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3대 화두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4.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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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 -한반도
2005년은 한민족에게 여러 모로 뜻 깊은 한 해가 될 것 같다. 치욕적인 을사조약을 체결한 지 100년, 8·15 광복 60주년, 한·일 수교 40주년, 그리고 6·15 남북 정상회담 5주년까지 새삼 기억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이 가운데서도 광복 60주년과 남북 정상회담 5주년의 의미를 최대한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반도의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두 사건의 정신을 되살려 한민족이 새롭게 도약하는 한 해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특히 집권 3년차를 맞이한 노대통령 처지에서는 이제는 뭔가 ‘성과’를 내고 싶다는 욕심을 가질 법하다. 지난 2년 간은 과거를 정리하고 국정 운영의 ‘로드맵’을 마련하는 데 진력했고, 2005년을 지나 집권 4년차로 접어들면 아무래도 후계 구도에 더 관심이 쏠리는 레임 덕 현상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2005년에 총선·지방 선거 같은 대규모 선거가 없다는 점도 노대통령이 최대한 정쟁을 피해 ‘정책적 결실’을 맺을 수 있는 호기로 꼽힌다.

‘국민통합’ ‘다이내믹 코리아’를 기치로 내건 노대통령이 2005년에 치중할 3대 화두는 분권형 국정 운영과 경제 활성화, 북핵 문제 해결이다. 2004년 시험 가동에 성공한 대통령과 총리의 역할 분담을 가속화해 노대통령이 장기적 국가 과제에 치중하고, 이를 토대로 대통령이 경제 분위기를 바꾸어내고 북핵 문제 돌파구를 마련할 경우 2005년은 국운 융성의 대전환기가 되리라는 것이다. 매일 오전 8시, 청와대에서는 비서실장이 주재하고 수석비서관들이 참석하는 ‘일일 현안 점검회의’가 열린다. ‘공인중개사 시험 파문’이나 ‘공무원 파업’과 같은 그날그날의 쟁점 현안들이 안건으로 오른다. 회의 자료 맨 마지막에는 ‘조치 계획’이라는 항목이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조치 계획에 ‘총리실 이관’이라는 내용이 부쩍 늘었다.

총리실에 청와대 일 다 빼앗겼다?

한 참석자는 “예전에는 각 수석실이 처리하도록 하는 안건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은 하루에 최소 10건 정도가 총리실로 이관된다”라고 말했다. 한 달에 얼추 2백 건에 이르는 현안 처리 업무가 청와대에서 총리실로 넘어가는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들에 따르면 처음에는 ‘이러다 청와대 일 다 빼앗기는 것 아닌가’라는 심리적 공황이 심했다. 일 욕심 많기로 소문 난 노무현 대통령 역시 총리실로 넘겨준 일이 제대로 진행되는지 궁금해 하며 조바심을 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180° 달라졌다. 노대통령은 2004년 9월 이후 나흘에 하루꼴로 해외 순방에 나섰지만 더 이상 국내 문제로 전전긍긍하지 않는 눈치다. 12월14일, 국무회의에 참석한 노대통령은 “해외 순방하는 동안에 국내 일은 거의 잊고 있었다. 오늘 국무회의에 참석한 것도 오랫동안 (각료들) 얼굴을 못 봐서 인사하러 온 것이니, 평소처럼 총리가 회의를 주재하시라”며 한껏 여유를 보였다.

2004년 8월10일, 여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으로 ‘국정 분권’에 관한 구상을 밝혔을 때만 해도 세간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권력은 결코 나눠지지 않는다’는 것이 정치권의 정설로 굳어진 만큼 이번에도 구두선으로 끝나지 않겠느냐는 회의적인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말로, 행동으로 이를 밀고 나갔다. 8월10일 국무회의에서 노대통령은 “앞으로 일상적 국정 운영은 총리가 총괄토록 하고, 대통령은 장기적 국가 전략 과제와 주요 혁신 과제에 집중하겠다”라고 선언한 뒤 틈날 때마다 국정 분권을 강조했다. 시스템도 점차 그런 쪽으로 바꾸었다. 당장 국무회의 사회권을 총리에게 넘겼다. 노대통령은 지난 1년간 국무회의에 총 34회 참석했는데, 9월까지 매달 4~5회 참석하던 것이 9월 이후부터는 한 달에 1~2회로 줄었다. 정무수석을 없애고, 대통령 비서실장과 정무수석이 담당하던 대국회 업무도 총리실로 넘겼다. 대통령 비서실과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대통령 보고 내용을 총리에게도 똑같이 보고하도록 했다.

덕분에 이해찬 총리의 업무가 부쩍 늘었다. 이총리는 매주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것은 물론, 필요할 때마다 부총리·책임장관 회의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회의를 소집해 당면 과제를 조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총리실은 정책상황실을 새로 만들어 정책 의제에 대한 관리 기능을 강화했으며, 국정감사 기간에는 ‘상황실’도 따로 운영했다.

역할 분담이 명확해지는 만큼 총리가 민감한 결정을 내리는 일도 많아졌다. 청와대가 끙끙 앓던 방사능폐기물처분장(방폐장) 문제만 해도 고준위 방폐장은 시간을 두고 검토하는 대신, 저준위 방폐장은 내년부터 시행하는 쪽으로 총리 주재 회의에서 결론 내렸다. 공무원 노조 처리 문제는 이총리가 행정자치부·법무부·노동부 장관과 현안 조정회의를 거쳐 ‘원칙 처리’로 방향을 잡았고, 그렇게 집행했다. 청와대가 개입해 중재안을 만들고 이 때문에 모든 노조가 사용자 대신 청와대만 상대하려고 했던 악순환의 사슬을 끊어낸 것이다.
총리실의 한 관계자는 “종합부동산세 시행 시기를 놓고 이헌재 경제 부총리와 이정우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이 맞붙었을 때도 언론에서는 대통령이 순방에서 돌아온 후에야 정리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총리 주재 회의에서 그 전에 결론이 났듯이 이제 일상 업무는 명실상부하게 총리 책임 아래 진행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이 추구하는 국정 분권의 의미는 ‘대통령은 당과 멀어질수록 좋고, 총리와 당은 가급적 한몸이 되라’는 것이다. 노대통령은 공·사석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곤 했다. “과거 제왕적 대통령 체제에서는 대통령이 정당까지 지배하면서 많은 혼란이 있었고, 이 때문에 지금도 대통령을 무소불위의 권능을 가지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국민은 분권을 원하고 그게 옳은 길이므로, 대통령은 정쟁에서 한 발짝 떨어져 크고 굵직한 문제를 걱정하고, 일상적 국정 운영은 내각이 당과 혼연일체가 되어 책임 정치를 구현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이해찬이기에 마음 놓고 권력 나눈다”

사실 국정 분권은 노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입버릇처럼 강조하던 ‘신념’이다. 그런데도 집권 1년 반이 지나서야 분권 운영을 본격화한 데는 두 가지 변수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4·15 총선에서 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해 실질적인 책임 정치가 가능해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찬’이라는 분권 운영의 적임자를 총리로 기용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해찬 카드’는 노대통령이 마음 놓고 국정 분권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총리는 일단 업무 장악력과 문제 해결 능력에서 검증된 인물이다. 현 내각에서 이총리가 가장 어리지만, 아무도 이를 문제 삼지 않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이총리의 ‘일 중심’ 사고방식은 노대통령이 그를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좋은 예가 있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는 이해찬 의원에게 선대위 기획본부장 직을 제의하며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4선 의원인 그에게 선대위원장 직을 맡겨도 모자랄 판에 재선 의원들과 동급의 직책을 맡기는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찬 의원은 흔쾌히 수락했다. ‘일이 중요하지 자리가 뭐 중요하느냐’는 것이었다. 이 일은 노대통령이 이총리를 다시 한번 신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해찬 총리가 누구보다 노대통령의 스타일을 잘 안다는 점도 분권 운영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2002년 12월18일, 정몽준 의원이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고 폭탄 선언을 한 ‘역사적인 날’ 밤의 일이다. 당시 정의원을 달래러 가야 한다고 설득하는 민주당 의원들을 앞에 두고 노무현 후보는 ‘안 가겠다’며 버텼다. 그러자 이해찬 기획본부장이 후보에게다 대고 “저런 성질머리로는 대통령이 돼도 문제다”라고 쏘아붙였다. 당시 이 발언을 한 배경을 놓고 이총리의 한 측근은 “그렇게 자극해야만 노대통령이 움직이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해찬 총리는 13대 국회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노대통령이 자기 성격과 너무 닮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일부러 자극했다는 것이다. 그 전략이 먹혔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아무튼 노후보는 그날 밤 정몽준 의원 집을 찾았는데, 그 ‘처량한’ 장면이 득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총리실 주변에서는 이해찬 총리가 조선·동아 일보와 한나라당을 겨냥해 ‘베를린 발언’을 한 것이나, 국회에 나가 ‘한나라당은 차떼기당’이라며 각을 세우는 것도 철저하게 계산된 역할 분담으로 본다. 문제가 있는데도 가만히 있으면 결국 대통령이 직접 나서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총리가 먼저 나서 총대를 멨다는 것이다.
이총리의 한 측근은 “‘조·동이 내 손안에 있다’고까지 한 것이 상식적으로 그냥 한 소리겠는가. 그렇게 강하게 나가야 기삿거리가 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한 참모는 “당내 대권 주자들을 고려한 측면도 있다. 대권 주자들은 그렇게까지 얘기하기 힘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총리가 그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정책 결정은 물론이고, 총리가 정쟁의 한복판에 나가 ‘악역’까지도 대신하는 노무현-이해찬 콤비 플레이는 일단 성과를 내고 있다. 12월 들어 실시하는 각종 공식·비공식 여론조사에서 노대통령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상승세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12월22일 여론조사 전문 기관인 미디어리서치가 실시한 여론조사만 해도 노대통령 지지도가 38%를 기록해 두 달 만에 10% 포인트가 상승했다.

미디어리서치는 매달 마지막 수요일에 정기 여론조사를 하는데, 10월 말에는 대통령 지지도가 28%, 11월 말에는 32%였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노대통령이 정쟁에서 한 발짝 비켜나 북핵 문제 해결과 경제 외교를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고, 자이툰 부대를 방문해 우리 장병들을 격려하는 등 ‘대통령다움’이 부각되면서 지지율이 오르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국정 분권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5개월 간의 분권 실험은 성공작”

지난 5개월 간의 분권 실험이 성공작이라고 자평하는 여권에서는 2005년을 명실상부한 국정 분권의 원년으로 만들겠다며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12월24일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경제정책수석으로 바꾸는 등 청와대 기능을 일부 조정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정책기획수석실이 담당하던 나머지 현안 점검 기능까지 총리실로 다 넘기고 청와대 정책실에서는 ‘경제 정책’과 ‘사회 정책’을 동등한 무게로 다루겠다는 것이다.

정책기획수석이 경제정책수석으로 바뀐다고 하자 일각에서는 경제수석이 경제 부총리를 비롯한 경제 부처의 옥상옥 노릇을 하려는 것 아니냐는 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이는 분권 운용의 기조를 잘 이해하지 못한 오해라고 청와대측은 설명한다. 총리와 경제 부총리를 중심으로 한 내각은 한마디로 ‘경기’를 챙기는 역할을 하고, 대통령과 경제정책수석은 우리가 먹고살 차세대 성장 동력을 발굴해내는 문제, 경제 개혁과 개방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는 문제, 자유무역협정(FTA) 등 통상 외교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같은 거시 경제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이 말대로라면 경제 부총리와 경제정책수석이 부딪칠 대목은 극히 제한된다.

이처럼 노대통령은 앞으로 경제 살리기·국민 통합·투명사회 건설·한반도 평화 정착 같은 전략 과제에 전념하고,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국정 업무는 총리에게 더욱 더 나누어줄 작정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참여정부의 분권 실험이 정착되는 2007년에는 이를 제도화하기 위한 ‘개헌’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 당선 직후, 2004년 중·대 선거구제 도입-다수당에 총리지명권 이양-책임총리제 실시-2007년 개헌 공론화라는 ‘정치 개혁 시간표’를 제시했던 노대통령은 12월27일자 경향신문과의 회견에서도 “지금은 개헌 얘기를 꺼낼 때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는 분권과 통합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미래의 지도 체제가 아닌가 싶다”라는 말로 의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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