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오줌에 감격한 ‘지도자 동지’
  • 남성욱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
  • 승인 2005.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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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포스트모던 독재자 김정일 위원장의 ‘사생활 X파일’

 

 

소설가 이문열씨는 최근 “독도를 미사일 기지로 빌려줄 수 있는 근거를 조례로 마련하여, 북한이 원하면 대일 방어용 미사일 기지로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일본의 도발 앞에 자타가 공인하는 보수적 문인까지 북한의 미사일 개발을 두둔하고 나선 것이다.

이것은 일본측의 자극이 그만큼 언어도단이어서 북한의 힘을 빌려서라도 강력히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지만, 북한의 미사일과 핵 개발 프로그램에 대해 ― 미국·일본과는 달리 ― 우리 국민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너그러운 입장을 대변한 말이기도 하다.

미국의 대표적 진보파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최근 저작 <김정일 코드 : 브루스 커밍스의 북한 (North Korea : Another Country>(남성욱 옮김)을 관통하는 논리도 이러한 민족주의와 실존이라는 현실 인식의 범주와 그 맥을 함께한다. 

한마디로 ‘항일 게릴라 투쟁 당시 중국 공산당에 구금되고 스탈린식 인종차별 정책 때문에 체포된 김일성이 주체 노선을 택한 것은 당연하며,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화력을 경험했고 지금도 미국의 선제 공격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에 매달리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톰과 제리> 등 할리우드 만화영화 방영 지시

  한쪽에서는 일본이 준동하고, 북핵에 대한 한·미 간의 이견이 갈등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미·중 간에도 알력이 감지되는 등 한반도를 둘러싸고 나날이 국제 정세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문제의 중심 축인 북한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핵 위기의 해법을 찾는 것은 오늘 우리가 미룰 수 없는 당면 과제다. 다음은 <김정일 코드 : 브루스 커밍스의 북한>과 다른 로열 패밀리들의 기록에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김정일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주요 대목이다.

김정일은 공식적인 행사보다는 거실 바닥에 앉아 아들 김정남과 함께 <수퍼마리오> 비디오게임을 즐기는 인물이다. 그의 음악적 취향은 엄청난 자료를 수집한 클래식 음악에서 롤링 스톤스·핑크 플로이드·비치 보이스·폴 앵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라 트라비아타>뿐 아니라 <대니보이>도 좋아한다.

 

김정일의 ‘음악 정치’는 특이하다. 그는 어려울 때마다 공훈합창단의 음악을 보고 들으며 힘을 얻곤 했다. 그는 1996년부터 1999년까지 4년 동안 30회 이상 군 공훈합창단의 공연을 관람했다. 음악을 정치 수단으로 활용해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해 가는 방식은 특이하다.

음악에 관심이 많아 남한의 대중 가요 가수들도 좋아한다. 조용필·나훈아·이미자·최진희·심수봉을 비롯하여 원산에 초청받아 김정일을 만난 김연자 등을 선호한다. 애창곡도 이들의 노래들인데,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1983년 4월 북한 자체에서 개최한 남한식 가요 무대가 평양에서 열렸는데, 김정일은 오프닝 노래로 <눈물젖은 두만강>이 나오자 부드러운 미소로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한편 <도널드 덕>, <톰과 제리>, <벅스 버니>와 같은 할리우드 만화 영화를 텔레비전에 방영케 하여 대중을 즐겁게 하기도 했다. 북한의 만수대 텔레비전 방송국은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외화나 드라마를 방영한다. 1988년부터 1995년까지 7년간 매주 1~2회씩 디즈니랜드 사가 제작한 <톰과 제리>를 방영했는데 인기가 높았다. 다만 제목을 <톰과 제리>에서 <우둔한 고양이와 꾀많은 생쥐>로 바꾸어 방영했다. 김정일은 영화광이어서 비디오 2만여 개를 소장한 갤러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일본 영화도 많은데, 그 중에서도 黃씨 시리즈(<남자는 괴로워>라는 유명 연작 영화)를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그 외에 엘리자베스 테일러·오드리 햅번 주연 작품을 선호한다.

바람둥이도 술주정꾼도 아닌 가정적인 남자

김정일은 플레이보이도, 바람둥이(womanizer)도, 술주정꾼도 아니다. 언론이 전하는 것처럼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광신적 ‘악마박사’도 아니다. 김정일은 다만 그다지 사교적이지 않을 뿐이다. 과음하는 편도 아니다. 관저에서 파자마를 입은 채 비서들이 회색 가방에 담아온 수많은 서류에 지시 사항을 적어 넣는 가정적인 사람이다. 
  김정일은 바닥에 앉아 스크류 드라이버로 뮤직 박스를 열고 만지작거리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아들 김정남이 어릴 적에는 함께 앉아 <슈퍼마리오> 비디오게임을 즐기곤 했다.

그는 점잖은 성격에 수줍음을 타는 편이며, 정남을 비롯하여 다른 자녀들에게 열성적으로 헌신하는 대부분의 한국 아빠들과 같다. 1980년 3월 아들 정남이 유학을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갔을 때 김정일은 매일같이 정남에게 국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고, 김정일 부자는 안쓰러워 함께 울었다.(성혜랑 저 <등나무집>) 1971년 첫 아들 정남이 태어났을 때 김정일은 새벽에 산모(성혜림)가 입원해 있는 병원이 떠나갈 듯 자동차 경적을 울리며 기뻐했다. 병실 밖에서 대기하다가 아들을 낳았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김정일은 이내 자동차를 몰아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의 집으로 찾아가 “금방 혜림이가 아들을 낳았어”라며 기쁨에 겨워했다. 정남이 네 살 때 ‘쉬’하고 싶다고 하자 김정일이 내의 바람으로 우유병을 들고 오줌을 받아냈다.(김정일 처조카 이한영 수기, <김정일 로얄패밀리>)

김정일은 북한 방문객들을 매혹하는 공식 행사를 주재하는 것보다 그들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을 훨씬 선호했다. 성혜림의 조카로서 김정일의 딸로 비공식 입양되어 김정남과 스위스 국제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이남옥에 따르면, 김정일은 방문객들을 지휘했으나 그들을 지켜보는 것을 눈물이 날 정도로 지겨워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방문자에게, “저것들은 모두 가짜입니다. 짐짓 그런 척하는 것뿐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김일성처럼 김정일도 방문자들 위한 행사를 멈추지는 않았다.

새벽까지 일하고 늦은 아침까지 자는 스탈린의 시간표를 준수한다는 면에서 김정일은 스탈린주의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아버지 김일성이 준수했던 시간표와 동일하며,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지켰던 시간표와도 같다. 우리들이 자고 있을 때 최고책임자들은 필사적으로 그들의 조용한 시간을 붙잡고 관리하고 있다. 김정일은 그들 중 어느 누구보다 더욱 그러하다.

'아첨꾼 관료'들에게 둘러싸여

김정일은 파티를 좋아한다. 그런데 20, 30명 정도의 소규모 파티를 좋아하고, 맥주와 인삼주 그리고 케이스로 직접 수입해 온 프랑스산 코냑(마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기 위한 것)을 즐겨 권한다. 그러나 이남옥에 따르면, 김정일 본인은 음주를 절제했다고 한다. 그는 수년 동안 골초였지만(주로 미국산이나 일본산 담배를 피움), 최근에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담배를 끊었고, 인민군 참모들에게도 금연을 지시했다. 이것은 분명 사람들이 가장 증오했던 명령 중 하나였을 것이다. 2005년 5월 중국을 방문한 김정일 위원장을 접촉한 후 중국 외교부의 탕자쉬안(唐家璇) 부장은 “김위원장이 과거 술과 담배를 많이 했으나 이제 담배는 끊었고 술은 조금한다”라고 밝혔다.

 

김정일은 파티 도중 간부들이 술에 취하면 자기만 몰래 빠져 나와 팩시밀리로 들어온 보고서를 새벽 3~4시까지 검토한다.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새벽에도 해당 부서에 직접 전화한다. 새벽까지 근무하다가 김정일의 전화를 받고 답변을 잘한 바람에 갑자기 부부장(차관급)으로 승진되어 덴마크 대사로 나간 외교부 과장도 있다. 보고서 중 체제 도전과 관련한 사항은 최우선 검토 대상이다. 김정일은 보고서가 좋으면 표지에 ‘잘되었음’ ‘동의함’이라고 쓰고 밑에 이름과 날짜를 표기한다. 황장엽 전 비서에 따르면, 날짜만 쓴 것은 ‘참고로 보았다’는 뜻이다.

이남옥에 따르면, 김정일은 그녀가 아는 누구보다도 지성적이고 예민하다. 김정일은 사람의 취향에서부터 억양과 나쁜 습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주목하고 지적해낸다. 김정일은 또한 그런 것을 놀라울 정도로 흉내 낸다. 집에서 그는 즐겨 웃으며, 특히 궁전 직원들의 결점을 가지고 농담을 한다. 김정일은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믿으며, 대부분 자신이 그 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문제란 김정일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만 전달하는 아첨꾼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관료들은 그에게 나쁜 소식을 감추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김정일의 주변에는 그의 모든 변덕에 맞추어가며 음식을 나르는 하인들은 있지만 그에게 진실을 말할 사람은 거의 없다.

김정일은 성격이 급해 화가 치밀면 억누르지 못한다. 이런 그의 분노는 나쁜 소식을 그에게 전달하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다. 이남옥에 따르면, 김정일은 무엇보다도 그녀의 정직성을 높이 샀고, 그에게 직언해줄 사람들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김정일은 엄격한 위계질서에 입각한 폐쇄적 체제를 통솔하고 있다. 그 체제에는 과거 20~30년 동안 쇠락해가는 ‘부족함의 경제(shortage economy)’에서 상대적인 특권 유지를 추구하는 각각의 구분된 계층들이 존재하고 있다.

찰스 버클리 좋아하는 미 NBA 팬

‘아메리칸 드림’과 미국의 대중 문화는 심지어 그것을 비판하는 적들마저도 사로잡을 만큼 흡인력을 갖고 있다. 김정일은 장남이자 한때 후계자로 고려되었던 김정남을 미국 하버드 대학에 보내기로 여러 번 약속했다. 김정일은 유리창에 선팅을 하고 무장이 된 검정색 메르세데스벤츠 S600에 자신과 가족을 태우고 온 나라(대개는 평양 근교의 짧은 여행이었지만)를 두루 다녔다. 물론 모두들 그 차에 누가 탔는지 알아차리고 곧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린다. 김정일은 세계 최고의 비포장 도로용 자동차인 메르세데스 겔랑트바겐을 타고 산에서 사냥하기를 즐긴다.

 

김정일은 모든 종류의 영화를 좋아한다. 사담 후세인과 그의 측근들처럼 김정일도 할리우드 영화를 자주 본다. 특히 액션 영화를 선호해서 실베스타 스탤론의 람보 시리즈는 두고두고 보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김정일 때문에 모든 북한 주민들에게 인기가 있는 영화이다)를 비롯해 007 시리즈를 전부 좋아하는데, 최신편만큼은 예외다. 007영화 최신 편인 <007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에서 본드는 북한을 지옥으로 풍자하면서 그의 호색한다운 모험으로 절의 신성을 모독한다.

김정일 전용 특급 열차는 명령만 내리면 즉각 할리우드 영화를 상영한다. 열차 안에는 벽걸이형 평면 텔레비전 모니터가 있어서 CNN을 시청한느가 하면 끊임없이 인터넷 서핑을 한다. 잘못된 시대의 잘못된 국가를 승계한 최초의 변절자인 김정일은 2001년 8월 광활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여행하다가 러시아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잘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산주의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김정일은 농구에 대한 관심이 크다. 평양 언론은 “김정일 장군이 수차례에 걸쳐 우리의 농구 발전 실태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귀중한 교훈을 주었다. 농구 경기를 많이 하면 동작이 민첩해지고 키가 커진다”라며 청소년들에게 농구를 보급하도록 지시한 배경을 소개했다. 1998년 5월 미국의 대학 농구팀이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해 북한팀과 친선 경기를 했고, 다음해에는 서울과 평양에서 통일농구대회가 열렸다.

김정일이 농구광이 된 것은 아들 김정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NBA 농구 경기는 위성 방송을 통해 빼놓지 않고 본다고 한다. 아사히신분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은 NBA 선수 중 찰스 바클리를 좋아하고 아들 정철은 마이클 조던을 좋아한다. 과거 장신 농구 선수 이명훈이 북한에서 스타 대접을 받으며 미국 NBA 진출 가능성을 노크했던 것도 김정일의 NBA에 대한 깊은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2004년 6월14일 오후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은 전날 MBC TV를 보았다고 언급했다. 김정일은 이 날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 도중 “어젯밤에 MBC 텔레비전을 보니까 실향민과 탈북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이번 기회에 고향 소식이 전달될 수 있지 않나 하면서 속을 태우더라”고 말해 남한 방송을 시청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는 또한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장관과 박재규 전 통일부장관에게 “TV에서 많이 봐서 잘 알고 있다”라고 자연스럽게 농담 아닌 농담을 건네 분위기를 연출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김정일의 발언은 TV를 통해 남한 소식을 많이 접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김정일과 주변 관료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처럼 최고 안보기관에는 오직 친지들만을 기용한다. 수도 안보를 담당하고 있는 여러 최고 사령관들은 김정일의 네 처남들이 관리하는 조직에 속해 있다. 첫째 처남은 평양 수비군의 책임자이다.

김정일은 북한의 경직된 관료제와 불화 중이다. 1996년 김정일은 굶주린 인민들이 곡식을 구걸하고,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시골로 가는 기차에 타는 등 매우 불안한 거리 모습에 대해 최고 관료들에게 직접적으로 경고했다. “가슴 아픈 사건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책임자들(공무원들)은...사람들에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 관료들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국민을 탄압하고 있다. 어떤 공무원도 나를 효율적으로 도와주지 않는다. 나는 혼자서 일하고 있다”라고 불평했다.

게다가 그에게는 여전히 투쟁해야 할 게릴라 출신 연장자들이 있다. 김정일이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자신의 등장을 알리는 모임을 개최했을 때 새로운 당 중앙위원회와 정치국원도 선출되었다. 당 중앙위원회 내에 옛 만주 항일 게릴라 28명이 있었고, 그들 중 12명이 정치국의 대다수를 구성했다. 그 이후 당대회는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통치력 전환기에도 최고 지도부는 아무 변화 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왔다(실제로 1970년 제5차 당대회 이후 거의 변하지 않았다). 최고층의 변화는 마지막 항일 세력들의 사망으로 인해 축소된 것뿐이다. 대체로 김일성의 보호를 받은 게릴라들의 자식들과 고아들은 김정일의 친척들로 구성된 내부 핵심층과 함께 최고 엘리트로 성장했다.

1997년 당시 북한 최고위급 지도자 40명은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60세 이상이었다. 유일한 60세 이하가 바로 김정일이었다.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의 권력 승계가 정식으로 발표되면서 김정일은 북한 최고위층으로부터 모성적인 후견 이상의 지지를 받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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