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김경태, 눈물과 집념의 재기 드라마
  • 이용균 (<굿데이> 기자) ()
  • 승인 2004.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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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김경태 ‘눈물과 집념의 재기 드라마’방출·임의탈퇴 딛고 5년 만에 4연승 쾌투
프로 야구는 지금 지옥이다. 곪디 곪은 병역 비리 파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범위를 넓혀 가고 있다. 악취에 고개가 절로 돌아간다. 그 어느 해보다 치열하게 4위 싸움을 벌이는데도 야구장을 찾는 이들은 비참할 정도로 줄었다. 프로 야구에 감동은커녕 비겁한 술수만 난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서도 희망의 싹을 틔우는 이가 있다. 영화 주인공 감사용보다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주인공은 SK 김경태(29)이다.

김경태는 ‘이태백’이었다. 야구 선수라면 한창 나이인 20대에 두 번이나 잘렸다. LG도 버렸고 두산도 그를 버렸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지난 8월 중순, 마운드에 다시 선 김경태는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4연승 끝에 아쉬운 1패를 당하기는 했지만, 그의 성공은 어려운 시기에 그라운드에 울려퍼진 ‘희망가’다.

성남고 3학년이던 1993년, 김경태는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투수였다. 그는 성남고 마운드를 혼자 지키다시피 했다. 대통령배와 봉황기 모두 준우승. 두 대회에서 모두 우수투수상을 따냈다. 1년 동안 전국 대회에서만 무려 15승을 거두었다. 경희대에 진학해서도 언제나 마운드는 김경태가 지켰다.

그러나 강철도 무리하면 깨지기 마련. 왼쪽 어깨 충돌증후군이 발생했다.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서도 무리하는 바람에 3학년이던 1996년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대학 졸업반 때 LG에 2차 1지명으로 선발되었다. 계약금 2억원. 장밋빛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프로는 만만치 않았다. 1군 마운드에 오르기는 쉽지 않았다. ‘내가 김경태인데’ 하는 자신감은 자꾸만 줄어들었다. 2군 생활이 계속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에는 오른쪽 어깨를 다쳤다. 공을 던지는 왼쪽 어깨를 보호하기 위해 무거운 짐을 모두 오른쪽으로 메는 것은 물론 잠잘 때도 오른쪽 어깨를 깔고 잤던 것이 문제였다. 2000년 1년을 쉬었다. 2001년에는 겨우 4경기에 나가 1⅔이닝을 던진 것이 전부였다.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2001년 12월 아내 이은영씨에게 면사포를 씌워주었다. 함께 산 지 2년 만의 일. 그러나 2002년 1월 LG로부터 방출되었다. 아내를 볼 면목이 없었다. 비참했다.

2002년 여기저기 알아본 결과 두산이 김경태를 받아주었다. 열심히 하고 싶었지만 마운드에 오를 기회가 없었다. 간신히 선 1군 경기에서 무참하게 무너졌다. 한 번 실수를 회복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고민하던 김경태는 결국 2003년 7월 임의탈퇴 신청을 했다. 야구 인생에 ‘사표’를 낸 셈이다.

2003년 8월 김경태는 타이완으로 건너갔다. 보름 동안 팀을 따라다니며 죽을 고생을 했다. 타이완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 거의 밥을 먹지 못했다. 딱 한 차례 마운드에 올랐으나 텃세가 너무 심했다. 스트라이크 존이 손바닥만했다.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김경태는 ‘트레이너’가 되기로 결심했다. 공을 던지는 대신 후배들이 공을 더 잘 던지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야구 재활 전문 클리닉인 ‘한스클럽’에 취직했다. 낮에는 재활 훈련을 하는 투수들을 돌보고 밤이면 트레이너 시험을 위해 밤샘 공부를 계속했다.

부상으로 힘들어하고 고민하는 고교 선수들을 가까이 두고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쌓였다. 야구 선수 생활을 포기하는 후배들이 속속 생겨났다. 그러나 자기도 실패자였다. 뭐라고 해 줄 말이 없었다. 답은 하나였다. 보란 듯이 부활해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이었다.

2003년 10월 SK의 공개 테스트에 참가했다. 몸을 만들지 못했으니 구속이 나오지 않았다. 낙방이었다. 고민하고 있을 때 LG 선배 최향남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함께 운동하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

12월부터 지옥 훈련이었다. 1주일에 두세 번 아침에 남한산성 입구에서 만났다. 일반인들이 1시간 넘게 올라가는 길을 20분 만에 미친듯이 뛰어 올라갔다. 헬스클럽에 다니는 대신 쪼그려뛰기와 팔굽혀펴기로 근육을 만들었다.

캐치볼은 구리시 입구의 한강 둔치에서 했다. 영하 13℃의 추위에 2시간씩 캐치볼을 하고 나면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아이싱을 할 얼음을 구할 수 없어서 웃통을 벗고 ‘자연 아이싱’을 했다. 글러브가 찢어졌지만 어디 얘기할 곳도 없었다. 알음알음 후배들에게 전화를 걸어 글러브를 얻어 썼다. 정말 지옥 훈련이었다.

그러던 중 희소식이 들렸다. 사이버대학 야구부가 타이완 전지 훈련에 함께 해도 좋다고 알려온 것이었다. 선수들을 가르쳐주는 조건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훈련하던 둘은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전지 훈련에서 성실한 모습에 반한 사이버대학이 코치 제의를 했지만 뿌리쳤다.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프로 야구에서 성공해야 했다.

지난 4월 초 또다시 SK 테스트를 받았다. 최고 구속을 136㎞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두고보자는 답만 돌아왔다. 4월 중순 두산과의 연습 경기에서는 4이닝 동안 볼넷 1개만 내주는 호투를 했다. 그래도 입단 계약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SK 선수단 정원이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이번에는 하늘이 도왔다. SK의 이용수가 야구를 그만두는 바람에 빈자리가 생겼다. SK로부터 ‘내일부터 드림파크에 합류하라’는 전갈이 왔다. 유니폼을 챙겨주던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SK 최계훈 2군 투수코치 덕분에 야구에서 새 인생을 살게 되었다. 김경태는 5월까지만 해도 실전 투입이 가물가물했다. SK에 합류한 지 한 달째인 5월 말. 최코치가 투구폼을 간결하게 바꾸라고 주문해 시험 삼아 폼을 바꾸었다. 김경태는 머리 속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거짓말처럼 제구력이 엄청나게 좋아졌다.

다양한 구질과 제구력이 무기

6월1일 2군 경기에 처음 선발 출전한 김경태는 6이닝 무실점을 거두었다. 김경태는 “슬라이더만큼은 10개 던져 10개 모두를 원하는 곳에 던질 수 있다”라고 자신한다. 야구가 되니까 자신감이 생겼다. 슬라이더는 물론이고 ‘체인지업’에 ‘커터’까지 완벽한 종합 세트를 갖추었다. 타자와 6구까지 상대하더라도 같은 구질의 공을 던지는 법이 없다. 김경태 성공 신화의 준비를 마쳤다.

김경태는 8월14일 한화전에서 2-4로 뒤진 4회 1사 때 마운드에 올랐다. 3⅔이닝 동안 안타를 한 개도 내주지 않았다. 마운드에서 내려온 뒤에도 계속해서 기도를 드렸다. 팀 타선이 터져 결국 감격적인 승리. 통산 1승3패였던 투수가 1999년 이후 5년 만에 거둔 승리. 경기가 끝난 뒤 아내에게 전화했다. 우느라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던 아내가 “그동안 고생한 것 다 잊었다”라고 했다. 눈물이 흘렀다. 이후 내리 승리하며 김경태는 벌써 4승을 챙겼다.

지난해 얻은 아들 성민군은 9월12일이 첫돌이다. 김경태는 아내와 약속했다. 내년 5월5일 어린이날 반드시 마운드에 서 있겠다고. 그래서 야구장을 찾은 아들에게 아버지가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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