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 적 ‘가짜 약’몰아낼 길이 없다
  • 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5.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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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 인원 태부족에 도매상 난립까지 겹쳐
지난 1월 초, 인천지방경찰청 수사2계 김명권 경사는 다급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충남 아산의 한 시골 마을에 있는 가건물에서 수상쩍은 약을 만들고 있다는 제보였다. 며칠 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창고’를 급습해 현장에서 외국인 노동자 2명과 한국인 노동자 2명을 검거했다.

놀라운 것은 창고 한쪽에 쟁여놓은 약이었다. 한 알에 5백6원씩 납품되는 위궤양 치료제 잔탁이 90만정(280kg)이나 쌓여 있었던 것이다. 물론 주요 성분인 염산 라니티딘이 50~60%밖에 들어 있지 않은 가짜 약이었다. “주범을 검거하지 못해 제조 경위 등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시중에 유통되기 전에 막아 그나마 다행이었다”라고 김경사는 돌이켰다.

약사, 가짜 약인지 모르고 팔아

가짜 잔탁이 신호였을까. 그로부터 보름 뒤 또 다른 가짜 약이 시중에서 거래되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식약청) 김성진 사무관이 신고 전화를 받은 것은 1월 중순. 고혈압 치료제 노바스크를 공급하는 한국화이자제약(화이자)으로부터 정품과 달리 잘 녹지 않는, 좀 수상한 약이 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노바스크는 한 알에 5백26원 정도 하는 고가 약품.

김사무관이 문제의 약을 입수해 성분 분석을 의뢰한 결과 전분과 유당만 들어 있을 뿐 아무런 의학적 성분이 없었다. 불법 제조된 약이 분명했다. 식약청 직원들은 그 약을 판 약국(서울 중랑구)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약사는 자기가 가짜 약을 팔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가짜 약은 정교했다.

수소문한 끝에 약을 납품한 제약 도매업체 직원 ㄱ씨를 찾아냈다. ㄱ씨를 추궁하자 유통 경위가 드러났다. ㄱ씨는 평소 안면이 있던 제약사 직원 ㅇ씨로부터 5백정 들이 노바스크(고혈압 치료제) 1백90병을 20% 싼 값에 샀다고 말했다. 그는 자금이 급하다는 ㅇ씨에게 5천만원을 건넸다고 덧붙였다. 김사무관과 검찰은 문제의 ㅇ씨를 뒤쫓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2월 초 현재까지 그의 행적은 오리무중이다.

가짜 노바스크를 공급받은 의원과 약국은 모두 40여 곳. 곧바로 수거가 시작되었고, 1백40여 통이 회수되었다. 조사 결과 다행히 가짜 노바스크 때문에 부작용을 겪은 환자는 없었다. 가짜 노바스크 병에는 하나같이 ‘제조번호 339004390’과 라벨 일련번호 ‘008589’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하지만 숫자를 빼고는 모든 것이 정품과 똑같았다. 심지어 노바스크를 공급하는 화이자 직원조차 몰라볼 정도였다.
가짜를 구분하는 방법은 한 가지, 알약을 20℃ 물에 넣고 녹는 속도를 살펴보는 것뿐이다. 정품은 20초 만에 거의 녹지만, 가짜 약은 몇 분이 지나도 일부가 덩어리로 남는다. 김사무관은 “고혈압 환자가 석 달 정도 가짜 약을 복용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다행히 유통된 지 한 달도 안되어 가짜 약이 모두 수거되었다”라고 말했다.

가짜 잔탁과 노바스크가 발견된 뒤 공급사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잔탁을 공급하는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은 금박 호일로 되어 있는 포장을 은박 블리스터(눌러 빼는 투명 플라스틱 포장) 형태로 바꾸기로 했다. 윤미경 GSK 차장(PR팀)은 “블리스터 형태는 재료비가 비싸 웬만해서는 위조하기가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화이자도 339004390과 008589가 찍힌 가짜 약들이 더 없는지 살폈다. 그렇지만 병을 바꾸지는 않기로 했다. 몇 달 전 이미 위조와 분실을 막으려고 개조했기 때문이다.

위궤양과 고혈압 치료제에만 가짜 약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발기부전 치료제에 가짜가 제일 많다. 관세청에 따르면, 한 해에 서너 차례씩 발기부전 치료제 대형 밀수가 적발된다. 지난해 6월 가짜 비아그라 9천9백정, 가짜 시알리스 9백정(약 1억2천만원어치)을 들여오던 이 아무개씨가 검거되었다. 두 달 전에는 가짜 비아그라 43만1천정을 들여오던 김 아무개씨 등 6명이 구속되었다. 서서히 줄고 있지만, 살 빼는 약 제니칼에도 가짜가 적지 않다.

외국에서 몰래 들여온 발기부전 치료제는 주로 서울 남대문시장과 인터넷에서 은밀히 거래된다. 그러나 이 약들은 대부분 가짜이다. 실제 중국이나 타이완 등 동남아에서 가짜 비아그라를 제조하다가 적발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렇다면 은밀히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병에 든 비아그라는 모두 가짜”

그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스팸 메일 ‘비아그라, 시알리스, 흥분제 판매’를 보낸 사이트에 접속해보았다. 스팸메일에는 비아그라·시알리스 10정에 16만원·18만원, 1통(30정)에 36만원·42만원이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화면을 클릭하자 이름·메일 주소·연락처·주소·상담(내용)·제품명·개수를 기록하는 ‘약품 신청서’가 떠올랐다. 빈칸을 메우고 전송한 뒤 연락을 기다렸다. 하루 뒤 ‘성인 약품입니다’라는 제목의 메일이 왔다.

그런데 내용이 좀 이상했다. 비아그라와 시알리스의 효능을 간단히 설명한 뒤, 난데없이 정체불명의 ‘흥분제’에 대한 선전이 장황하게 이어져 있었다. 액상과 분말이 있고, 효과가 어쩌구저쩌구…. 그 뒤에 은행 계좌번호가 적혀 있고, 주문 물품 이름과 수량을 쓰라는 안내문이 딸려 있었다. ‘더 궁금한 점이 있으면 전화번호를 남기라’는 글도 덧붙여 있었다.

전화번호를 남긴 뒤 연락을 기다렸다. 몇 시간 뒤 40대 남성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에게 기자임을 밝힌 뒤 질문을 던졌다. “발기부전 치료제는 정품인가?” “난 모른다.” “왜 모르나?” “난 주문을 받고, 물건 보낼 곳의 주소지를 알아내 전달만 한다. 약은 구경도 못한다.” “그럼, 약은 누가 보내나?” “모른다. 전화로만 연락을 주고받는다.” “주문 전화나 메일이 1주일에 얼마나 오는가?” “지난 주에 12건 연락왔다. 그러나 그 가운데 약을 산 사람은 두 명뿐이다.”

비아그라를 공급하는 화이자 김천경 차장(홍보부)은 “대량으로 판매되거나 병에 든 비아그라는 모두 가짜다”라고 말했다. 정품 비아그라는 2정 단위 블리스터가 4개 들어 있는 박스 포장을 해서, 낱알 형태의 판매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면 시알리스는 정품 판독법이 외부에 알려질 경우 정교한 복제품이 나올 수도 있어, 아예 판독법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시알리스를 공급하는 한국릴리 김경숙 부장(홍보실)은 “의사 처방에 의해 약국에서 구입하는 시알리스 외에는 모두 가짜라고 보면 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가짜 발기부전 치료제가 끊임없이 유통되는 이유는 뭘까. 가격 때문이다. 정품 발기부전 치료제의 경우 한 정에 1만6천~1만8천원을 들여야 하는데, 가짜의 경우 중국에서 2백원에 들여와 도매상에 2천원에 유통된다. 한 불법 도매상은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한 통에 30정이 들어 있는데 1만5천원 정도 한다. 30통을 사면 38만원까지 깎아줄 수 있다’고 말했다.

식약청 김성진 사무관은 “단속할 손길이 달려 가짜 발기부전 치료제 유통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현재 서울 식약청 감시과에는 단속 공무원이 3명뿐이다. 이들이 하는 일은 의약품·화장품·의료기기의 관리·감시. 할일이 넘치다 보니 가짜 약을 추적할 엄두조차 못 내고 있는 것이다. 경찰청에 사이버수사대가 있지만, 가짜 약의 경우 식약청 소관이라며 일을 떠넘기고 있는 실정이다.

식약청 이정석 의약품관리과장은 “경기 침체와 어수선한 의약품 공급 체계가 가짜 약을 만들어낸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1960년대에 밀가루로 만든 항생제가 나온 이후 한국에는 가짜 약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최근 고가 가짜 약이 연이어 등장하고 있는 이유는, 방법이야 어찌되었든 ‘한탕’을 노리는 사람이 많아졌음을 뜻한다.
식약청에 사이버 감시 인원 1명도 없어

의약품 도매업소(도매상)의 난립도 가짜 약 유통을 부추긴다. 2004년 말 현재 한국에는 1천6백개 정도의 도매상이 있다. 2000년에 7백개 정도였던 도매상이 이처럼 급격히 늘어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시설 허가 기준을 낮추어 진입 규제를 철폐했기 때문이다. “전에는 사무실과 창고를 합쳐 90평 이상 갖추어야 의약품 도매업 허가를 내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기준이 사라졌다. 그 탓에 도매상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라고 이정석 과장은 말했다.

의료 선진국에는 도매상 숫자가 제조사의 5분의 1밖에 안된다. 그런데 한국은 오히려 제조사(2백25개)보다 7배나 많은 도매상이 있다. 그에 따른 부작용이 한둘이 아니다. 우선, 식약청 같은 감독 기관이 관리·감시하기가 어렵다.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적자를 면치 못하는 도매상이 늘고(제대로 장사하는 도매상이 100여 개밖에 안된다), 그로 인해 ‘무리수’를 두는 업체가 한둘이 아니다. 즉 영업은 제약사 직원이 하고 도매상은 주변의 병의원에 약품을 공급하는 물류 기지 역할만 해야 하는데, 직접 영업에 나서기도 하는 것이다. 가짜 약은 바로 그 틈을 파고든다. 가짜 고혈압 치료제를 구입한 ㄱ씨처럼 돈이 궁해 더 값싼 약을 찾다보면, 가짜 약이라는 덫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의약품 유통·판매를 관할하는 시·군·구청에서는 규제를 다시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풀린 규제를 다시 강화하기란 쉽지 않다. 이정석 과장은 감시 인력이라도 보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식약청에 사이버 감시를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너무 많다.”

현재 국내에서 허가된 의약품은 모두 3만여 개. 경기 침체가 지속되고 단속하는 손길이 점점 더 느슨해지면 가짜 약 제조와 유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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