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파리까지 ‘다빈치’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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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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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지구촌을 열광시킨 베스트 셀러
2004년 세계는 과연 어떤 책을 탐독하며 한 해를 보냈을까. 나라마다 지역마다 문화적 토양이나 사회 분위기가 달라 좋아하는 베스트 셀러나 관심을 집중시킨 화제의 책도 제각각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댄 브라운이 쓴 <다빈치 코드>가 전세계적으로 2천만부 이상 팔리며 ‘월드 베스트 셀러’로 오른 것이다. 세계 독서계는 <다빈치 코드>로 수렴되는 ‘세계화’ 경향과, 저마다 개성 있는 문화 코드를 뽐내는 ‘지역화’ 경향이 각축했다. 세계 주요 지역 독서계의 풍향을 해외 필자들이 정리했다.

미국- <야간 추락>, 다빈치 아성 캐다

올해 미국 서점가 최대의 히트작은 지난해 3월 출간된 뒤 최근까지 7백50만 부가 팔린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전세계에서 날개 돋친듯 팔리고 있는 이 추리 소설은 미국에서 정평 있는 뉴욕 타임스 베스트 셀러 목록에 12월 첫째 주까지 무려 89주간 1위에 올랐을 정도로 대단했다. ABC 방송은 이 책을 각색해 특집극을 반영했을 정도다.

그런데 <다빈치 코드>가 추월당했다. 지난 12월12일 드디어 베스트 셀러 1위로 올라선 책은, 1996년 미국 롱아일랜드 상공에서 충돌 사고로 추락한 TWA800 사건을 다룬 <야간 추락(Night Fall)>. 이외에도 미치 앨봄이라는 작가가 쓴 <천국에서 만나는 5인>이라는 소설도 뉴욕 타임스 베스트 셀러에 지난주까지 연속 62주나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전직 대통령 빌 클린턴의 자서전 <나의 인생(My life)>은 올해 국제적으로는 떠들썩한 반향을 일으킨 책이지만, <다빈치 코드>나 <천국에서 만나는 5인>의 인기 앞에서는 숨을 죽여야 할 판이었다.
러시아-‘안티 크렘린’ 서적 불티

러시아의 서점가는 ‘안티 크렘린’ 기치를 내건 책들이 불티 나게 팔렸다. 그 중 옐레나 트레구보바의 <크렘린 디거의 작별>이라는 논픽션물이 단연 화제. 책 제목 가운데 ‘디거(digger)’는 ‘내밀한 사실을 파헤치는 사람’을 뜻하는 영어 단어에서 차용한 것이다.

에카체린부르그 태생으로 반골 기질이 풀풀 나는 기자 출신 작가 옐레나는 지난해 크렘린의 구석구석을 파헤친 <크렘린 디거의 짤막한 이야기>를 써서 일약 시선을 집중시켰다. 올해 펴낸 책은 그 후속편 격으로, 러시아 권부의 상징인 크렘린의 실책과 무모함을 주된 테마로 다루었다. 평론가들은 이 책이 권력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한 정치 회상록이라고 평하지만, 정작 본인은 ‘조국에 대한 순수한 사랑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

작품의 소제목 ‘또 다른 날(Die Another day)’이 재미있다. 독일어와 영어를 교묘하게 조합한 이 소제목은, 독일에서 국가보안국 요원으로 근무했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 미국과 협력하면서 절대 권력 체제를 구축한 푸틴 대통령을 연상케 한다.

지난 11월 초 작가는 ‘에호(메아리) 모스크바’ 방송과 회견했다. 이 자리에서 그녀는 ‘러시아는 파시즘과 나치즘의 요소가 다분한 전체주의 국가’라고 주장해 푸틴측에 직격탄을 날렸으며, 권력과 야합하는 러시아 어용 언론도 싸잡아 공격했다. 옐레나는 최근 솔제니친처럼 국외로 추방될 것이라는 풍문까지 나돌고 있다.
라틴아메리카-노벨상 작가 마르케스의 힘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위세가 대단하다. ‘90해를 살아온 내 한평생에 선물로 10대 처녀와 미친 듯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로 시작되는 그의 새 책 <나의 슬픈 창녀들의 회상>이 나왔기 때문이다.

마르케스는 1982년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 문학상을 거머쥐었으며, 현존하는 스페인어권 최고의 문장가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특징적인 대화체 서술 방식은 이번 소설에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콜롬비아 태생인 마르케스가 10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새 작품을 발표하자 남미 사람들은 가뭄에 단비 만난 듯 환호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벌써 100만부 이상 팔려나갔다.
일본-돌풍 일으킨 ‘정치 거물 일대기’

일본 독서계에서는 일본 사회의 거대한 차별의 벽을 넘어 정계의 거목으로 성장한 한 정치인 이야기와, 그 인물을 추적하는 데 4년을 쏟아부은 작가가 동시에 주목되었다. 우오즈미 아키라(魚住昭)가 쓴 <노나카 히로무(野中廣務), 차별과 권력>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일본 유수의 출판사인 고단샤가 올해 제정한 일본 최고의 논픽션상을 수상했다.

작품의 주인공 노나카 히로무는 자민당 간사장을 지냈으며, 지난해 9월 정계를 은퇴했다. 당시 자민당의 현역 정조회장은 ‘노나카와 같은 부락 출신자는 일본 총리가 될 수 없다’고 발언했다가 노나카로부터 면전에서 불 같은 항의를 받고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책 속의 주인공 노나카는 이른바 ‘부락 출신자’이다. 부락 출신자란 한국의 ‘백정’에 해당하는 전근대 사회의 천민 계급이다. 일본의 부락 출신자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수평사’를 결성하고 끊임없이 차별과 투쟁해왔지만 아직도 관행이 남아 있을 정도로 이들에 대한 차별 의식은 뿌리 깊다.

노나카는 그 차별을 딛고 정계 거물로 성장한 인물. 늘 정적을 두려움에 떨게 했지만,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는 언제나 따뜻한 시선을 보낸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 철폐 운동과도 인연이 있다. 노나카의 비범한 인생을 추적한 작가 우오즈미 아키라의 투지도 만만치 않다. 교도 통신사 출신으로 리크루트 사건을 파헤친 바 있는 그는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취재 과정 자체가 중세 이후 일본인의 마음의 어둠이 응축되었다고 할 수 있는 벽과 싸우는 격투 과정’이었다고 토로했다.
중국-삼국지에 빗대 쓴 경영 서적 인기

현재 중국 독서계는 경제·경영서가 인기를 끌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중국인들의 관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풍향계인 셈이다. 이 가운데 독특한 구성으로 올 한해 독서계를 뜨겁게 달군 책을 고른다면, 청쥔이(成君憶)가 쓴 <쉬에주싼궈(水煮三國)>이다.

‘쉬에주’는 음식을 물에 삶는 조리법인데, 지금 중국에서는 생선을 물과 기름에 삶은 쉬에쥐위(水煮魚)가 한창 유행이다. 저자는 바로 이 음식에서 책 제목을 착안했다. ‘싼궈’는 중국의 고전 <삼국지>의 바로 그 ‘삼국’. 책 제목을 풀자면, 한마디로 ‘삼국을 함께 푹 끓여낸 탕’쯤 된다.

저자는 현재 경쟁 시장에서 세 가지 유형의 회사를 삼국에 빗대어, 나름의 전략과 경영 방식을 풀이하고 있다. 첫 번째는 실력 있고 자금력 풍부한 대기업. 두 번째는 개성과 특성으로 시장 일부분을 점유하며 확장 기회를 엿보는 중소기업. 마지막으로 자금과 경험이 없으면서도 발 빠르게 성장하는 신흥 기업.

고전 문학과 현대 사회의 시대 상황을 절묘하게 결합해 ‘전통 관리학’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이 책 제목은, 지난 여름 중국 주요 매체가 선정한 인문 분야 ‘10대 유행어’로 꼽힐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프랑스- ‘다빈치 코드’ 여행 상품 등장

프랑스 파리 6구 생-쉴피스 성당은 음습한 분위기 때문에 몸이 오싹해지는 교회다. 이 성당에 내걸린 들라크루아 그림의 신비를 둘러싸고 몇 년 전 장 필립 카우프만이 한권의 탐정 소설을 히트시킨 바 있다. 최근 이 신비의 장소에 또 한번 관광객 발길이 밀려들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2천만 부가 팔려나간 <다빈치 코드> 때문이다. 이 작품의 주요 무대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시작해, 생-라자르역, 볼로뉴 숲, 생-쉴피스 성당 등으로 이어진다. 책이 히트를 치면서 ‘다빈치 코드 투어’라는 여행 상품까지 덩달아 등장해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다빈치 코드>는 프랑스에서만 지금까지 50만 부 이상 나갔다. 공쿠르·르노도 등 각종 문학상 수상작이 발표되던 지난 11월 잠시 1위 자리를 빼앗겼다가, 크리스마스 대목을 타고 다시 1위 자리를 탈환했다.

‘다빈치 현상’ 앞에서는 반노동·반기업 주의를 선전선동했던 <봉주르 파레스> (게으름아 안녕) 열풍도, 2004년 공쿠르상 수상작 로랑 고데의 <스코르타의 태양>의 권위도, ‘꼬마 니콜라’ 탄생 50주년을 맞아 르네 고시니와 장-자크 상페가 만든 <꼬마 니콜라> 종합판의 추억도 맥을 추지 못했다. 르노도상 수상작 <쉬트 프랑세즈>는 베스트 셀러에 오른 것 외에, 관행을 깨고 이미 고인이 된 작가(이렌 네미로프스키, 1940년 아우슈비츠에서 사망)에게 상이 주어진 사실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쭦


박성준 기자/정주영(베이징)/안해룡(도쿄)/류재화(스트라스부르)/정다원(모스크바)/손정수(부에노스아이레스)/변창섭(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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