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몽유도원도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4.0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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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견의 작품으로 유명한 '몽유도원도'를 본 적이 있으세요? 저는 1996년 겨울, 호암미술관에서 연 전시회 때 진품을 보았습니다. 열심히 본다고 보았는데 지금 되돌아보니 아쉬움이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것을 하는.
몽유도원도는 우리나라 국보가 아닙니다. 1939년 일본 국보로 지정된 명품 중의 명품입니다. 서화에 일가견이 있었던 세종대왕의 아들인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풍경을 안견에게 그리게 한 것인데, 안견은 단 3일 만에 이 작품을 완성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안견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이지요. 안평대군은 1450년 겨울날 몽유도원도를 보며 칠언절구를 남겼습니다. '내가 꿈꾼 도원이 세상 어디인가, 은자들의 옷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그림으로 보니 참으로 좋구나, 수 천년을 이대로 전하여 봄직하지 않은가'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 외에 김종서 신숙주 이개 정인지 서거정 성삼문 등이 모두 23편의 발문이 곁들여졌습니다. 모두 자필이어서 문학성과 서예사적인 가치가 큽니다.
민족의 명품인 몽유도원도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일본으로 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현재까지 공개된 기록에 따르면 1893년 이전에 이미 일본에 건너가 있던 것은 확실합니다. '몽유도원도'에 대한 첫번째 논문은 1929년 나이토 코난이란 사람이 발표한 것입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여러 차례 이 그림을 조선에 돌려달라고 했으나 소장자로부터 번번이 거절 당했다고 합니다. 만약 이때 우리나라에 왔으면 해방 이후 적산 처리 문제와 맞물려 우리 것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이때가 몽유도원도가 돌아올 수 있는 첫번째 기회였다면 두번째 기회도 있었습니다. 생각할수록 안타까움만 남는 경우입니다.
몽유도원도는 1949년 잠깐 한국으로 왔었습니다. 일제 시대 골동상으로 유명했던 장석구라는 사람이 판로를 찾아 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당시 장석구는 몽유도원도 가격으로 3백만원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거금이 없었고 적극적으로 살 의사를 가진 사람도 없어 몽유도원도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덴리대학 소장품이 됩니다.
몽유도원도는 1996년 호암미술관이 주최한 '위대한 문화 유산을 찾아서-조선전기 국보전'에 선보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탄성과 탄식을 동시에 자아냈습니다. 작품에는 탄성을, 일본 소유라는 데는 탄식을 쏟아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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