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는 이창호에게 연전 연패하고 있다
  • 박치문(중앙일보 전문기자) ()
  • 승인 2005.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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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 이룬 ‘권태’ 탓에 제실력 발휘 못해 세상사에 관심 깊어지며 집중력 떨어져
바둑의 최강자 이창호 9단(30)이 젊은 기사들 사이에서 책에 미쳤다는 뜻의 ‘서치(書痴)’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그는 닥치는대로 책을 읽었는데, <손자병법>이나 <열국지> 같은 역사 소설에서부터 추리 소설, 정치에 관한 책 등 다양했다. 언젠가는 (오래 되어 제목이 정확할지 모르지만)<사람을 웃기는 법>이나 <이성과 대화하는법> 같은 책을 보기도 했다.

이창호는요즘 <다빈치 코드>에 이어 <다빈치 코드깨기>라는 책을 보고 있다. 이창호 9단이 최근 주요 대국에서 연전 연패하면서 그의 이런 다방면의 관심이 도마 위에 올랐다. 세계 바둑의 최강자 이창호가 어느 날 문득 연패에 빠지게 된 것은 실력 때문이 아니라, 세상사와 이성에 대한 관심이 특유의 집중력을 훼손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창호는 올해 들어 주요 대국에서 잇달아 지고 있다. 지난 1월10일 최철한 9단과의 국수전 도전기 첫판에서 불계패하더니, 1월13일에는 타이완의 중환배 세계대회 준결승에서 왕리청(王立誠) 9단에게 반 집을 져서 탈락했다. 1월24일에는 LG배 세계기왕전 준결승에서 중국의 위빈(兪斌) 9단에게 졌다. 그리고 2월11일에는 최철한과의 국수전 2국에서 또다시 불계패해 0 대 2.

프로 기사가 제아무리 강해도 80% 승률을 기록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4연패 정도는 누구나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의 연패는 내용이 영 다르다는 점에서 프로 기사들이 특히 주목하고 있다. 우선 국수전. 이창호는 신흥 강자 최철한에 대해 나름으로 준비했고, 그의 묵직한 스타일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그런데 2국에서 이창호가 단수를 착각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반 집 승부로 어울린 바둑이었다. 예전에는 이런 흐름에서 이창호의 필승은 당연지사. 그런데 ‘돌다리를 두드리고도 건너지 않는다’는 이창호가 하급자도 볼 수 있는 단수를 착각해 돌을 던지고 말았다. 이창호의 바둑 철학은 ‘실수를 줄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집중력이 발군인 데다 성격조차 매우 신중하여 터무니없는 착각 따위는 단 한번도 범한 일이 없는 문자 그대로 ‘보증 수표’였다. 그런 이창호가 단수를 착각한 사실은 다른 어떤 무엇보다도 충격적이었다.

나이 먹어 계산 능력 떨어졌다?

두 번의 세계 기전 패배도 놀랍다. 이창호는 ‘이 한 판이다’ 싶은 바둑은 여간해서 지지 않는다. 가령 국가대항전인 농심신라면배의 경우, 이창호는 한국의 마지막 수문장으로 나가 반드시 우승을 지켜냈다. 또 개인전에서도 올라갈수록 더 강해지고, 결승에 가서는 단 한번을 빼고 모두 우승하는 저력을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준결승에서 잇달아 탈락했다. 그것도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왕리청과, 열두 번 싸워 열한 번을 이긴 위빈에게 졌다.조훈현 9단은 바둑 내용에 더 주목하고 있다. ‘신산(神算)’이라는 별명의 이창호가 왕리청에게 반 집을 졌다는 점이 걸린다고 했다. 위빈과의 대국에서도 유리한데 무리하게 대마를 잡으러 가다가 진 것도 놀랍다고 했다. 이창호 바둑은 상대 대마가 곧 잡힐 듯싶은 장면에서도 칼을 뽑지 않고 퇴로를 열어준다. 계산으로 이긴다. 그런 이창호가 우세한 상황에서 상대의 대마를 잡으러 가다니!

바둑은 집중력 싸움이다. 이창호는 꿈속에서도 바둑만 생각할 정도로 바둑에만 몰입했다. 그의 무서운 집중력은 거기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제 그 완벽한 둑 어딘가에 구멍이 난 것일까.

12~13년 전, 당시 이창호는 두면 이겼고, 한 해에는 승률이 무려 90%를 넘어섰다. 이창호는 ‘지지 않는 소년’이라고 불리며 조훈현 9단의 모든 타이틀을 넘겨받고 있었다. 그때 서봉수 9단은 무릎을 치며 “이창호야말로 바둑의 궁극을 보여줄 사람이다”라고 격찬했다. 이창호는 점점 더 강해질 것이며, 아무도 실력으로 그를 누를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이창호를 이길 사람은 이창호 자신뿐이다.”

이창호가 지금은 바둑만 생각하고 있지만 그가 좀더 커서 여자나 결혼 그리고 세상사에 관심을 갖게 되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서봉수가 예언한 대로 이창호에게 지금 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게다가 ‘만만치 않은 나이’도 한몫 가세하고 있다. 바둑의 전성기는 대체로 20~25세로 본다. 이때 집중력과 계산력이 절정에 달한다. 특히 계산력은 나이가 들수록 대단히 빠른 속도로 약해진다.

그러나 ‘이창호 팬’이라 할 서봉수 9단은 이창호의 슬럼프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본다. 그는 ‘권태’ 탓으로 돌린다. 더 성취할 것이 없는 1인자의 자리에 너무 오래 있으면서 승부의 긴장감이 약해진 것으로 본다. 하기사 이창호가 가끔 술을 마시거나 독서에 탐닉하는 것도 승부 인생의 단조로움 탓일지 모른다.

이창호 “세상사에 대한 관심이 바둑에 도움”

이창호 9단은 2월19일 금강산 대국(국수전 3국)이 끝나면 곧바로 중국 상하이로 날아가 농심배에 출전한다. 농심배에서 한국은 이창호 혼자이고, 중국과 일본은 각각 2명씩 남아 있다. 한국이 우승하려면 이창호가 4연승을 거두어야 한다. 금강산으로 떠나려는 이창호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이창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후배 기사들은 강하다. 외국 기사들도 전과 달리 실력이 상향 평준화하고 있다. 컨디션은 그저 그렇다. 특별히 좋아질 것도 나빠질 것도 없다. 집중력은 바둑만 생각할 때보다는 못하겠지만, 독서나 세상사에 대한 관심 탓에 나빠졌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 관심이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는 측면도 있다고 본다.”

다양한 관심은 인생을 풍요하게 하지만, 인생을 알면 승부가 약해진다. 그래서 자꾸 지다 보면 다시 승부에 불이 붙지만, 그때는 때가 늦을 수 있다. 천재 이창호가 이같은 양면적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해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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