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빼앗았나, 길을 열었나
  • 표정훈(출판 평론가) ()
  • 승인 2005.04.2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주일의 책]<칭기즈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칭기즈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사계절출판사






1991년 시사 주간지 <타임>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선정한 칭기즈 칸(1162~1227)은 오랜 세월 피에 굶주린 야만인이자 무자비한 정복자로 간주되어 왔다. 미국 매칼래스터 대학 인류학과 교수인 저자는 8년 동안 몽골을 현지 답사하고 방대한 관련 문헌을 섭렵한 끝에 내놓은 이 책에서 그런 시각이 편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복당하는 처지에서는 칭기즈 칸이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무자비한 정복자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공포를 실감했을 페르시아의 연대기 기록자 주즈자니는 예순 살 무렵의 칭기즈 칸을 이렇게 묘사했다. “키가 크고, 몸에 힘이 넘치고, 단단하고, 얼굴에 난 성긴 수염은 모두 하얗게 셌고, 눈은 고양이 같고, 넘치는 에너지와 분별력, 천재성과 이해력을 갖추었고,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학살에 능하고, 의롭고, 단호하고, 적을 쉽게 무너뜨리고, 용맹스럽고, 살벌하고, 잔인하며, 마법과 기만에 능하다.”

 
주즈자니가 남긴 기록에서 칭기즈 칸이 매우 복합적인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저자가 보기에 몽골군의 잔인함은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다. 몽골군은 굴복시킨 적 가운데 쓸모없다고 판단한 사람들만 죽였다. 여기에서 쓸모없는 사람이란 잠재적 반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지배층이었다. 군인과 지배층을 제외한 피정복민은 양자 입적과 혼인 등의 방식으로 몽골에 동화시킴으로써 정복지의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도모하는 전략을 펼친 것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저자는 칭기즈 칸의 업적을 전무후무한 것으로 강조한다. 칭기즈 칸은 귀족적 특권과 출생에 기초한 봉건제를 부수고 개인의 능력과 성취에 기초한 새로운 체제를 건설했다. 실크로드를 역사상 가장 큰 자유무역지대로 조직하고 처음으로 국제적인 역전(驛傳) 제도를 도입했으며, 국제법을 만들고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 몽골 제국은 그야말로 ‘팍스 몽골리아나’(몽골 제국의 평화)를 이룩한 것이다. 더구나 선거·공립 학교·우편제도·대포·주판 등도 사실은 몽골 제국의 성취들이다. 

계몽시대 전후 유럽인들 평가 엇갈려

그런 업적이 칭기즈 칸과 몽골 제국의 몫이라 해도, 책 제목대로 ‘잠든 유럽을 깨웠다’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 아닐까?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칭기즈 칸의 처지에서 당시 유럽은 가져갈 것이 없어 건드리지 않은 궁핍한 땅이었다. 요컨대 유럽은 피해는 보지 않고 몽골이 뚫어놓은 길로 들어오는 문명의 혜택만 보았으며, 바로 이것이 유럽이 주도하는 근대 세계가 형성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칭기즈 칸이 이룩한 제국을 ‘길의 문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저자에 따르면 칭기즈 칸과 유목민의 정복이란 땅을 빼앗아 소유하는 것보다는 길을 열어 장악하는 데 있었다. 한 곳에 정주해 사람을 다스리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칭기즈 칸은 물자와 사람이 돌아다닐 수 있는 길을 뚫고 그 흐름을 통제하는 데만 관심을 두었다. 

 
칭기즈 칸에 대한 유럽인의 평가가 변하는 과정도 흥미롭다. 18세기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칭기즈 칸을 ‘오만하게 왕들의 목을 짓밟은 파괴적인 압제자’라고 묘사했지만, 영국 작가 제프리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1395년)에서 칭기즈 칸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고귀한 왕의 이름은 칭기즈 칸이었으니, 그는 당대에 큰 명성을 떨쳐 어느 지역 어느 곳에서도 만사에 그렇게 뛰어난 군주는 없었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부터 유럽 사람들이 칭기즈 칸을 부정적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런 인식이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하지만 그렇게 위대한 칭기즈 칸의 대제국 자체는 오래가지 못했다. 몽골 제국 붕괴를 저자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저자는 칭기즈 칸 사후 그의 자식들이 분할 통치했던 제국들이 1330년대 페스트, 즉 흑사병 창궐로 군사적·상업적으로 고립되어 약해진 끝에 피지배자 사회에 흡수 동화되었다고 본다. 

21세기가 시작될 무렵, 칭기즈 칸과 몽골제국은 유목민 특유의 기동전 혹은 속도전과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을 범위로 하는 역전 네트워크 건설로 새삼 주목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일각에서는 우리 민족이 본래 기마 민족이었음을 내세우며, 21세기 정보통신 네트워크 사회에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민족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견강부회의 혐의에서 자유롭다고 보기 힘든 이런 주장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을 지니고 있을까? 이 책을 통해 대답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