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신 마비 환자 걷게 만들다
  • 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4.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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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의료팀, 윤리 문제 해결 가능한 ‘배아 줄기세포 활용법’으로 치료
황미순씨(37·전남 광주시)에게 줄기세포는 신앙과도 같았다. 19년 전 7월30일 밤, 그녀는 치한들을 피해 달아나다가 5층 높이 다리에서 추락했다. 새벽녘 방범대원에게 구조된 그녀를 기다린 것은 안타깝게도 10~12번 흉추 골절이었다. 후유증은 끔찍했다. 하반신 마비. 욕창과 방광염으로 수시로 병원을 들락거려야 했고, 사회 생활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4년 전, 그녀는 우연히 알게 된 줄기세포에 빨려들었다. ‘스토커’가 되어 관련 자료나 연구자를 찾아 헤매기 시작한 것이다. 끈질긴 노력 덕에 기회가 찾아온 것은 지난 가을이었다. 서울탯줄은행을 운영하는 (주)히스토스템 대표 한 훈 박사가 탯줄혈액 줄기세포를 이용해 그녀를 치료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지난 9월 말 조선대병원에 입원해 검사를 받은 뒤, 10월12일 수술이 진행되었다. 수술은 줄기세포를 신경이 마비된 10~11번 흉추 사이에 투입하는 것이었다.

탯줄혈액에서 분리한 줄기세포로 임상 실험을 해서 ‘척추 환자’를 일으켜 세운 사례가 없어서 그녀는 성공을 보장받지 못했다. 때문에 그녀는 1, 2년 뒤에 발가락이라도 움직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런데 수술하고 사흘 뒤 기적처럼 몸에 변화가 찾아왔다. 꼬집어도 전혀 감각이 없던 부위에서 감각을 느낀 것이다. 1주일 뒤에는 배꼽에서 발가락까지의 감각이 살아났다.

이후 그녀의 몸은 빠르게 회복했다. 엉덩이를 들어올린 날에는 어찌나 반갑던지 소리쳐서 의사들을 불러 자랑까지 했다. 요즘 그녀는 보조기를 잡고 걸음을 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었다. 그녀는 머지않아 스스로 걷게 되리라고 확신하며, 지난 한 달 동안 그녀를 찾아온 100여 명의 척추 장애인들을 떠올렸다. “그들 대부분이 울고 갔다. 자신도 걷게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한 것이다. 그들에게도 빨리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박세필 박사(마리아생명공학연구소)와 왕규창 교수(서울대 의대) 연구 팀도 최근 줄기세포의 무한 능력을 확인했다. 세계 최초로 인간의 배아에서 분리한 줄기세포를 이용해 척수 신경관이 손상된 닭을 치료한 것이다. 연구진은 우선 유정란을 사흘간 부화기에 넣고 부화 사흘째인 달걀(이 시기에 배자-사람의 태아에 해당-의 길이는 1cm 정도이고, 신경관 주위에 30여 개의 체절이 나타남)의 체절 가운데 6개에 해당하는 길이만큼 (일부러 개방하는 방식으로) 신경관 결손을 유도했다. 이 상태로 그냥 놔두면 부화해도 병아리는 정상 생활을 하기 어렵다.
손상된 척수 신경관 깨끗이 치료

연구진은 바로 그같은 척수수막류(신생아 1천 명당 1명꼴로 발생함)를 치료하기 위해 손상된 부분에 줄기세포를 이식했다. 그 결과 줄기세포가 접착제 역할을 하며 감쪽같이 질환을 치료했다. 박세필 박사는 줄기세포의 어떤 물질이 그런 작용을 하는지 밝혀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사람의 배아 줄기세포로 척수 신경관 손상을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라고 말했다.

줄기세포가 가진 ‘무한 능력’을 생각하면 황미순씨와 박세필 박사가 경험한 ‘기적’은 시작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가장 높은 산은 줄기세포의 원천이 될 인간의 배아(난자와 정자가 결합해 생성된 수정란)를 생명으로 보느냐, 마느냐 하는 논란이다. 배아 줄기세포 개발을 옹호하는 과학자들은 척추가 되는 원시선이 나타나는 14일 전까지는 생명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대쪽에 선 종교계나 시민·사회 단체의 목소리는 다르다. 어떻게 원시선이 생명과 생명이 아닌 경계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원시선 출현이 배아마다 조금씩 다른데 어떻게 14일을 생명의 기준선으로 삼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배아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생명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 것일까. 어쩌면 황미순씨가 도움을 받은 탯줄혈액 줄기세포와 박세필 박사가 이용한 잉여 냉동 배아 줄기세포가 대안이 될지 모른다.

(주)히스토스템 대표 한 훈 박사에 따르면, 배아와 성체의 중간에 위치하는 탯줄혈액에는 줄기세포가 존재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탯줄혈액 줄기세포는 뼈·연골·지방·신경·근육세포 등으로 분화가 가능하다(반면 배아 줄기세포는 피부·근육·신경·혈액 등 거의 모든 조직으로 분화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탯줄혈액 줄기세포는 추출하기가 쉽지 않다. 한박사는 “우리가 세계 최고의 기술을 지니고 있다”라고 말했다.

탯줄혈액 줄기세포 활용처 ‘무궁무진’

한박사는 탯줄혈액 줄기세포로 치료할 수 있는 질환으로 간경화증·대머리·무혈성골괴사증·척수 손상·버거씨병 등을 꼽았다. 그리고 치료 가능성이 있는 질환으로는 알츠하이머·근이영양증·당뇨병·심장병·뇌졸중·파킨슨병·악성 림프종 등을 들었다. 현재 (주)히스토스템은 산모들이 공여한 탯줄혈액 50만 개 정도를 보관하고 있다. 한박사는 그 가운데 몇 개를 이용해 뇌졸중 치료를 임상실험하고 있는데, 효과가 기대 이상이라고 말했다. 탯줄혈액 줄기세포의 또 다른 장점은, 줄기세포를 다량으로 확보해 환자가 자신에게 맞는 세포를 찾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거부 반응이 일어날 확률이 적음을 뜻한다.

잉여 냉동 배아를 이용한 줄기세포 역시 긍정적으로 인식된다. 잉여 냉동 배아 줄기세포란 인공 수정용으로 만든 여분의 배아(인공수정 방법을 이용한 시험관 아기의 성공률이 약 25%밖에 안되기 때문에 과배란을 통해 난자를 10여 개 추출한다)를 냉동 저장했다가, 4~5년 뒤에 폐기하지 않고 산모의 동의를 받은 뒤 줄기세포로 만든 것을 말한다. 박세필 박사는 폐기 처분될 잉여 냉동 배아 줄기세포는 윤리적인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는 데다, 배아 복제를 통해 만들어낸 줄기세포와 동일하게 분화하기 때문에 치료 방법을 정립하기 위한 연구에 유리하다고 말했다(그러나 일부에서는 여전히 배아 자체를 생명으로 보기 때문에 이 방법 역시 반대한다).

최근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줄기세포와 관련해 매우 의미 있는 보도를 했다. 인간 배아를 복제하거나 파괴하지 않고 줄기세포를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기술이 미국에서 개발되었다는 것. 하나는, 불임 치료를 위해 냉동 저장했던 배아를 해동하는 과정에서 죽게 되는(많게는 최대 60%까지 죽음) 배아를 줄기세포를 만드는 데 활용하는 방식. 다른 하나는 체세포 핵을 이식하는 과정에서 유전자를 건드려 개체 발생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복제 배아로부터 줄기세포를 만드는 방식이다. 두 가지 방법 모두 생명윤리 문제를 최소화하자는 뜻에서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

박세필 박사는 “첫 번째 방식은 그 사실을 찾아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두 번째 방식은 이론적으로는 대단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성공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황우석 교수(서울대·수의학과)는 “새로운 방식이 아니다”라며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의 발언은, 두 가지 기술이 개발되는 것과 상관없이 배아 복제를 통한 줄기세포 연구를 계속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많은 사람이 줄기세포가 곧 사람의 생명을 구해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아직 줄기세포로부터 특정 세포로 분화하는 메커니즘을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다. 연구가 진행되면 될수록 황미순씨처럼 기적을 경험하는 사람은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생명 윤리 논란도 거세게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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