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천수이볜과 동북아 미래 논하다
  • 도올 김용옥 ()
  • 승인 2005.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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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이 타이완에 다녀왔다. 천수이볜 총통을 비롯 정계·문화계 유명인사들을 두루 만난 도올의 타이완 탐방기 ‘문독왕대록’을 2회에 나눠 싣는다. ‘행동으로 역사를 쓴다’는 타

 
한국의 사상가 도올 김용옥은 지난 3월24일부터 4월1일까지 9일간 대만행정원 문화건설위원회(문광부), 중화전시(中華TV), 대만문필회(펜클럽), 대만교수협회의 공동초청으로 대만을 방문, 츠언쉐이삐엔(천수이볜·陳水扁) 총통, 리떵후에이(李登輝) 전 총통, 시에츠앙팅(謝長廷) 행정원원장(총리), 츠언치난(陳其南) 주위(장관), 예스타오(葉石濤), 쩡꿰이하이(曾貴海), 스밍(史明) 등 정치계·문화계의 대표적 인물들을 모두 만나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8월 EBS에서 방영될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 10부작> 다큐멘타리의 중국측 자료를 얻음과 동시에 일제 식민 시대를 겪은 대만의 현지 상황에 대한 생생한 르포 성격을 띤 여정이었지만, 도올은 원주민 문화로부터 현 대만의 정치적 정황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대만 역사를 깊게 체험했다. 본지는 아시아 정세 전반에 관해 중요한 통찰과 새로운 사실로 가득찬 도올의 <문독왕대록>(問獨往台錄)을 2회에 나누어 싣는다. 문독왕대록이란 “독립을 탐문하러 대만에 간 기록”이란 뜻이다.

이번 주에는 츠언쉐이삐엔 총통과의 대담을, 다음 주에는 리떵후에이 전 총통과의 대담을 중심으로 싣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외래(국)어 표기는 도올 문장의 원칙을 존중하여 씨케이시스템을 따랐다. ― 편집자 주 ―

4월은 잔인한 달이라 했다. 차라리 겨울이 더 포근하다 했다. 보리고개 때문일까? 새싹의 움틈이 너무 버겁기 때문일까? 4월은 분명 혁명의 달이다. 기나긴 겨울의 냉혹함이 조각나 버리는 보습의 뒤엎음, 감당키 어려운 인습의 파괴, 새싹의 예리함이 푸릇푸릇 창공의 바람을 가른다. 빼앗긴 들에도 분명 봄은 오고 있었다. 나는 지난 주 대만에 있었다.

대만! 대만이라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대만은 중화의 중(中)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재 의식 속에는 대만은 비존재다. 멀리, 너무도 멀리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과연 대만이 그렇게도 허무하게 사라져버릴 수 있을까? 영원히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 그것은 중국의 과거가 아닌 중국의 미래! 대만이 국제 정치 역학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과소 평가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존재는 한반도의 미래와 너무도 밀접하게 엮여 있는 것이다. 세상은 넓다. 시야를 넓게 봐야 한다. 검푸른 하늘을 배회하는 독수리의 눈에는 6마일 내의 지렁이의 꿈틀거림까지 다 보인다. 이 세계는 하나의 유기체! 지구 어느 구석의 움직임도 우리와 무관한 것은 없다. 하물며 대만이랴!

인간의 역사란 전쟁을 먹고 사는 레바이아탄! 미국은 2차 대전을 겪고 나면서 이 역사라는 괴물을 어떻게 요리해 먹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소련이라는 픽션을 만들었다. 냉전이라는 차거운 요리를 고안해낸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끔찍한 핫쏘스, 그 비극을 연출했다. 2차 대전 후의 냉전 구도는 실제로 한국전쟁을 축으로 해서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소련이 붕괴되었다. 더 이상 미·소 냉전 구도가 유지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대결이 없이는 그들의 제국주의적 모든 체제를 유지할 기력이 없다. 군사적 우위(military supremacy)를 계속 유지할 명분도 없어진다. 또 하나의 가상 적을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이때 등장한 것이 중국! 문화혁명으로 졸라매었던 허리띠를 풀고 급격히 자본주의적 팽창으로 선회했다. 똥배가 부를대로 부른 듯이 보이는 중국을 그들은 무서운 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미국의 대중 전략은 중국이 자본주의화를 진전시키는 동시에 어떻게 중국을 무력으로 제압하는가 하는 매우 모순적인 과제 상황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키우면서 동시에 잡아먹을 궁리를 하는 것이다. 미국뿐 아니라 일본·유럽에게도 똑같은 과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견제라는 21세기적 과제 상황에 거대한 돌풍을 일으킨 사나이가 있었다. 바로 중국이라는 거인의 코밑에서! 그가 바로 츠언쉐이삐엔(陳水扁)! 그의 존재는 21세기의 세계 판도를 다시 짜게 만들었다. 중국의 견제가 바로 중화의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 모든 열강의 이해 관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 한반도의 미래는 바로 이러한 연결고리 속에서 어떻게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우리 생존의 판을 짜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 위해 투쟁한 고독한 의인, 조명하

 
조명하(趙明河)! 그는 1905년생이다. 황해도 송화군 하리면 장천리(松禾郡下里面長泉里)에서 꼿꼿한 선비 조용우(趙鏞禹)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치열하게 배웠다. 그리고 동향 선열들의 의로운 삶을 흠모했다. 안중근은 신천(信川)사람이요, 김구는 해주(海州), 노백린(盧伯麟)은 은율(殷栗)사람이다. 조명하는 약관 22세로 판임관 후보로 등용되어 신천군청에 근무하게 되었다. 출세의 가도를 달릴 수 있는 머리 좋은 걸출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6·10 만세운동을 경험하면서 그의 가슴엔 의혈의 피가 솟구쳤다. 송학선(宋學先) 의사의 사이토오 총독 처단을 위한 금호문(金虎門) 의거, 의열단원 나석주(羅錫疇)의 동척 투탄 폭파, 연이은 의거는 조국 광복을 위한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었다. 20세에 결혼한 부인이 친정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모친과 처가를 가던 중, 바로 부인과 첫아들이 쌕쌕거리는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그 앞에서 모친에게 하직 인사를 했다.
“아니, 여기까지 왔는데 처가에 가서 네 처도 만나보고 아들도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아닙니다, 어머니. 저는 떠나야 합니다.”

첫 혈육과 사랑하는 아내를 왜 보고 싶지 않으랴마는 보는 순간 조국 광복을 위한 사나이의 기개가 흐려질 수도 있다는 것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조명하는 그 길로 대한해협을 건넜다. 오오사카에 정착했다. 공장과 상점을 전전하면서 선진 학문을 익히며 거사의 기회를 엿보았다. 마땅한 기회가 오지 않자, 상해 임정으로 가려했다. 그 목적으로 그는 먼저 대만행을 결심했다. 그곳에서는 일인 행세가 더 쉬워 거사의 기회를 포착할 수도 있겠다는 심산이 있었다. 그는 타이쫑(台中)의 일인 차포(茶?)에 취직했다.

대만에서 자행되는 일제의 수탈과 행패를 목격하면서 그는 조선 땅에서 고통받고 있는 동포들을 생각했다. 그는 대만의 야마카미(山上) 총독을 처단하리라 결심하고 차포를 드나드는 대만인 친구 장티엔띠(張天弟)로부터 보검도를 구입, 고독하게 숲속에서 검술을 연마했다. 검에는 항상 독극물을 발라 유사시에 언제고 결정적으로 적 괴수를 자격할 수 있는 기술을 연마했다. 숫돌에 항상 칼을 갈았고 천지신명께 의혈을 뿌릴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런데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은 중국 대륙 침략을 위해 산동성을 공격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대만은 그 전진 기지로서 매우 중요했다. 주대만 일군을 검열하기 위해 육군대장 쿠니노미야(久邇宮邦彦王)가 대만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바로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장인이었다. 조명하는 상해에 가더라도 이보다 더 큰 괴수를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키로 결심했다. 그의 공개 환영식 행로에 관한 정보는 신문을 통해 쉽게 입수할 수 있었다.

 
1928년 5월14일! 쿠니노미야는 타이쫑 주지사 관저를 출발 타이쫑 역으로 향했다. 10시 기차로 타이뻬이(台北)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가 탄 무개차가 현 민취앤루(民權路)를 지나 쯔여우루(自由路) 2단(二段)으로 좌회전하는 순간! 9시55분!
“당시 타이세이쵸오(大正町) 대로에 동원된 사람들은 상당수가 초등학교 학생들이었고, 황족이 지나갈 때는 감히 얼굴을 들고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지요. 그것은 순식간에 번개같이 스쳐간 일이었어요. 그러나 입에서 입으로 소문은 널리 퍼졌지요.”

현재 쯔여우루 2단의 코너에는 당시 주립도서관이었던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는 대만합작금고은행 건물로 쓰이고 있다. 그 도서관 앞 나무 뒤에 조명하는 독극물을 바른 칼을 품고 숨어 있었다. 무개차가 코너를 도는 순간 속도가 늦추어진다는 사실을 계산했던 것이다. 그는 유용유모(有勇有謀)의 인간이었다. 조명하는 비호같이 몸을 날려 쿠니노미야 육군대장의 목을 힘차게 찔렀다. 그러나 쿠니노미야는 날렵하게 몸을 피했다. 그러나 조명하의 칼날은 왼쪽 목기슬을 가르고 운전사의 바른쪽 손등을 찔렀다. 조명하는 순간 칼을 들어 다시 목을 치려하였으나 까마귀처럼 몰려온 시종무관에 의해 저지되었고 차에서 떨어졌다. 차는 속력을 내었고 조명하는 마지막으로 쿠니노미야의 심장을 향해 칼을 던졌으나 미치지 못했다.

조명하는 놀란 군중을 향해 흔연히 웃음지으며 외쳤다.
“그대들은 놀라지 말라! 나는 조국 대한을 위해 복수했을 뿐이다. 대한민국 만세!”
1928년 10월10일 오전 10시12분, 타이뻬이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대한독립 만세!”
24세의 꽃다운 나이었다. 부친 조용우는 나중에야 그 소식을 듣고 슬퍼하는 기색없이 말했다.

“사나이 대장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죽었다.”
쿠니노미야는 3개월 후 1929년 1월27일 새벽 0시29분 57세로 사망했다. 조명하의 비수의 독이 온몸에 퍼져 결국 복막염으로 죽은 것이다. 조명하의 의거는 배후 인물이나 조직이 없는 완벽한 단독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윤봉길의 상해 홍커우(虹口) 공원의 의거를 4년이나 앞선 것이다.

 
그러나 조명하의 의거는 일제가 철저히 보도를 통제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2005년 3월25일, 바로 조명하가 이 세상에 태어난지 꼭 100년 만에 바로 그의 의혈의 현장을 더듬었다. EBS 다큐멘타리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 10부작>을 찍기 위해서였다. 연출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끓는 조명하의 심장으로 뛰어들었다. 조명하는 고독한 의인이었다. 아삐엔(阿扁)도 고독하다. 조명하나 아삐엔이나 모두 독립을 위해서, 자존을 위해서,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바로 이날 오후 5시 타이뻬이 대만총통부에서 아삐엔, 그러니까 현 대만의 지도자 츠언쉐이삐엔(陳水扁) 총통을 만났다. 구면이었다. 문화일보 기자 시절에 그를 만나 그와 대만에 관해 대서특필을 한 적이 있다.
“오늘 아침 까오시옹(高雄) 시정부에서 주최하는 시가절(詩歌節)에서 대만 문학의 대가인 예스타오(葉石濤)를 만났다. 그도 돌대가리(石頭)인데 오후에는 세계적인 돌대가리 도올(??)을 만나게 되니까 너무도 즐겁다. 지난 번에 그대가 나를 방문해서 총통 재선에 꼭 성공한다고 예언하니깐 나의 상대인 리엔잔(連戰)이 한국에서 온 중(和尙) 얘기에 흥분하지 말라고 비꼬았다. 한국의 사대부 복장과 스님옷도 구분 못하고, 더구나 세계적인 사상 대가의 예지도 변별 못하니 참 딱한 노릇이다. 눈이 있어도 태산을 못 본다(有眼不識泰山)는 얘기가 있지 않은가? 선거 전날의 총격 사건까지 그대는 예언했나?”

이긴다고 한 것은 살아남는다는 얘기니까 물론 그대가 모든 역경을 무난히 넘기리라고 예언한 것이다.
“그대의 예언은 나에게 큰 격려가 되어 비운을 피할 수 있었다(逃過一劫). 우리가 살아 만난 것이 모두 역사의 행운이다.”

중국철학 전공자로서 과거 유학 시절에는 결국 형이상학적 세계 속에서만 헤엄쳤던 것 같다. 그런데 요번에 와보고 비로소 대만이라는 형이하학을 절실히 감지했다. 대만인 문화, 커지아(客家) 문화, 원주민 문화를 공부하면서 대만의 문제는 그 본질에 있어서는 정치적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기를 알고 싶어하고 자기로서 살고 싶은 욕망은 너무도 본질적인 인간의 욕구가 아닐까?
 
“국민당 시절에는 원주민도 9개 족이라 했는데 내가 집권하고 나서 12개 족이 되었다. 관심을 가지니깐 3개 족이 더 발견된 것이다. 대만 최초의 문화는 원주민 문화다. 원주민 문화가 없다면 대만 문화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대만 문화는 원주민 문화로부터 시작하여 몇 천 년을 누적하면서 다원화된 것이다. 우리가 만나고 있는 이 뤼팅(綠廳)도 모두 원주민과 이 땅의 토템과 부호들로 장식되어 있다. 물을 마실 때는 근원을 생각해야 한다(飮水思源). 뿌리를 잊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不能忘本).”

대만의 아이덴티티를 추구하려는 그대의 노력을 나는 잘 이해한다. 그런데 우리 노무현 대통령은 역경을 이용하여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다수 의석을 확보했다. 그런데 지난 입법위원 선거에서 민진당은 다수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따라서 그대의 모든 노력이 약화되었다는 느낌이 있다. 과연 어떻게 대처할 생각인가? 아이덴티티 문제를 계속 밀고 나갈 실력이 있는가?
“족군(族群)은 다원(多元)이지만, 국가(國家)는 일체(一體)다. 원주민, 커지아인, 민난인(?南人), 허루어인(河洛人), 그리고 최근 10여 년간 대륙에서 이주해온 신부·신랑까지, 모두 이 땅에 당도한 다양한 사람들로서 먼저 왔냐 늦게 왔냐(先來後到)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당연히 지녀야 할 것은 이 땅, 이 토지에 대한 감정이다. 이들은 모두 이 땅의 사람들인 것이다.

국호가 중화민국(中華民國)이냐 대만공화국(臺灣共和國)이냐 하는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 땅에 대한 인동(認同=중국말로 아이덴티티, 정체성에 해당)만이 중요한 것이다. 국호란 하나의 부호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 땅에 대한 감정·애착이 있는가? 이 땅과 일체감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정체성인 것이다. 대만공화국, 중화민국에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의 국가 공동체라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공동체라는 신념이 깃들면 족군(族群) 즉 성적(省籍)이나 인종의 문제까지도 사라진다. 이 땅에 대한 아이덴티티만 남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서민들은 구체적으로 대륙의 침공 가능성을 두려워 하고 있다. 그런 추상적 논리로 설득 가능할까?
“바로 내일 있을 100만 명 가두 시위 현장을 보라! 우리의 구호는 민주(民主)와 평화(和平)로서 대만을 수호한다는 것이다. 2300만의 인민이야 말로 대만의 주인이다. 그들은 제각기 다른 이해관계와 생활 패턴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에게 오버랩되는 하나의 공약수가 있다. 그것은 바로 민주와 평화에 대한 갈망(熱愛)인 것이다. 전세계에 우리의 결심·의지·단결을 보여줄 것이다.”

 
다음날 3월26일 총통부 앞 광장에는 100만 이상의 군중이 운집했다. 대만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중국의 ‘반분열국가법’ 통과로 촉발된 시위였다. 월드컵 때 시청 앞에 군집한 붉은악마 시위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분명했다. 결코 동원으로서는 해결될 수 없는 인파였다. 대만 인민은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타이뻬이 시장 마잉지우(馬英九)는 27만5천명이 모였을 뿐이라고 빈정대어 참가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그리고 국민당의 부주석 지앙삥쿤(江丙坤)과 몇몇 측근들은 대륙에서 환대를 받으며 시위를 했다. 중국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좀 재미있는 께임을 즐기는 것 같다. 3차 국공합작(國共合作)? 글쎄, 합작의 파트너로서의 국(國民黨)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그들 모두가 남북이 두절된 우리보다는 더 여유로운 께임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츠언 총통 그대는 결코 대결과 갈등과 전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것임이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대륙은 그러한 정책 노선을 그대의 소망대로 이해하지 않는다. 과연 어떻게 그들을 설득할 것인가?
“민주·평화라는 것은 보세가치(普世價値, universal value)이다. 그것은 인민의 공통적 언어요, 이익이요, 삶이다. 사해에 풀어놓아도(放諸四海) 그것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가치다. 대륙에서도 비평화·비민주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지도자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13억 인구의 절대 다수가 민주와 평화를 갈망한다.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대륙 인민의 마음이나 대만 인민의 마음이나 똑같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극소수의 생각 때문에 절대 다수의 갈망을 말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정확한 역사의 일변에 우뚝 서 있기 때문이다.”

유가의 인(仁)이나 불가의 해탈이나 도가의 도(道)나 모두 평등한 인간의 존엄을 말하며 평화를 말한다. 중국 문화의 모든 가치가 이러할진대, 대만은 결코 중국의 과거가 아닌 중국의 미래다. 그 미래적 가치를 과거로 퇴행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만은 그 존립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더욱이 네오콘과의 관계가 깊다. 그러나 미국내의 네오콘의 입장도 일관될 수 없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그대의 입장을 말해달라.
“그대와 나의 정치적 입장을 세론할 수는 없다. 정치적 상황은 항상 변수가 있게 마련이니까. 유교의 관서(寬恕), 기독교의 박애(博愛), 불교의 자비(慈悲), 도교의 무위(無爲), 이 모든 것이 평화 정신이다. 인류 역사의 모든 약진은 평화를 향한 것이다. 그런데 평화의 뿌리는 민주다. 민주가 없으면 평화가 없는 것이다. 지난 3월14일 중국전국인민대회에서 3천명에 가까운 대표가 단 한 사람의 반대도 없이 ‘반분열국가법’을 통과시켰다. 도대체 이 지구상 어느 민주 국가에서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할 수 있다는 법안을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이 통과시킬 수가 있겠는가? 인간세에는 반드시 다원적 의견이 있게 마련이요, 제2의 목소리가 있게 마련이다. 민주주의란 자유 선택의 권리이며 타인, 타국의 존립에 대한 존중이다. 대만 문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비평화적 수단으로 해결될 수 없다.”

  요즈음 오히려 일본의 태도가 조급해지고 있다. 대만 문제에 관심이 높다.
“지난 2월19일 와싱톤 D.C.에서 미국과 일본의 총리와 외무장관이 참석한 안보자문회의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50년 이래 사상 처음으로 대만 잇슈를 공식적으로 포함시켰다. 대만은 미국과 일본 공동의 전략 목표라는 것이다. 그리고 양안(兩岸) 문제는 대화와 평화의 수단을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촉구했다.

이에 대한 나의 의견은 민주와 평화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다. 모든 나라의 존립의 고유한 논리를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힘들더라도 평화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일본이 특별히 대만 해협의 안전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결국 미국과 마찬가지로 민주·평화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국과 일본은 자유·민주·평화라는 보세가치(普世價値)가 있는 나라가 아니겠는가?
지난 2월 하순 때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EU 국가들에게 중국에 무기를 팔지 말 것을 권유·설득한 것도 평화의 가치를 손상하는 글로벌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중국은 얼마든지 무기를 사용하여 비평화적 수단과 명분으로 민주 국가를 공격할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민주 의식이 미성숙한 중국에 무기를 파는 것은 대만 침략을 고무한다는 얘기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것은 일본과 미국의 안보와 직접 연결된다. 그리고 전세계의 민주·평화의 보편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다. 중국은 의기양양하게 ‘반분열국가법’을 통과시켰지만 그것이 오히려 우리 대만 인민에게 힘을 주고, 나의 정치적 역량을 강화시키며, 전세계에 중국이 인류사의 착오적인 일변에 서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꼴밖에는 안된다.”

중국도 무기를 구입하려고 애쓰지만 대만도 무기를 구하려고 애쓰고 있다. 현재 대만의 군사력은 구체적으로 중국의 침공을 감당해낼 수 있나? 밸란스를 취할 만큼 군사력을 갖추고 있는가?
“우리의 최대 목표는 대만이라는 역사 속의 민주화의 성과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그 이외의 무력적 관심을 갖지 않는다. 진정한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체 방위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비전(備戰)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쟁을 억제하고(避戰), 전쟁을 없애기 위한 것(止戰)이다. 대만은 효과있는 혁저(?阻)만을 생각하고 있는데 중국은 군비(軍備)·군력(軍力)·군비(軍費)를 다 증강시키고 있다. 올해도 국방 예산을 12% 증강시켰으며, 강서·절강·복건·광동 동남 연해 지방에 706매(기?)의 전술 미사일을 배치하고 있다. 이것은 발사 거리가 300~800Km의 것으로 모두 대만을 목표로 한 것이다. 이 숫자는 중·장거리, 대륙간 탄도탄의 전략 미사일을 포함하지 않는다. 대만은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避戰) 능력을 기르지 않으면 투항(投降)할 수밖에 없다. 먹히고 소멸되고 마는 것이다. 한국도 20세기초에 병합(倂呑)의 비극을 처절하게 경험했지 않은가? 중국의 군사력 증강의 궁극적 목표는 미국과 일본에 위협을 가하는 것이다. 중국 해군은 미국의 태평양 도서 체인(Islands Chain) 방위선을 어떻게 돌파하느냐에 혈안이 되고 있다. 중국의 잠수함은 최근 일본 영해에도 들어갔고, 미국 괌도 근처 해역에도 들어갔다. 대만이 무너지면 미·일 안보체계는 끝장나는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이런 얘기를 나에게 해도 이것은 강대국의 군사 께임밖에 되지 않는다. 서로 군비 경쟁을 하면 결국 세계 평화는 깨지고 만다.
“대만의 군사력과 중국의 군사력에 관한 최종적 가치 판단은 민주에 있다. 대만은 민주의 가치를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인류 평화에 중국보다 앞장설 수 있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민주의 가치는 이와 같이 중요한 것이다.”

민주의 가치도 강대국의 편의에 의하여 조작될 수 있다. 세계를 민주와 반민주로 양분하는 논리도 위험하다.
“우리가 말하는 민주는 구호가 아니며 논리적 허구가 아니다. 국민당 압제하의 처절한 삶의 투쟁 속에서 획득한 것이다. 그것은 실존적 삶의 절실한 요구다.”

지난 입법위원 선거에서 실패한 원인을 그대는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가? 당신 개인의 반성적 성찰을 말해달라.
“지난해 12월11일 투표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론조사 상으로는 민진당이 과반수를 넘었다. 미국도 그렇게 분석했다. 민진당이 득표를 못한 것이 아니라 의석은 2석이 늘었다. 그러나 대련당(李登輝 계열)과 합해도 과반수에서 12석이 부족한 불만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왜 그런가? 여론조사가 정확치 않은 탓도 있겠지만 첫째는 투표율이 너무 낮았다. 평균 65% 이상의 투표율을 유지했는데 요번 선거는 59%에 그쳤다. 둘째는 3년 전의 선거에 비해 무능하고 공정치 못한 후보자들이 대거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선거 자체의 투명성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선거 결과를 수용해야 한다. 인민의 선택을 존중하고, 야대여소의 정치현실을 직면하며, 야당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

최근 송추위(宋楚瑜·국민당과 연합전선에 있는 친민당 당수)를 만난 성과는?
“여·야는 경쟁 상대일 뿐 아니라 합작 상대이기도 하다. 족군화해(族群和諧)·정국안정(政局安定)·인민복지(人民福祉)·양안화평(兩岸和平). 이 4가지 목표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 자체의 역량을 분산시키면 국력의 약화만 초래된다. 여·야간에 서로 앉아서 대화할 수 없다면 어떻게 양안(兩岸)이 대화할 수 있겠는가? 송추위와의 만남의 성과는 계속 발전중이다. 아직 예측은 시기상조다.”

그대는 개헌을 계속 주장해왔다. 개헌을 아직도 획책하고 있는가?
“개헌은 입법위원 4분의 3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험난한 과정이다. 현행 헌법 안에는 국민투표 조항이 없는데 앞으로 그 조항까지 넣을 계획이다. 그래서 앞으로 개헌은 입법위원 3/4 동의과정뿐 아니라 국민투표의 재확인 절차를 거치게 될 것이다. 사회 조건이 미숙하거나 국민의 컨센서스가 없으면 개헌은 불가하다. 나의 임기내에 개헌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영토의 개편과 통일·독립잇슈 이 두 조항은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츠언 총통은 개헌 문제에 관하여 매우 중요한 양보를 표시했다.

대만의 문제가 어떻게 풀려가는가, 그것이 곧 아시아의 미래를 결정한다. 그만큼 대만의 세계사적 위치는 중요하다. 대만의 미래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는가?
“지금 나는 그러한 거시적 문제에 관해 예언적 확언을 발설할 수는 없다. 단지 양안의 문제가 반드시 민주와 평화의 방식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핵문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그것도 반드시 민주·평화의 방식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6자 회담을 지지한다. 미국이 북핵 문제에 관하여 성급한 회전을 하지 않고 끝까지 민주·평화의 방식으로 북한을 설득하기를 빈다.”

대만 해협의 긴장 관계는 아이러니칼하게도 우리 조선반도에 평화의 기회를 허용하고 있다. 최소한 중국은 대만 문제 때문에라도 한반도의 긴장을 원치 않는다. 두 개의 골치거리(Two Fronts)를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 정세는 대만 문제로 인해 미국·일본·중국 간에 급격한 대립 구도가 형성되어가고 있다. 이때 북한이 중국에만 빌붙어 미·일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매우 현명치 못하다. 대만 정세를 활용하여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주체적 께임을 펼쳐야 하는 것이다. 그 주체적 께임이란 바로 김일성 주석의 주체 철학이 예시하는 역사의 방향이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남북의 화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미국·일본·중국 간의 대립 구도에서 그 갈등에 휘말리지 말고 남북의 평화를 진전시키는 길만이 조선 민족의 항구적인 주체성을 확보하는 길이다. 이러한 평화의 지혜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조선반도는 또 다시 구한말의 비극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대는 이미 헤겔이 말하는 바 세계사적 개인이다. 21세기의 위대한 풍운아가 되었다.
“내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인민이 위대한 것이다. 내가 인민을 각성시킨 것이 아니라, 인민의 각성이 나를 각성시킨 것이다. 민주·평화 정신을 계속 지키면 위대한 인민이고, 그런 인민이 사는 나라는 위대한 나라다.”

대만의 실험은 인류사의 새로운 모험이다.
“끝까지 인민의 자유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EU도 각 나라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존중하면서도 각나라 인민의 결정에 따라 어떤 통합 모델을 만들었다. 아시아도 이런 모델을 배울 수 있다.”

당신과 같이 철저한 민주주의자는 별 인기가 없다. 국민은 항상 강한 리더십(strong leadership)을 원하기 때문이다.
“대만은 이미 권위주의적 독재 시대를 지났다. 지도자의 개인 결정을 대중이 준수하는 시대는 지났다. 민주 사회는 유하이상(由下而上)의 사회다. 일의고행(一意孤行)은 불가능하다. 대만의 역사는 이미 되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오늘 아침 조명하 열사의 의거 행적을 더듬으면서 대만인들의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이 무서운 압제의 최악 조건에서 분투한 독립운동에 비한다면 그래도 행복한 고투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만은 고독하지 않다. 전세계가 지지하고 있다.”

화인(華人)들의 미덕은 원래 ‘만만디(慢慢地)’라는 것이다. 중국이나 대만이나 좀 여유있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불통불독(不統不獨·통합도 안하고 독립도 하지 않는다)의 인테림 어그리먼트(interim agreement:일정 기간의 약속)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미국 학자 리버탈(Kenneth Liberthal)이 제시한 그 안은 참고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최선의 안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 미국이 그런 정책을 추진한다면 참고·검토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소수의 의견이다.”

그대는 일관된 신념과 논리로써 나의 질문에 응답해주었다. 그대의 얼굴에서 나는 놀라운 침착성과 자신감을 읽어냈다. 대만 인민은 좌절치 않고 항상 다시 일어서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나는 행동으로써 역사를 쓰겠다.(我用行動來寫歷史.)”
해가 저물어 땅거미가 깔릴 무렵 나는 총통부 앞광장을 걸어나왔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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