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 접속 도구라고?
  • 토론토·김상현 (자유 기고가) ()
  • 승인 2004.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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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미디어 역효과 의외로 심각…대화 단절로 커뮤니티 붕괴
2002년 11월 어느 날 밤, 쉰다섯 살인 은퇴 공무원 짐 설커스가 잠자리에서 사망했다. 그 뒤 20개월이 흐르는 동안 미국은 이라크를 침략했고, 가수 재닛 잭슨은 슈퍼볼 미식축구 경기 하프 타임 쇼에서 맨 젖가슴을 내보이는 희대의 스캔들을 연출했고, 캐나다에는 새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설커스의 죽음은 아테네올림픽이 막바지로 치달았던 2004년 8월25일까지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이웃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은 아파트 2층 창문을 뚫고 들어가 미라로 변한 설커스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의 아파트는, 냉장고의 음식이 다 썩고 벽에 걸린 달력이 2년이나 지난 점만 빼면 단정하고 말끔했다. 매니토바 주 경찰은 그의 사인을 자연사로 결론지었다. 그의 기괴한 죽음은 곧바로 인터넷에 화제로 떠올랐다. 미국 휴스턴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 이르기까지, 그의 죽음은 한동안 ‘세계의 별난 뉴스’로 활발히 떠돌았다.

죽었지만 온라인에선 살아 있었던 설커스

설커스는 매우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인 사람이었다. 가족과 사이가 틀어진 데다 이웃과도 거의 접촉하는 일이 없었다. 이웃은 그의 오랜 부재를 그저 긴 바캉스를 떠났거니 하고 여겼다. 더욱이 그는 죽은 뒤에도 몸이 썩지 않는 희귀한 신체적 특성 때문에 이웃에 아무런 악취를 풍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그토록 뒤늦게 알려진 더 큰 이유는 다름아닌 테크놀로지, 즉 ‘자동화한 뱅킹’ 때문이었다. 다발성경화증을 앓고 있던 그는 장애연금을 받고 있었지만, 연금이 그의 은행 계좌로 매달 자동 지급되었으므로 그는 딱히 은행원을 만날 일이 없었다. 아파트 관리비도 그의 계좌에서 자동 이체되었다. 각종 공과금 또한 그의 죽음과는 무관하게 변함없이 자동으로 납부되었다. 사정이 그러한데 누가 그의 죽음을 눈치 채겠는가.

설커스의 죽음은 으스스한 사실 하나를 선연히 일깨운다. 온라인 뱅킹과 같은 신기술이 직접적인 대인 접촉의 필요성을 현저히 줄임으로써, 개개인과 관련된 온갖 업무가 본인 없이도 자동으로 한동안, 어쩌면 영원히 처리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설커스는 그의 죽음 뒤에도 20개월 동안 테크놀로지를 통해 ‘가상으로’ 살아 있었던 셈이다”라고 미국 뉴욕 대학의 테렌스 모란 교수는 말한다.

모란 교수는 1971년 저명한 미디어 비평가 닐 포스트먼과 함께 ‘미디어 생태학’이라는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그는 “미디어를 우리 신체의 연장(延長)이라고 본 마셜 매클루언에 따른다면, 설커스의 삶은 그가 이용한 테크놀로지에 의해 2년 가까이 연장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상의 삶에는 커뮤니티가 결여되어 있었다”라고 지적했다.

기술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경계하는 목소리는 설커스의 기괴한 사태가 벌어지기 훨씬 전부터 산발적으로 터져나왔다. 미디어 비평가 마셜 매클루언을 비롯해 미국의 문화 학자인 루이스 멈포드,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엘륄 같은 이가 앞줄에 서 있다.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도 기술회의론은 만만치 않은 세력을 형성해 왔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 영화 <블레이드 러너>, <매트릭스> 3부작 등이 대표적이다.

닐 포스트먼은 현대인의 지나친 기술 의존을 ‘파우스트적 거래’라고 단정한다. “어떤 기술 혁명이든 일면적 효과만을 가진다고 보는 것은 오류이다. 모든 기술은 짐 또는 축복이 아니라, 짐이면서 동시에 축복이다.” 모란 교수는 “기술 혁명의 가장 중요한 파급 효과는 종종 미처 예상하지 못한 데서 나타난다”라고 말한다. 예컨대 자동차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안전이었다. 자동차가 대기 오염, 스모그, 교외로의 도시 확산 현상 등을 초래할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처음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그에 대한 접근권과 사생활 보호 문제였다. 온라인 대화방, 인스턴트 메신저, 인터넷 교제 서비스 등이 지금처럼 막대한 사회적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계는 대체로 인터넷을 비롯한 자동화 서비스가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적·사회적·심리적 효과를 낳는지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이들은 뉴미디어가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 커뮤니케이션과 생산성 그리고 정보에 대한 접근권을 높였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러한 신기술이 가족·친구·이웃 들과의 대면 접촉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신기술은 속성상 커뮤니티 붕괴를 초래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카네기 멜론 대학 로버트 크라우트 교수와 스탠퍼드 대학 노먼 나이 교수는 신기술의 사회적 파급 효과를 체계적으로 살폈다. 두 연구는 따로 진행되었으나 결론은 비슷했다. 잦은 인터넷 이용이 사회적 네트워크, 커뮤니티 참여도, 가족 간의 대화 등을 쇠퇴시키며 우울증·외로움 따위 감정을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나이 교수는 인터넷을 ‘결정적인 소외의 도구’라고 단정 짓는다. “인터넷은 자동차와 텔레비전이 초래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회적 소외, 커뮤니티 붕괴 등을 초래한다.”

특정 지역 대화방은 긍정적

최근의 한 연구에 따르면, 젊은 세대는 매일 평균 대여섯 시간씩 스크린 앞에 앉아 있다. 그것이 비디오 게임이든 웹 서핑이든, 혹은 음악 파일을 내려받는 것이든 이들은 전자 매체에 밀착되어 있다.

더욱이 10대의 20% 정도는 친구와의 제1 통신 수단으로 직접 접촉보다 인스턴트 메신저를 이용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전자 매체는 ‘연결(connected)’의 뜻을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몰아간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단절된 상황, 곧 혼자 익명으로 집에 처박혀 온라인에 접속하는 상황을 가리키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신기술이 사람들을 기술 부적응자로 몰아간다는 결론은 물론 섣부르다. 적어도 한동안은 그 순기능이 역기능보다 더 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의 키스 햄턴 교수는 특정한 지역에 사는 이들만을 위한 대화방을 만들었다. 그 결과는 매우 희망적이었다. 대화방 참여가 실제 그 지역 사람들의 직접 접촉과 활동을 더욱 높여주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설커스의 기괴한 죽음은, 이웃들에게 적지 않은 심리적 영향을 미친 것처럼 보인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글래디스 로우리는 “(설커스 사건 이후) 좀더 적극적이고 활발한 대면 접촉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나도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만약을 대비해 한 이웃과 이틀에 한 번씩 서로 안부 전화를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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