팔 아래 뼈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단서로 그 뼈의 주인공이 길이 40m, 체중 120t인 초대형 공룡이라고 주장했다. 연구자는 아예 학명까지 붙였다. ‘울트라사우루스 탑리엔시스’라고. 아무도 그 주장에 토를 다는 사람이 없어 그 가정은 사실로 굳어갔다. 그런데 1997년 이박사가 ‘틀렸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그 화석이 ‘보통 크기의 목이 긴 공룡의 왼쪽 팔 위쪽 뼈’라고 단정한 뒤 “뼈가 불완전해 새로운 공룡으로 이름 붙일 어떤 특징도 없다”라고 덧붙였다. 확신에 찬 그의 주장은 지금까지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이처럼 그가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거의 모든 공룡뼈 진위 여부를 판정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국내 유일의 척추고생물학 박사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적 척추고생물학자인 루이스 제이콥스 박사(미국 댈러스 남부감리대학) 밑에서 공룡 화석을 공부했고, ‘공룡 화석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는 미국 텍사스 사막과 몽골 고비 사막 등지에서 수차례 공룡 화석을 발굴했다.



1996년 6월, 그가 국내에 돌아오기 전까지 한국에서 공룡 화석에 대한 본격 연구는 거의 없었다. 대다수 학자가 미(微)화석 연구에 매달린 탓이다. 그 바람에 한국의 공룡 화석 연구는 걸음마 수준이었다(미화석 연구도 일제시대 때 데이치 고바야시라는 인물이 해놓은 연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연구자들이 나무와 톱 없이 집을 짓는 기분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발견되는 공룡 화석과 기존 연구 보고서가 그만큼 부족하다는 말이다. 국내의 공룡 발자국 화석과 공룡알 화석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내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새가 공룡에서 진화했다는 세계적인 논쟁에 관한 연구는 언강생심이었다.





남해안·전북해안 일대 공룡 화석 제일 많아



그렇지만 역사는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던가. 한반도 공룡 시대의 비밀이 하나둘 풀리고 있다. 지난 8월 말. 이박사는 경남 남해에서 귀한 화석 몇 개를 발견했다. 육식 공룡의 이빨 화석과 종아리뼈 화석, 초식 공룡인 오리주둥이공룡(70~71쪽 공룡 그림)의 이빨 화석과 원시악어의 머리뼈 화석이 그것이다. 이번에 발견한 육식 공룡의 이빨 화석은 길이 9cm로 국내에서 발견된 것 가운데 가장 크다. 이박사는 이 뼈들을 근거로 “한반도에도 대형 육식 공룡이 살았고, 여러 지층에서 발견되는 조각류(뿔이 없는 공룡) 발자국의 주인공이 오리주둥이공룡임이 확실해졌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1억년 전 한반도 남부에 살면서 5천개 이상의 발자국을 남긴 공룡을 또 다른 초식 공룡인 이구아나돈으로 추정했었다.



그렇지만 아직 캄캄한 공룡 시대로 향하는 데 필요한 ‘횃불’은 턱없이 부족하다. 때문에 그는 틈만 나면 공룡 화석이 있을 법한 곳으로 출동한다. 무기는 단 하나, 현미경 같은 눈뿐이다. 그가 자주 가는 곳은 백악기(공룡이 생존한 중생대는 크게 백악기:1억4천5백만∼6천5백만 년 전, 쥐라기:2억8백만∼1억4천5백만 년 전, 트라이아스기:2억4천5백만∼2억8백만 년 전으로 나뉜다)의 퇴적암층이 가장 많이 드러나 있는 남해안 일대와 전북 해안 지역이다. 근래 그곳에서는 세계가 깜짝 놀랄 만큼 많은 생흔 화석(공룡의 발자국이나 알 등)이 발견되고 있다. 최근 그는 경남 남해-진주-대구-의성-영동 사이에 위치한 대규모 퇴적층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언제 그곳을 다 탐사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수억년 전 숨어버린 보물 찾기”



그는 화석 탐사의 매력을 보물찾기에 비유했다. “공룡 화석을 찾는 일은 누군가 숨겨 놓은 것을 찾는다는 점에서 보물찾기와 같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보물찾기는 선생님이 30분 전에 숨겨놓은 보물을 찾지만, 화석 찾기는 수억∼수천만 년 전에 숨어버린 공룡의 자취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공룡 화석을 발견한다고 해도 제대로 발굴해낼지 미지수이다. 고비 사막이나 황무지에서 발견되는 공룡 화석과 달리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화석 대부분은 암석에 고착되어 있어서 분리하기가 쉽지 않다. 그는 “우리나라 암석은 두드리면 땅땅 소리가 난다. 그만큼 딱딱해 화석을 복원하기가 어렵다”라고 말했다. 발견되는 화석도 깨끗한 편이 아니다. 화산 활동이 활발해 새카맣게 변한 화석이 많다. 시화호 간척지에서 발견되는 공룡알 화석이 검붉은 빛을 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10여년 전에 일본이 한 만큼만 노력한다면 안될 일도 없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일본의 후쿠이 현에서 2cm 크기의 공룡 발톱이 발견되었다. 연구자들은 이를 단서로 수십m나 되는 산을 들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공룡 두 마리의 화석을 찾아냈다. 일본 열도는 환호했고, 학자들은 두 공룡에게 후쿠이사우루스와 후쿠이랩터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발견은 2000년 세계 최대의 공룡 박물관 건설로 이어졌다.



요즘 그는 시화호 간척지에 자주 들른다. 이 곳의 공룡알 유적지가 매우 각별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가 시화호에 처음 간 것은 2년 전. 환경운동가 최정인씨와 해양연구소 정갑식 연구원이 그곳에서 감자같이 둥근 화석을 발견했다고 알려오자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놀라운 마음으로 그 화석이 공룡알임을 확인해 주고, 주변의 크고 작은 섬을 뒤져 공룡 알 화석 수십 개를 더 찾아냈다. 알은 모두 세 가지였는데, 껍질 두께가 1∼5mm에 지름이 5∼15cm나 되는 것들이었다. 그는 갈대밭으로 변한 4백86만평 규모의 시화호 간척지 밑에 어마어마한 보물이 숨어 있으리라 믿는다.



그의 꿈은 소박하다. 시화호 간척지에 공룡 박물관을 지어 고등학생들과 함께 그 주변을 발굴하는 일이다. 그는 “경제개발협력기구 가입 국가 가운데 자연사 박물관이 없는 나라는 우리뿐이다. 정말 부끄럽다”라고 말했다. 또 하나의 소망은 한반도에서 완전한 공룡 화석을 발굴한 뒤, 그 공룡에게 한국 고유의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다.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고, 사람이 이름을 남긴다면 나는 학명을 남기고 싶다”라고 그는 말했다. 벌써 이름도 지어놓았다. ‘코리아사우루스’라고. 물론 그는 이 꿈이 쉽게 이루어지리라 믿지 않는다. 그러나 기적은 알 수 없는 순간에 찾아오는 법. 요즘도 그는 그 기적을 찾아 1억∼2억 년 전 과거를 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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