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에 가면 기가 차다
  • 허문영(영화 평론가) ()
  • 승인 2005.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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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비평]

 
“박정희는 생활 세계에서 자신이 기원이 되기를 소망했다. ‘부재의 장소’에서 자신이기원이 되려는 권력자의 소망이, 눈에 띄지 않고 존재해온 것들을 지워나간다. 오늘의 인사동에서도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미국 유선 방송인 디스커버리 채널에는 <Hour Asia>를 비롯해 아시아의 문화와 풍물을 소개하는 코너가 꽤 있다. 홍콩의 스턴트맨, 타이완의 요리, 일본의 스모,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등을 여기서 만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잘 등장하지 않는다. 왜일까.
지난 3월2일 밤 <Hour Asia>에는 오랜만에 한국이 등장했다. 제목은 ‘긴 여행, 짧은 만남’. 남한의 이산 가족들이 강 건너 먼발치에서라도 북한의 가족을 만나려는 가냘픈 희망으로 중국의 압록강 강변 도시 장백현으로 가는 길을 담은 것이었다.

반가운 방송은 아니었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해도, 한국인의 어떤 결핍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몇달 전 이 채널에 한국이 등장했을 때는 외국인과 결혼한 한국 여성이 맞서야 하는 사회적 편견이 소재였다. 두 번째 의문. 다른 아시아 국가를 다룰 때, 그 곳에 고유한 무언가를 소개하던 프로가 한국의 무언가를 다룰 때, 왜 그것은 결핍이거나 부재인가.
우리는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우리에게 오래되고 고유한 것들은 대부분 생활 세계에서 추방되었다. 물론 이 채널은 창덕궁을 소개한 적도 있지만, 오늘의 한국인의 삶을 역사와 연관시킬 때 그들은 먼저 부재한 것에 눈길을 돌린다.

“어설픈 모조는 전통의 부재 고백하는 것”

제작진을 탓하기 전에 이것이 한국에 대한 일반 구미인의 이미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그 이미지는 특정한 이미지가 아니라, 부재의 이미지다. 그들의 뇌리에서 한국은 정당한 자리에 없거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얼마 전 한국인을 분노케 한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대영박물관의 안내문은 무지의 소산이지만, 그 무지의 이면에는 그 부재의 이미지가 작동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는 그 부재의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운가.
일요일에 인사동 거리를 걸으면 이상한 행렬이 눈에 띈다. 조선시대 포졸 차림을 한 사람들이 죄수를 압송하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는 것이다. ‘포도대장과 순라군들’이라는 거리 공연이라고 한다. 이런 모조가 아마도 민속 재현 혹은 전통 복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몇몇 외국인들이 흥미로운 눈으로 이 광경을 보고 있었지만, 나는 민망했다. 그 모조는 조악했다. 순라군들은 사인펜으로 어설프게 수염을 그려 넣은 새파란 젊은이들이었고, 그들의 표정에는 나른함과 지루함이 교차하고 있었다.

이 전통 모조라는 기획은 관광 코스 강화라는 실용적 목적도 있겠지만, 내게는 부재한 한국을 발명하려는 안간힘처럼 보인다. 전통 혹은 기원을 발명함으로써 한국이라는 이미지의 고정점을 만들어내려는 노력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포도대장과 순라군이 매혹적인 전통인가.
이 모조의 기획이 공간의 시간성을 지워가는 작업과 병행되고 있다는 점이 실은 더 큰 문제다. 최근 1,2년 사이에 인사동 거리는 완전히 바뀌었다. 오래된 가게들이 헐리고 거대한 민속 공예품 상가 타운이 들어선 것이다. 수십 년 된 먹자골목인 피맛골은 고층 건물을 짓느라 철거되었다. 전통과 기원의 공간임을 내세운 장소에서 오래된 것은 삭제되고, 새로운 것이 더 오래된 것의 외피를 두르고 나타났으나 그나마 구멍투성이다.

현재 서울시의 도심재개발 계획이 문화재 복원과 환경 친화를 앞세웠을 뿐 본질적으로는 서울시의 원형 파괴라는 점에서 박정희식 개발 독재의 변용인 ‘신개발주의’라고 비판한 홍성태 교수의 주장에 동의한다. 박정희는 공적인 문화재 보존에 많은 돈을 들였지만 생활 세계에서는 시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박정희는 생활 세계에서 자신이 기원이 되기를 소망했다.

‘부재의 장소’에서 자신이 기원이 되려는 권력자의 소망이, 눈에 띄지 않고 존재해온 것들을 지워나간다. 오늘의 인사동에서도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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