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데 살면 불안한 까닭
  • 전상일 (환경보건학 박사) (www.enh21.org)
  • 승인 2005.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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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건강] 고층 건물 거주자, 호흡기 질환 더 잘 걸려…우울증 발병 위험도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했던가. 모처럼 화창했던 지난 일요일, 느닷없이 지진이 밀어닥쳤다. 일본 후쿠오카에서 발생한 강진의 여파였다. 남아시아 대지진의 쓰나미 공포가 한반도에서 재현될까 봐 온 나라가 바짝 긴장했지만,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그래도 실내, 특히 고층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의 강도가 만만치 않았다. 23층 높이의 아파트가 갑자기 휘청하는 느낌이 들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는 경남 양산의 시민,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다가 심한 흔들림 때문에 한동안 현기증에 시달렸다는 서울 길동의 18층 아파트 주민 등이 ‘증인’이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진 지대로 꼽히는 일본이 지척이어서, 한반도도 결코 지진으로부터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마땅한 대비책이 없는 것 같아 불안하다. 한국은 유례 없는 속도로 도시화가 진행되어 나날이 건물이 늘어나고, 자꾸만 위로 치솟는다. 도시에 산다는 것, 특히 고층 건물에 사는 일은 지진이 아니더라도 여러 모로 쉽지 않다. 건강하게, 사람답게 살기 어렵다는 말이다.
 
자연 광선에 적절히 노출되고, 자연 환기도 잘 되고, 야외 녹지 공간과 가까운 건축이 건강에 가장 좋은 건축이라는 사실에 대해 전문가들 사이에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도심의 빌딩 숲은 이런 요소들과 정확히 반대되는 요소를 갖고  있다. 도시 환경과 건강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걱정하는 시선을 던진다. 과밀화에 따른 심각한 환경 오염과 소음 공해 등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사람이 적지 않다.

건물의 고층화도 건강을 해치는 원인이 된다.  고층 건물에 살면 아무래도 밖에 나가기가 어려워 주로 실내에 머무른다. 그러다 보면 신체 활동이 적어지고 행동 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 또 운동 부족으로 살이 찌거나 무력해지기 십상이다. 직장을 다니거나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하며 바깥출입을 하는 사람은 그나마 덜하지만, 집안에 있는 시간이 많은 주부는 고층 아파트에 살면 사회와 격리되어 정신 건강까지 해칠 수 있다.

5세 이하 아이를 키우는 엄마와 그 아이들이 높은 곳에 살면, 젊은이와 노인에 비해 부정적인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어린이는 고층 건물에 살면 호흡기 질환에 잘 걸리고, 신경질적인 성격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도 있다. 고층 건물에 살기 때문에 더 잘 걸리는 질환도 있다. 봄·여름에 꽃가루 때문에 생기는 알레르기성 비염인 '건초열(乾草熱)'이 그렇다. 한국에서는 환절기에 코감기라 하여 가볍게 앓는 정도의 질병이지만, 미국 같은 곳에서는 전국민의 10% 정도가 건초열 환자이다.  증상도 콧물기침 결막염·호흡곤란까지 꽤 심각하다.

건초열의 원인이 꽃가루여서 도시보다 시골 환경이 더 나쁠 것이라고 여겼는데, 스페인 연구진이 조사해 보았더니 오히려 도시 사람들이 꽃가루에 더 민감했다. 도시 사람 중에서도 1층에 사는 사람보다 높은 층에 사는 사람의 민감도가 더 높았다. 이유는 분명했다. 아침에 떨어져 나온 꽃가루가 낮에 점차 기온이 높아지면 공기 흐름을 따라 자꾸 위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인구 밀도에 비해 녹지 공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자연 환기도 잘 되지 않으니 집안을 떠도는 오염물질 때문에 호흡기 질환이나 피부 질환에 걸릴 위험도 높다. 게다가 높이 떠있고 세상과 격리된 느낌 때문에 우울증에 걸린 사람도 꽤 있다는 증언이다.

오늘도 20층이 넘는 초고층 아파트와 주상 복합 건물이 곳곳에 솟아오르고 있다. 고층 건물은 재력을 과시하는 데는 적합할지 모르지만, 건강 관리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리히터 규모 8.0의 강진을 견디는 내진 설계에 자동 환기 장치와 산소 공급 시스템을 갖추었다지만, 여전히 바람 많이 불고 지진이라도 나는 날이면 불안하다는 타워팰리스 주민의 푸념이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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