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1955년 6월 문화재보존위원회를 새로 개편하고 20명의 권위자들을 위원에 위촉해 문화재 실태조사를 벌인 적이 있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고 무려 10년이 지난 시기였고, 한국전쟁이 끝난 2년 뒤였다.
그 결과 국보는 멸실(滅失) 3건, 소실(燒失) 6건, 분실(紛失) 7건, 전파(全破) 2건 등 모두 13건이 피해를 본 것으로 조사되었다. 멸실된 국보는 청화백자명(靑華白磁皿` 413호) 진사입도문명(辰砂入桃文皿` 412호) 관음사 금동관세음상(214호), 소실된 것은 개성 남대문(10호) 관음사 원통전(273호) 보림사 대웅전(240호) 안동문묘(302호) 진주 촉석루(276호) 송광사 백운당 및 청운당(404호), 파손된 것은 청자문함(靑磁文1371호) 상감합자(象嵌合子` 377호)였다.
국보 413호였던 청화백자명은 창랑 장택상씨 소유였는데 탐스러운 복숭아 셋을 배열하고 그 사이에 잎사귀를 그려넣은 조선 백자의 대표작이었다. 1950년 5월 국보특별전에서 선보여 호평을 받았는데 한달 뒤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불타없어졌다.
혼란기여서 희한한 일들도 많았다. 광주 증심사에 보관되어 있던 금동석가여래상(211호)와 금동보살상(212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주지 스님이 인근 경찰서에 보관시켰는데 그 뒤 자세한 경위로 모른 체 사라졌다.
반면 한국전쟁 와중에 우리나라에 돌아올 수 있었던 문화재도 있다. 현재 일본 천리대에 있는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그것이다. 1952년 피난 시절 박물관 학예관으로 있던 최순우는 한 상인으로부터 80만엔만 있으면 몽유도원도를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문교부장관이던 백낙준에게 연락했으나 "전쟁 중인데 어떻게 구입할 수 있겠느냐"는 답을 들었을 뿐이다. 그 뒤 최순우는 몽유도원도 이야기만 나오면 당시 구입하지 못한 것을 애통해 했다고 한다. 몽유도원도는 1949년-1050년 후반에도 골동상 장석구 등이 판로를 찾아 한국을 오갔던 적이 있어 돌아올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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