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악물고 희망을 던진다
  • 김홍식 (연합뉴스 메이저 리그 특파원) ()
  • 승인 2005.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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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프로 야구 마이너 리그 한국 선수들의 ‘치열한 삶과 꿈’

 
시애틀 매리너스 유망주 추신수(24)는 어느덧 의젓해진 메이저 리그 스프링캠프 3년차다. 한때 자신의 우상과도 같던 선수들과 같이 샤워를 하고 훈련 뒤 뷔페 식으로 차려진 식사를 하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다. 비록 정규 시즌이 아닌 스프링캠프에서만 메이저 리거 대우를 받지만, 추신수에게 메이저 리그 스프링캠프는 ‘천국’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마이너 리그는 지옥인가. 추신수는 “메이저 리그가 마이너 리그보다 열 배 이상 좋다”라고 말한다. 우선 1주일 식비가 다르다. 마이너 리그에서는 고작해야 100달러(10만원) 남짓. 추신수가 마이너 리그 더블A에 머무를 때 받은 액수다. 그러나 40인 로스터에 포함되어 메이저 리거 스프링캠프에 참가하면 1주일에 열 배 가까이 받는다. 올해 추신수가 1주일 식비로 받는 돈은 9백50 달러(95만원)다.

메이저 리그는 천국, 마이너 리그는 지옥

훈련장에서의 식사도 다르다. 메이저 리그는 언제나 뷔페 식이다. 자기가 알아서 먹고 싶은 것을 골라서 먹을 수 있다. 반면 마이너 리그는 배식 스타일이다.메뉴가 정해져 있고, 혹시 누가 하나라도 더 먹을까 봐 배식 담당이 엄격하게 먹는 양을 조절한다.
메이저 리그에 단 하루라도 머물러 본 선수들이라면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지옥’이 바로 마이너 리그다. 한때 박찬호(32·텍사스 레인저스)의 성공에 고무되어 미국 프로 야구는 그야말로 국내 선수들에게 꿈의 무대로 다가왔다. 통하지 않을 것이라던 사이드암 김병현(26·보스턴 레드삭스)마저 금세 메이저 리그 정상급 마무리 투수로 자리 잡고 나니 노다지 광산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광풍이 사라진 후 이성을 되찾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메이저 리그 진출은 프로 팀과 계약한다고 해서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메이저 리그에 앞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마이너 리그에서 살아 남아야 하고, 그것이 메이저 리그에서 살아 남기보다 더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우선 돈 문제가 가장 큰 일이다. 지난해 더블A의 잘 나가는 스타 플레이어였던 추신수는 한 달에 세금 제하고 1천7백 달러(1백70만원)를 받았다. 올해 트리플A로 가면 2천5백 달러(2백50만원) 정도 받을 것이다. 싱글A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합숙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선수 전용 식당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정도 돈으로 숙소를 구해야 하고, 차도 사야 하고, 가끔 고기도 먹어야 한다.

미국에서 두산 베어스로 유턴한 최경환 선수는 “원정지 한인 교회에서 밥과 반찬을 얻어서 생활했다”라고 말했다. 살인적인 미국의 물가를 감안하면 마이너 리거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쓰는 프로이다. 추신수처럼 100만 달러(10억원)가 넘는 계약금을 받은 선수는 좀 나은 편이다. 계약금을 쪼개 생활비에 보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메이저 리거들이 장교나 장군이라면 마이너 리거들은 그야말로 신병훈련소의 훈련병들이다. 메이저 리거처럼 요즘 유행하는 힙합 스타일로 바짓가랑이가 넓은 유니폼도 입지 못하고 ‘농군 스타일’ 유니폼을 입어야 한다. 등에는 자기 이름도 없다. 또 콧수염이나 턱수염을 마음대로 기를 수도 없다.

가망 없는 선수도 끝까지 최선 다해

 
이들이 이런 혹독한 시련과 악조건을 참고 견뎌내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자기도 언젠가는 메이저 리그에 올라가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다는 꿈. “그 희망이 없으면 견딜 수가 없죠.”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망주 추신수는 자기가 마이너 리그에서 버틸 수 있는 것 역시 희망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모든 마이너 리거에게 메이저 리그에 진입할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메이저 리그에 진출할 희망이 없는 선수는 야구에 대한 애정으로 산다고 말한다. 하지만 마이너 리거들 사이에서 이는 사치일 뿐이다.

메이저 리그에 늘 마이너 리그 강등을 두려워하며 사는 선수들이 있는 것처럼 각 마이너 리그에도 그런 선수들이 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마이너 리거들은 더블A에서 안된다고 다시 싱글A나 루키로 강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이들은 월급 1천 달러(100만원)도 아깝다는 구단으로부터 잘리면 더 이상 갈 곳을 찾기가 힘들어진다.
지난해 최희섭(26·LA 다저스)과 유니폼을 맞바꾸어 입은 플로리다 말린스 포수 폴 로두카는 그런 마이너 리그 포수 생활을 무려 8년이나 견딘 후에야 메이저 리그 주전 포수가 될 기회를 잡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정말 가망 없는 선수들이 있죠. 그런데 그런 선수들도 대부분은 구단이 자를 때까지는 내색하지 않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 선수들을 보고 각오를 새롭게 다질 수도 있죠.” 추신수는 마이너 리그에서조차 가망이 없는 선수들로부터도 배울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럼 메이저 리그에만 올라가면 만사형통인가. 지난해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14승을 거두며 일약 스타가 된 투수 라얀 드리스는 올해 구단으로부터 40만 달러(4억원)에도 못 미치는 연봉을 제시받았다. 지난해 메이저 리그에서 홈런 26개를 때린 같은 팀 외야수 케닌 멘치도 마찬가지다.

 
메이저 리그에서 아무리 잘해봐야 연봉 조정 신청 자격이 없는 메이저 리그 4년차 이하는 그야말로 ‘꽝’이다. 연봉 40만 달러 정도를 받으면 메이저 리그에서는 극빈자나 마찬가지지만 미국 세법에 따라 고액 연봉자로 분류되어 40% 가량의 세율이 적용된다.
그 사이 다치기라도 하거나, 그 부상이 쉽게 낫지 않으면 더욱 큰일이다. 한때 마이너 리그 최고 투수로 기대를 모은 송승준(24)은 부상 때문에 몬트리올 엑스포스에서 방출되었다. 김선우(28)는 올해 40인 로스터에서 제외되어 트리플A에서 시즌을 시작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서재응(뉴욕 메츠) 봉중근(신시내티 레즈) 백차승(시애틀 매리너스)은 올 스프링캠프를 맞아 마이너 리그와 메이저 리그의 갈림길에서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재기를 노리는 박찬호에게도 격려와 박수가 필요하다. 하지만 마이너 리그라는 그늘에서 경제적 어려움과 도태에 대한 공포와 싸워야 하는 그들에게도 박수와 관심을 보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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