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예술’끼리 치고받고…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5.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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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학교 설치법 싸고 논란 가열…한예종·일반 대학 ‘충돌’

 
지난 3월22일 오전, 서울 대학로 흥사단 강당. 김미혜(한양대·한국연극학회 회장) 김수남(청주대·한국영화학회 회장) 김화숙(원광대·한국무용교육학회 회장) 교수 등 다양한 예술 장르의 교수 50여 명이 모여들었다. 격앙된 표정들이었다. 이들은 이 날 ‘한국예술학교 설치법안 저지를 위한 비상대책위’(비대위) 명의의 성명을 발표했다. 오후에는 제자 1천여 명과 함께 국회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하루 뒤인 3월23일 오전,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 이번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총장 이건용) 교수 30여 명이 학교를 박차고 나왔다. 김대진(음악원) 박재동(영상원) 김석만(연극원) 김홍준(영상원) 등 역시 내로라 하는 예술가들이다. 비대위 소속 교수들의 전날 기자회견 내용을 반박하기 위해서다.

‘한국예술학교설치법’(설치법) 제정을 놓고 일반 예술 대학 교수들로 구성된 비대위와 한예종 간의 갈등이 표면화하고 있다. 한예종은, 한예종 안에 석·박사 과정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이 교육부 반대로 무산되자, 올해 초부터 의원 입법에 의한 한국예술학교설치법 제정을 추진해 왔다. 이 법안은 지난 2월14일 우상호 의원(열린우리당) 등 여야 의원 45명 발의로 상정되어 현재 문화관광위에서 법안 심의 중이다.

국회는 3월24일 이와 관련한 공청회를 열었지만 양측의 의견 차이가 너무 커 난항이 예상되고 있다. 설치법은 이외에도 한국예술학교가 자체 학칙에 따라 예술 영재와 외국인의 입학을 허용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 조항 또한 표준화한 입시를 통해서만 학생을 선발하는 일반 대학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는 1993년 ‘체계적인 예술실기 교육을 통한 전문 예술인 양성’을 목표로 설립된 문화부 산하 고등교육기관이다. 음악원·연극원·영상원·무용원·미술원·전통예술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학의 학부에 해당하는 예술사 과정에 2천2백52명, 대학원에 해당하는 전문사 과정에 8백90명이 재학 중이다.

 
한예종은 지금껏 각종 국제 콩쿠르에서 1백30여 차례나 수상자를 내는 등 국내 예술 교육기관 가운데 발군의 실기 교육 능력을 발휘해 왔다. 하지만 이런 성취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는 현행 고등교육법상 대학이 아닌 ‘각종 학교’에 속한다. 현행법상 교육부 소관 교육기관만 석·박사 과정을 둘 수 있다. 따라서 한예종은 대학 명칭을 쓸 수 없고, 실질적인 대학원 과정을 운영하면서도 석·박사 학위를 수여할 수 없다. 한예종이 독자적인 설치법 제정에 사활을 거는 것도 이런 불확실한 위상을 개선하지 않고는 학교 발전에 한계가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국내의 4년제 고등교육기관 중 교육부 산하가 아닌 곳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외에도 육·해·공군 사관학교와 경찰대학, 과학기술원, 한국전통문화학교 등 8개 학교가 더 있다. 이 중 한예종과 문화재청 산하 전통문화학교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독자적인 설치법의 적용을 받는 교육기관이며, 한국과학기술원은 설치법에 따라 정식 석·박사 과정을 두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자구책’에 대한 비대위의 반발은 예상보다 거칠다. 정부의 특혜를 받으며 운영되고 있는 실기 교육 기관에 석·박사 과정이 설치될 경우 공교육 붕괴와 지방 예술대 공멸이 불 보듯 빤하다는 것이 이들의 공식적인 반발 이유다. 실은 한예종에 정식 대학원 과정이 설치될 경우 우수 학생들이 그곳으로 몰리면서 일반 대학 대학원이 하향 평준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더 크다.

김말복 교수(이화여대·무용)는 “유럽의 예술교육은 모두 컨서바토리(실기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수강생은 졸업과 함께 학위가 아닌 디플롬, 즉 자격증을 받는다”라며 한예종의 석·박사 과정 설치에 반대했다. 최치림 교수(중앙대·연극)는 “정부의 특혜를 받는 교육기관이 석·박사 과정까지 독점하겠다는 발상이다. 한예종은 본래 설립 취지에 맞도록 실기 교육의 제도 개선에 심혈을 기울이고, 석·박사 과정 교육은 교육부 산하 정규 대학에 맡기라"고 말했다. 이들은 법이 통과될 경우 헌법소원까지 내겠다며 벼르고 있다.

이에 대한 예술종합학교측 반응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 미국 줄리아드 음대 출신인 김대진 교수(음악원·피아노)는 “줄리아드 음대, 프랑스 국립고등음악원,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은 석·박사 과정이 있거나 최근 설치했다. 예술교육기관에 학위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다”라고 말했다. 김봉열 교수(미술원·건축학)는 “한예종이 설립 취지를 망각했다는 주장은 억지다. 1991년에 만든 한예종 설치령에도 예술 실기 및 예술 이론을 교육하도록 나와 있다”라고 반박했다.

 
양측의 공방은 한 치의 양보도 없다. 한예종 기획홍보실장을 맡고 있는 홍순철 교수(영상원)는 “학생들이 실질적인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도 학위를 받지 못해 해외 유학이나 취업에 지장을 받고 있다. 설치법은 이런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비대위 소속 일부 교수들은 협동과정이나 공동학위제를 활용하라고 제시했지만, 이 또한 현행 교육법상 대학원에서만 이 제도를 운영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재로는 운영이 불가능하다고 한예종은 반박한다. ‘석·박사 과정을 설치하고 싶으면 교육부 산하로 옮기라’는 비대위측 주장에 대해서도 한예종측은 ‘창의적인 예술 교육을 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일반 예술대학 교수들은 이미 1999년에도 한 차례 일전을 치렀다. 당시 국립예술대학설치법이 입법 상정되자 전국의 예술대학 교수들은 비대위를 꾸려 반대 투쟁을 벌였다. 법안은 갈등 속에 표류하다가 회기를 넘기며 자동 폐기되었다. 이번 한국예술학교설치법은 대학 명칭을 고집하지 않는 대신 석·박사 과정을 ‘인정’받는 쪽에 집중하고 있는 점이 당시와 다르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둘러싼 논란은 법안 제정 여부와 관계없이 입시와 학벌에 좌우되는 한국 예술계와 예술 교육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이번 논란을 지켜보고 있다는 한 교수는 “이번 사태가 예술계 내부의 밥그릇 싸움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도 이번 기회에 입시 제도를 비롯한 한국의 예술 교육 전반에 대한 총체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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