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빨리, 더 멀리’ 21세기 철도 혁명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5.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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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가 곧 국력이다. 20세기 초반 근대화와 제국주의를 이끌었던 기차가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상대적으로 오염 배출이 적고 효율성이 높다는 이점 덕분이다.
과거로부터 미래로의 가속’. 지난해 9월 파이낸셜 타임스가 유럽 철도산업의 현황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철도산업의 가능성에 붙인 말이다. 철도산업의 본질을 꿰뚫는 표현은 일찍이 20세기 초반 일본 외교관 이노우에 유이치로부터 나왔다. “열차는 국가 권력을 싣고 달린다.”

철도는 근대와 제국주의를 이끈 ‘기관차’ 노릇을 했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자동차와 항공기에 그 자리를 내주며 교통 수단의 서자 취급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세계는 21세기로 진입하면서 다시 철도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수백km의 철길을 시속 2백km 이상 고속으로 달리는 국가 전략 사업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에서부터, 인구 수십만 명의 지방 도시를 순환하는 도시형 경량 열차에 이르기까지 철도가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20세기 초반 대륙횡단 철도를 완성해 철도 강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1세기가 지난 오늘날, 고속철도를 앞세워 옛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64쪽 상자 기사 참조). 중국은 ‘서부 대개발’이라는 21세기의 꿈을 칭장 철도 건설에 걸었다. 동부 연안의 칭하이와 내륙의 티베트 라사를 연결하는 이 철도는 총연장 2천km가 넘는다(67쪽 상자 기사 참조). 일본과 함께 고속철 분야에서 가장 앞선 기술을 자랑하는 프랑스는 최근 ‘이데 테제베’를 앞세워 저가 경쟁에 불을 지피며, 자동차와 항공기에게 빼앗긴 실지를 회복하겠다고 선언했다(66쪽 딸린 기사 참조).

그뿐 아니다. 타이완·오스트레일리아·네덜란드·독일 등이 저마다 철도의 가치에 새삼 눈뜨고 있다. 이 움직임의 한켠에 동북아 중심 국가로 등장하려는 한국이 자리 잡고 있다. 남과 북의 철길을 연결하고 이를 시베리아와 만주에 접속하려는 계획은 ‘통일 시대’를 열기 위한 국가 과제일 뿐 아니라, 세계 패권의 중원 무대인 유라시아 지역 전체의 중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시베리아 가로질러 유럽 끝까지 간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아직 꿈만 원대해 보인다. 당장 철도 서비스가 부실한 탓에 다른 대체 교통 수단을 쓰느라 길바닥에 쏟아붓는 돈이 해마다 3조원대에 이른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 김경철 박사는 “이같은 불합리한 현실을 개선하는 문제조차 국민적 합의를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베리아 벌판을 가로질러 유럽의 끝으로 간다는 계획은 걸음마를 생략한 채 날아오르기를 서두르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왜 다시 철도 혁명인가. 국제적인 철도 전문 싱크탱크인 레일포럼이 영국의 예를 들며 펼치는 철도 예찬을 들어보자. (영국의 경우) 자동차 2천4백만대와 화물 차량 42만5천대가 디젤이다. 철도 부문의 디젤형 열차는 4천4백대다. 그러나 2003~2004년 디젤형 열차는 연인원 10억명과 8천9백만t에 이르는 화물을 실어 날랐다.

레일포럼의 철도 예찬은 계속된다. 디젤 열차 부문의 승객 1인당 이산화탄소 평균 배출량(km 기준)은 자동차의 45% 수준, 단거리 항공기의 27%에 불과하다. 화물 수송 면에서도 디젤 열차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대형 수송 차량의 8%이다. 기차는 똑같은 연료 조건을 놓고 비교해볼 때 자동차와 항공기 부문에 비해 오염 물질을 훨씬 더 적게 배출하면서도 효율성은 월등히 높은 환경친화적인 교통 수단이다.친환경 시스템으로 새 전성시대 열어

레일포럼의 이같은 주장은 자화자찬이 아니다. 철도에 대한 관심은 크게 두 방면의 객관적 현실이 변화한 데에서 불이 붙었다. 첫째, 화석 연료 고갈이 점쳐지고 기름값이 뛰면서 화석 연료를 쓰지 않는 철도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둘째, 화석 연료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으로 온실 가스 배출 문제와 그로 인한 지구 온난화가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유럽은 이같은 사실을 가장 먼저 받아들임으로써 ‘제2차 철도 혁명’의 진원지가 되었다. 유럽연합은 일찍이 유럽 통합을 촉진하기 위한 선결 과제로 교통 통합을 서둘렀고, 철도가 그중에서도 노른자가 되었다. 1990년대 중반 유럽위원회는 유럽 교통산업 진흥책 및 인프라 구축에 관한 방대한 백서를 작성했다. 이때 대기 오염을 줄이는 친환경 시스템으로서 철도의 가치가 새삼 인식되면서 제2차 철도 혁명에 시동을 건 것이다.

유럽 각국은 현재 다방면에서 철도 부활을 준비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동차나 항공기 못지 않은 속도를 확보하는 목표에 집중하고 있다. 저마다 제각각인 신호 체계와 전압을 통일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2010년 안으로 고속철도의 총연장을 현재의 두배인 7천km로 늘리려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이 철도가 건설되면 유럽의 한쪽 끝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다른 쪽 끝인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고속철로 달릴 수 있다.

유럽의 변신에는 토대가 있다. 유럽이 철도 부활에 다시 눈뜬 것은 1980년대였다. 특히 프랑스는 1960년대부터 한 차원 높아진 철도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1981년 처음 등장한 테제베였다. 이 고속철은 한국과 미국에 수출해 프랑스 경제에 효자로 떠올랐다. 독일도 뒤질세라 고속철 개발에 달려들어, 1986년 만하임-그라벤 노이도르프 노선 고속철을 완공함으로써 꿈을 실현했다.

일본 또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저력과 실적이 있다. 철도기술연구원 이용상 박사에 따르면, 일본은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치닫던 1940년대에 기존 열차와는 차원이 다른 ‘탄환 열차 계획’을 세웠다. 그것이 바로 항공기와의 경쟁까지 고려한 고속철 신칸센이다. 일본 도쿄와 오사카를 오가는 ‘도카이도 신칸센’은 1964년 개통되었다.

최근 일본은 새로운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기존 신칸센 5개 노선 외에 3개 노선 7개 구간(512km)을 추가로 건설하고, 재래선도 고속화해 모든 철도를 고속화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은 다가오는 ‘초고령 사회’에 대한 대응책까지 고려했다. 교토의정서 상 온실 가스 저감 의무 이행하기 위한 대안이기도 하다. 현재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는 일본의 에너지 효율성은 당장 일본의 철도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세계화 시대 맞으며 철도 중요성 커져

세계 각국이 저마다 철도 부활에 경쟁적으로 참여하는 이유는 환경이나 경제적 효율성말고 또 있다. 철도산업은 전략 산업이다. 철도사에 정통한 정재정 교수(서울시립대)가 펴낸 <일제 침략과 한국 철도>에 따르면, 19세기 말~20세기 초 일본이 한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가장 먼저 서두른 것은 철도 부설권과 운영권 강탈이었다. 이후 경의선·경부선 발달사는 말 그대로 일제의 한민족 수탈사였다.

한반도를 삼킨 뒤 만주 경영에 나섰을 때에도 일제는 물자를 수탈하고 군 병력을 신속하게 이동시키기 위해 철도 회사부터 세웠다. 이른바 ‘만철’로 통하는 남만주철도회사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일본 최고 엘리트들의 집합소였던 만철은 일본 제국주의의 한 상징이었다. 심지어 일본은 1940년대에 한·일 해저 터널을 뚫어 철도를 연결할 계획을 세웠다가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포기했다.

제국주의 시대가 지나가고 세계화 시대가 도래한 오늘날에도 철도의 중요성은 변하지 않고 있다.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지면서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다. 이는 안정성·에너지 효율성·국가 전략 차원 외에 철도의 또 다른 강점인 뛰어난 수송 효율과 무관치 않다. 철도는 수송 수단의 효율성 면에서 도로보다 최소 4배에서 최대 8배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전문가들은 철도가 단위 시간 및 토지 단위 면적당 수송 능력에서 도로를 압도한다고 지적한다.

남북한 철도를 잇고, 이를 다시 시베리아횡단철도나 중국횡단철도와 연결하는 사업은 중대한 국가 발전 과제이다. 전문가들은 ‘북한 선로를 이용해 중국에 물자를 수출하는 시대’가 당장 5년 안에 닥칠 수 있다고 본다. 남북 철길을 잇는 사업은 남북 화해와 교류를 위한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21세기 통일과 공동 번영의 속도를 앞당기는 실질적인 수단이다.

전문가들은 통일과 공동 번영·지속 발전이라는 21세기 비전을 공염불로 만들지 않기 위해 당장 철도 부흥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현실은 개탄할 만한 수준이다. 올해 건설교통부에 책정된 인프라 구축 예산(총 19조원 규모) 가운데 55% 이상은 도로 부문에 잡혀 있다. 그 나머지도 항만 시설 확충에 상당 몫이 할애되어 있다. 독일은 도로와 철도에 투자하는 인프라 예산의 비율이 5 대 5이다.

천문학적 돈을 쏟아 부으며 각국이 추진하고 있는 철도 혁명은 21세기 새로운 국제 질서에 대비하기 위한 ‘속도 경쟁’이나 다름없다. 한국은 최근 철도청을 공사화해 속도 경쟁에 뒤늦게 가세했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격차를 좁히기 위해서는 총력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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