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베스는 중남미 시한 폭탄?
  • 손정수 통신원 (부에노스 아이레스) ()
  • 승인 2005.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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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석유 앞세워 미국과 ‘기 싸움’…러시아제 무기 사들여 긴장 고조

 

미국 조지 부시 정부와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정부 사이가 매우 심상치 않다. 오래 전부터 서로 눈을 흘기던 양국 사이가 최근에는 당장이라도 주먹이 오갈 정도로 험악해졌다. 중동 문제와 북한 핵 문제로 정신이 없는 중에도 ‘뒷마당’ 남미에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 미국이다.

1960년대 코 앞에서 피델 카스트로의 위협을 경험한 바 있는 미국이 지금, 석유와 남미 각국의 동조 여론을 방패삼아 자국에 도전하고 있는 우고 차베스 대통령과 심각한 기 싸움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처지에서 남미의 골칫거리는 이제 쿠바만이 아니다. 1960년대 쿠바가 ‘소련 미사일’로 미국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면, 차베스는 ‘석유 자원’을 무기로 꺼내들었다.

미국, "그는 카스트로와 친한 테러리스트"

최근 미국 정부는 각종 경로를 통해 우고 차베스 대통령에게 경고장을 날리고 있다. 부시 대통령과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이 우고 차베스에 대한 미국의 ‘저지 정책’에 대해 전면 재검토 지시를 내리는가 하면, 미국 국방부는 대놓고 차베스 정부를 ‘위협’으로 거론했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대통령과 국무장관의 ‘재 검토 지시’를 재확인했다. 미국 국방부 반구(중남미) 담당 차관보 로저 페드로는 “차베스는 정말 큰 문제다. 자신의 정치 스타일을 다른 국가에 적용하려고 석유 자원을 앞세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차베스의 현 정책에 대한 미국의 인내력은 한계에 도달했다”라고 밝혔다.

워싱턴 소식통들은 미국의 태도가 이처럼 바뀐 1차 원인으로, 볼리비아 대통령 메사를 사임 직전까지 몰아세웠던 볼리비아 제1 야당을 우고 차베스가 지원했던 사실을 지목하고 있다. 또 페루의 알렉산드로 톨레도 정부를 궁지로 몰았던 올해 초 페루 군부의 쿠데타 시도에도 차베스 정부가 개입했다고 보고 있다. 그뿐 아니다. 미국은 친미 콜롬비아 정부 무장 전복을 꾀하는 게릴라 조직에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는 인물도 차베스라고 본다.

 

게다가 더 중요한 사실은 최근 차베스 정부가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구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차베스는 지난해 말 러시아를 방문해 AK-47 소총 10만 정, Mi-35 헬리콥터 외에 공격 폭격기 MIG-29 50기를 주문했다. 미국은 이같은 움직임이 베네수엘라의 무장화 혹은 그 이상 최악의 상황을 연출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미국의 남부지역사령관 반츠 크레이드독 장군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차베스의 무기 구입 의도가 무엇인가를 자문하게 된다. 자국 방어용이라면 이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역 불안을 조성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고 우려했다. 이에 대해 베네수엘라 일간지 라 나시온은, 주미 대사의 말을 인용해 ‘러시아 무기 구입은 1960년대 도입한 노후 병기와 현재 사용중인 구식 무기를 교체하기 위한 방어용’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미국 국방부 관리들은 이 말을 믿지 않는다. 교체된 노후 병기들은 결국 인접국 무장 세력의 손에 넘어갈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라이스에게 모욕적 음담패설 퍼붓기도

미국과 베네수엘라의 마찰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다. 차베스는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되기 전인 1992년에도 영관급 장교로 붉은 베레모 낙하산 부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킨 적이 있다. 이 거사는 하루만에 실패해 차베스는 페루로 망명했지만, 1999년 좌익 정당과 손잡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집권했다. 이 때부터 차베스는 피델 카스트로는 물론이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리비아의 가다피 등 ‘미국의 적’을 거리낌 없이 만나며 미국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또한 ‘베네수엘라의 대외 정책에는 그 누구도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독자 외교 노선을 표방하며,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석유수출국기구를 부추겨 석유 가격을 조정하려고 시도했다. 미국은 한동안 차베스를 ‘카스트로와 친한 테러주의자’로 규정해 차베스의 미국 입국을 거부한 적도 있다. 특히 석유 문제에 관한 한, 조지 부시 대통령과 차베스 대통령의 관계는 말 그대로 ‘견원지간’이다.

차베스도 미국에 대한 원한이 사무칠 만하다. 지난해 베네수엘라에서는 반 차베스 쿠데타가 발생했는데, 차베스는 이를 ‘미국의 조종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최근 미국이 자신을 살해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지난 2월 대통령궁 경비를 강화하고 미국 해병대의 침공 가능성에 대비해 ‘국가 방위대’ 창설을 선언했다. 

최근에는 미국이 침공할 경우, 대미 석유 공급(베네수엘라는 미국의 네 번째 석유 공급국)을 전면 중단하고 대신 중국에 석유를 팔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물론이고 콘돌리자 라이스에 대해 모욕적인 음담패설도 주저하지 않는다.

미국과 베네수엘라의 팽팽한 대결 양상의 이면에는 베네수엘라 국내 상황도 결부되어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차베스가 비등하는 국내의 불만을 잠재우고 차기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관심을 외부로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부정·부패 척결, 빈곤 퇴치 등을 앞세워 대중 인기를 얻었던 차베스는 그러나 석유회사의 국영화·민간 방송사 개편·미개간 농지의 대규모 몰수 및 분배 등 잇단 급진적인 개혁 조처로 기득권층의 반발을 샀으며, 최근에는 군부 내의 옛 동지들마저 등을 돌리면서 궁지에 몰렸다.

베네수엘라는 지난 3월말 수도 카라카스 서부에 자리 잡은 약 2만㎡의 부지에 일반 시민을 모아놓고 군사 훈련의 초보 단계인 제식 훈련을 실시한 바 있다. 이는 지난 2월초 차베스가 선언한 지역별 민병대(한국의 향토예비군에 해당) 창설의 첫 구체적인 작업이었으며, 이때 모인 시민 1백20명의 대표는 “군 예비 훈련은 베네수엘라 국민을 군사적으로 준비시키고, 미국의 공격에서 살아남게 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양국 간 마찰, 남미 전역으로 확산될 기미

하지만 일부 분석가들은 미국 베네수엘라 침공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베네수엘라의 대미 석유 수출 중단 위협도 실질적인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전 베네수엘라 국영석유공사 사장 루이스 구이스티는 베네수엘라 석유 문제는 남미 전역의 안보를 위협하는 중대 사안으로 미국을 염려케 하는 중대사라고 규정하면서도, 베네수엘라가 실제로 움직이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은 베네수엘라 원유를 정유할 수 있는 시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대체 고객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베네수엘라가 미국과 같은 큰 고객을 쉽게 버릴만한 여유가 없다.

하지만 차베스의 석유 공급 중단 발언이 미국의 급소를 찌른 것만은 사실이다.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리차드 쿠거는 이미 지난 1월, 양국의 실랑이가 계속되자 하루 수입량 1백40만 배럴에 이르는 베네수엘라 석유 수입이 갑자기 중단될 경우 충격 평가를 전문 연구 기관에 의뢰한 바 있다.

양국간 불협화음이 점차 커지면서 그 파장은 남미 전역으로 확산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올해와 내년 브라질·콜롬비아·코스타리카 등 남미의 크고 작은 나라들이 줄이 선거를 앞두고 있어 미국과 베네수엘라의 갈등은 선거 향배를 가르는 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이 동아시아의 화약고라면 베네수엘라는 남미의 시한 폭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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