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풍에 맞서며 사투 벌였건만…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5.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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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소방항공대 ‘화마 진압’ 30시간

 

화마(火魔)가 춤을 추며 숲을 삼켰다. 돌풍을 탄 불꽃은 100m 넘게 날았다. 슬금슬금 능선을 타고 오르던 불길은 바람을 만나면 한바탕 광란의 춤을 추어댔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하늘에서 헬기가 부지런히 물을 퍼부어 산불의 힘을 뺄 수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급파된 소방 헬기를 지휘한 강원소방항공대가 ‘산불과의 전쟁’을 치른 30여 시간을 들여다보았다. 강원도 양양에 위치한 강원소방항공대는 전국의 소방항공대 가운데 가장 위험한 곳이다. 이 곳은 소방항공대원 사이에서 가장 기피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2000년에는 이번 양양 산불의 7배 규모에 달하는 대형 산불이 강릉 일대를 휩쓸었다. 2002년에는 태풍 루사, 2003년에는 태풍 매미, 2004년에는 폭설 등 영동지방은 대형 자연 재해가 끊이지 않았다.

강원 소방항공대 대원들에게 비상 소집 명령이 내려진 것은 지난 4월5일 새벽 3시30분. 새벽 4시, 소방항공대장을 비롯해 조종사 3명, 정비사 2명, 구조대원 4명, 의무소방원 2명 등 부대원 전원이 달려나왔다. 각 지역에서 파견된 소방 헬기와 산림청 헬기를 양양 집결지로 인도하는 것이 소방항공대의 첫 번째 임무. 김광수 강원소방항공대장은 “헬기가 변화 무쌍한 바람을 뚫고 백두대간을 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4~5월 산맥을 타고 넘는 상승풍과 하강풍이 뒤섞이는 데다 방향도 일정치 않아 세심하게 인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부대는 5시부터 헬기 점검을 시작해, 날이 밝자마자 헬기를 띄웠다. 산림청 산불 헬기와 다른 지역에서 급파된 소방 헬기 10여 대가 물을 뿌려대자 산불은 점차 잦아들었다. 산불이 거의 잡힌 낮 12시쯤 산림청 헬기 8대 가운데 3대가 불이 번지던 고성 명파리 쪽으로 급파되었다. 나머지 헬기는 양양에서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오후 2시쯤 정리되지 않은 잔불이 되살아나 초속 20m의 강풍을 타고 다시 번져나갔다.

“바람 속 헬기는 강물의 낙엽”

 

소방항공대가 보유한 AS365NS 기종(일명 더팽)은 중형 헬기여서 대형 헬기에 비해 바람에 약하다. 바람이 초속 20m 속도로 불면 이 헬기는 40m나 뒤로 밀린다고 한다. 헬기는 초속 15m를 넘으면 안전규정상 비행할 수 없다. 김종수 기장은 “바람이 불면 목숨을 내놓고 헬기에 오르는 심정이 된다. 바람 속 헬기는 장마철 불어난 강물에 떠내려가는 낙엽 처지가 된다”라고 말했다.

산불은 1천3백년 고찰 낙산사를 노렸다. “낙산사 보물이 타고 있다”라는 다급한 무전이 들렸다. 하지만 바람 때문에 이륙이 불가능했다. 이때 바람의 최대 순간 속도는 초속 32m. 게다가 치솟은 연기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아 헬기 운행은 불가능했다. 잠시 이륙했던 군과 소방본부의 대형 헬기도 몸체를 가누지 못해 진화를 포기해야 했다.

1시간 뒤 어느 정도 시야가 트였다. 이때도 기상 상황은 심각했지만 위급한데 헬기의 안전만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초속 20m가 넘는 바람을 뚫고 강원소방항공대의 헬기가 이륙했다. 이규훈 기장은 “바람이 워낙 거세 헬기는 통제 불가능한 상황 직전이었다. 낙산사가 불타는 상황이어서 목숨을 걸고 헬기를 띄웠다”라고 말했다.

 
강원소방항공대 헬기는 한 번에 물 1만ℓ를 뿌릴 수 있는 S-64E 헬기(일명 에어크레인)와 산림청의 주력 헬기인 KA-32T(일명 까무프)와 함께 낙산사를 덮친 화마에 ‘물 폭탄’을 퍼부었다. 겨우 낙산사의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이기장은 “바람이 심해 조종간을 잡고 있기조차 힘들었다. 연기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현장에 다가가면 기체에 열기가 그대로 전해져 아찔했다”라고 말했다.

어두워지자 모든 헬기는 발이 묶였다. 밤에는 시계가 확보되지 않아 헬기가 물을 담는 데 어려움이 있다. 전깃줄 등 장애물을 식별할 수 없어 헬기의 야간 진화는 불가능하다. 모든 산림용 헬기와 부대원이 잠시 쉬기로 했다. 하지만 강원소방항공대는 응급 환자 등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전원 비상 대기했다. 문흥규 소방경은 “소방항공대 헬기는 화재가 벌어지는 와중에 구조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다른 헬기에 비해 서너배는 더 어려운 임무다”라고 말했다.  

풍향 바뀌었으면 설악산 덮칠 뻔

어둠을 타고 양양 물갑리 일대에서는 도깨비불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소방차를 동원해 저지선에 물을 뿌렸다. 하지만 휴대용 손전등과 갈퀴 그리고 휴대용 펌프를 등에 지고서 산불에 맞설 수는 없었다. 헬기가 뜨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불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바람의 기세가 누그러져 불길의 번짐은 느려져 있었다. 만약 바람 방향이 바뀌어 바다에서 내륙 쪽으로 바람이 불었다거나 전날 같은 광풍이 휘몰아쳤다면 산불은 설악산을 덮칠 뻔했다.

 
4월6일 새벽 5시40분 첫 비행에 나섰다. 양양에 집결한 헬기 38대가 총출동했다. 육지에서는 군인 8천1백11명, 경찰 1천5백명 등 총 1만2천여 명이 투입되어 불길을 잡았다. 오전 10시가 되자 불이 완전히 잡혔다. 이틀간 산불과의 전쟁을 마친 산림청 소속 헬기 26대와 민간 헬기 3대는 귀대하거나 쉬었다. 하지만 강원소방항공대 소속 헬기를 비롯한 소방 헬기는 2대씩 교대로 잔불 정리와 공중 감시에 나섰다. 오후 5시께 빗방울이 보였다. 그제서야 강원소방항공대는 공중 감시를 정리하고 지상 감시 체제로 돌아섰다.

이튿날 오후가 되어서야 강원소방항공대는 24시간 2교대하는 평시 체제로 돌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오후 4시30분 강원도 고성 비무장지대 부근에 산불이 되살아난다는 보고를 받고 소방 헬기가 다시 이륙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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