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도 국보였다!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3.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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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보물 1호인 흥인지문(동대문)이 국보였다고? 보물이 국보로 지정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았지만 국보가 보물로 되었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고? 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한때 동대문은 국보 2호였습니다. 그것도 10년 넘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광복 이후 우리 정부가 일제가 보물로 지정했던 문화재를 일괄적으로 국보로 지정했기 때문입니다. 1937년 8월 30일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책자에는 보물 1호가 경기도 경성부 남대문통 4정목에 있는 경성 남대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당시 269호까지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는데, 269호는 경북 안동 표천면 하포동에 있는 '안동 유씨 문서' 17점이었습니다.
문화재관리국이 1992년 2월에 펴낸 <조선총독부 및 문교부 발행 문화재 관계 자료집>에 따르면 1956년에 문교부는 <한국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 목록>을 발행했습니다. 이 자료 범례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책은 단기 4289년(1956년) 12월말 현재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을 각 종별로 나누고 이것을 지정번호순으로 적었다. 단기 4288년(1955년)에 실시한 지정문화재 실태 조사에 의하여 멸실·소실 등 변동된 현황을 적용해 기록하였다. 전 소유자가 일본인이었던 것은 전부 귀속 재산으로 기입하였다.' 이 조사 당시 한국에는 국보 문화재가 419건이 있었습니다. 주목되는 것은 남한에 있는 362건 뿐 아니라 북한에 있는 57건의 문화재도 국보로 지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광복된 지 10년이 지났고 한국 전쟁이 끝난 시점이었지만, 여전히 문화재 행정은 한반도 전체를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좋게 보면 통일 지향적인 의식이 강했던 것이고, 다른 면에서 보면 그만큼 당시 행정의 난맥상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건 이때도 동대문은 국보 2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문교부는 1960년 11월에도 <지정문화재 목록>이라는 책자를 발간했습니다. 당시까지 지정되어 있는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 등을 수록한 것으로, 이때도 1956년과 마찬가지로 미수복지(북한)에 있는 국보 문화재도 실었습니다. 이 책자에 따르면 당시 남한에는 493건, 북한에는 62건 등 모두 555건의 국보가 있었습니다. 당시 국보 555호는 이화여대 박물관에 있던 '이조백자 철사포도문호'였습니다. 1956년에 비해 북한에 있는 문화재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것이 5건이나 늘어났다는 것이 눈에 띕니다. 비록 영토는 아니었지만 문화재를 국보로 지정하는 일은 계속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남한에 있던 국보 문화재 가운데서도 강원도 8건, 경기도 11건 등 모두 19건이 미수복지에 있는 문화재였습니다. 물론 동대문은 이때도 국보 2호였습니다.
그렇다면 동대문은 언제 국보에서 보물로 바뀐 것일까요. 문화재 지정의 대이동이 일어난 1962년 문화재 보호법이 제정될 때입니다. 문화재관리국이 생기면서 지정 문화재에 대해 전면적으로 재지정을 할 때 동대문은 보물 1호가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때 국보였다가 보물이 된 문화재는 동대문말고도 많았습니다. 상징적인 경우로 동대문을 들어 설명했을 뿐입니다.
참고로 왜 4대문 가운데 동대문만 '흥인지문'으로 네 글자일까요. 다른 문은 숭례문 돈의문 숙정문 등 세 글자인데요. 이와 관련해서는 풍수적 요소가 고려되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풍수가들은 한양의 주산인 북악산에서 왼쪽으로 동향하는 응봉과 타락산 산줄기를 좌청룡이라 하고 오른쪽으로 서향하는 인왕산과 안산 줄기를 우백호라고 합니다. 좌청룡 보다 우백호가 우람하고 높습니다. 이것을 보완하기 위한 비보책 가운데 하나가 '흥인지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금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타락산에서 끝나는 산세를 더 잇기 위해 가짜산을 만들었는데 일본인들이 이를 알고 산을 허물고 동대문운동장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풍수적으로 좌청룡은 적자(嫡子) 장자(長子)를 뜻하고 우백호는 서자(庶子) 차남(次男)을 뜻합니다. 이때문인지 몰라도 조선왕조에서 장자가 임금이 된 경우는 세 번 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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