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한 386이 ‘해방구’ 세웠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5.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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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다운 환경에서 사람다운 아이를 키우고 싶은 부모들이 서울 한복판 ‘마포 공동체’의 대안 학교인 성미산학교로 모여들고 있다.

 
  지난 달 인천에서 서울 마포구 성산동으로 이사한 이영미씨는 새 집 현관에 붙어 있는 메모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메모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우리 동네에 이사 오신 것을 축하합니다. 이삿짐 정리하느라 힘드실 테니 오늘 저녁은 우리집에 와서 드세요. -지훈 맘’

  알고본즉 메모는 딸 민정이와 같은 성미산학교에 다니는 지훈이 엄마 조승연씨가 붙여놓은 것이었다. 아이 때문에 감행한 이사이긴 했지만 이씨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이사온 이웃의 밥때까지 챙기는 마음 씀씀이에 이삿짐 나르던 인부들도 “이사 참 잘 오셨네요”라며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 직장인 인천과 서울을 매일 출퇴근하느라 몸은 비록 고되지만 이씨의 얼굴은 늘 싱글벙글이다.

  현대판 맹모삼천지교를 꿈꾸는 부모들이 마포로, 마포로 모여들고 있다. 여기서 맹모란 자기 아이를 일류 대학 보내려고 안달하는 부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사람다운 환경에서 자기 아이를 사람답게 키우고 싶은 부모들이 모여 이룬 곳이 오늘날의 마포이다. 지난해 이 지역에 개교한 12년제 대안 학교 성미산학교가 제법 학교 꼴을 갖추고 또다시 신입생을 맞을 채비에 나서면서 마포행을 꿈꾸는 부모가 갈수록 늘고 있다.

  요즘 ‘쌔고 쌘’ 것이 대안 학교일진대 웬 호들갑이냐고? 속단은 마시라. 성미산학교는 기존 대안 학교와는 두 가지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단 주변 환경부터가 다르다. 성미산학교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같은 도시형 대안 학교를 두고 교육학자들은 ‘2세대 대안 학교’라고 칭하기도 한다.

  외진 두메 산골에 주로 세워진 1세대 대안 학교의 경우 산 좋고 물 좋고, 자연친화적인 교육을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현대의 삶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고 성미산학교 학부모 겸 교사인 주창복씨는 주장한다. “우리 세대는 시골이 고향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도시가 고향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제 고향인 도시에서 삶의 터전을 닦고 꿈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그는 말했다.

‘동네 네트워크’에 1천1백여 가구 가입

  공간 배경뿐만이 아니다. 역사 배경에서도 성미산학교는 기존 대안 학교와 확연히 구분된다. 기존 대안 학교의 경우 뜻있는 설립자가 먼저 깃발을 들고 나서면→교사와 학부모가 그 주변에 모여들고→인근 마을 주민 일부가 학교에 합류하는 과정을 거치곤 했다. 그러나 성미산학교가 밟아온 과정은 정반대이다. 

 
  성경식 표현을 빌리자면, 성미산학교 탄생 배경에는 태초에 마을이 있었다. 물론 자연발생적인 마을은 아니었다. 이야기는 공동 육아라는 새로운 실험을 위해 ‘아장거리는 아이를 앞세운 채, 또는 뱃속에 아이를 품은 채’ 20~30대 젊은 부모들이 마포로 모여들던 1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훗날 ‘386 세대’라고 딱지 붙여진 이들에게 당시 무슨 거창한 시대적 소명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엇비슷한 때 결혼해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동시에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이유 하나로 이들은 뭉쳤다. 상당수가 1970~1980년대 학생 운동권 출신이던 이들에게는 ‘함께 고민하고 함께 풀어가는’ 386 세대 특유의 공동체적 생활 양식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마포였을까? 이에 대해 확실한 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단지 시내에서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설, 집값이 쌌기 때문이라는 설, 인근에 서강대·연세대·이화여대·홍익대 등 대학가가 밀집해 있어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안된 신혼 부부들이 이 동네에 친근감을 느꼈을 것이라는 설 등이 혼재해 있을 뿐이다. 어쨌거나 이들의 실험은 성공을 거두었고, 마포는 공동 육아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2005년 현재 이 지역에 위치한 공동 육아 협동조합은 총 5곳에 달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성장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이들 초창기 이주민은 새로운 고민에 부딪히게 되었다. 아이들이 공동 육아의 울타리를 벗어나 동네 아이들과 섞이게 되면서 이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에 대해 비로소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됐다. 구교선씨(마포두레생협 상임이사)는  당시의 문제 의식을 이렇게 전한다.  “내 아이만 잘 키우겠다고 아등바등하면 뭐하겠는가? 내가 몸 담고 있는 동네가 바뀌지 않는 한, 바깥 세상은 여전히 아이에게 안전하지 못한 곳일 텐데.”

 
  이같은 각성을 바탕으로 2000년 생겨난 것이 생활협동조합(생협)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공동 육아 조합원들은 기존 마포 ‘원주민’들에게 외지인이나 다름없는 이질적인 존재였다고 이홍표씨(택견 강사)는 말한다. 그러나 안전한 먹거리 유통을 내세우며 생협을 결성한 뒤 이들은 지역 주민과 적극 대면하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유기농 반찬 가게인 ‘동네 부엌’, 카센터인 ‘성미산 차병원’, 문화 학교인 ‘우리마을 꿈터’ 등이 잇달아 생기면서 이들과 원주민 간의 접촉면은 점점 늘어 갔다(상자 기사 참조). 생협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이들 ‘동네 네트워크’는 조합원 아닌 일반인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4월 말 현재 이들 네트워크 가입자는 1천1백여 가구로, 마포 전체 가구 수(10만5천 가구)의 약 1%에 해당한다.

  그러나 원주민과 이들을 밀착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무어니 무어니 해도 2001년 7월~2003년 11월 전개된 ‘성미산 지키기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산 위에 천막을 치고, 굴착에 맨몸으로 맞서면서 동네 야산인 성미산을 지키려 한 공동 육아 조합원들의 헌신적인 투쟁으로 인해 원주민은 이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마포에서만 60년을 살았다는 이 지역 토박이 이현찬씨(66·마포연대 공동대표)는 “젊은이들이 성미산을 진심으로 사랑하는구나, 싶어 기특하고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성미산 투쟁의 성과는 성미산을 지킨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산 위에서 불침번을 서며 이웃 간에 이 얘기 저 얘기 나눌 시간이 많았던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당시 조합원들의 고민은 동네를 떠나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최대 이유는 교육. 공교육의 획일적인 교육 시스템에 지친 이들은 대안 학교가 있는 다른 지역을 찾아 마포를 떠나갔다.

  이들을 보내는 조합원들의 심정은 착잡했다. ‘우리가 어떻게 일군 동네인데…’. 마포에 직접 학교를 세워 보자는 ‘겁 없는’ 구상은 바로 여기서 나왔다고 주창복씨는 전한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말이 나온 이상 막무가내로 일 저지르기는 이들의 특기이자 문화였다. 공동 육아 만들 때가 그랬고, 생협 만들 때가 그랬다.

  그러나 학교 만들기는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희생을 요구했다. 30억원이 넘게 드는 학교 설립 자금을 마련하는 것도 문제지만, 기존 공교육 체제와 전혀 다른 커리큘럼과 교육 과정을 머리 맞대고 도출하느라 학부모·교사 간에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성미산학교 하나를 보고 새로 이사온 학부모 중에는 ‘우리 아이가 실험용이냐’고 반발하는 이도 생겨났다. 

  이같은 일련의 시행 착오는 1년여 본격적인 운영 기간을 거치며 잦아들었다. 특히 ‘하자센터’(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를 이끌어 온 연세대 조한혜정 교수가 최근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성미산학교는 ‘제2의 비상’을 꿈꾸는 기운으로 충만해 있다(00쪽 인터뷰 기사 참조). 

세계사적으로 의미 심장한 마포 공동체의 실험


 
  설립자 개인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염원에서 탄생한 성미산학교는 기존 대안 학교와 그 출발점부터가 이렇게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마을이 모태가 된 ‘마을 학교’인 만큼 마을 주민·학부모·교사를 구분하기가 뚜렷하지 않은 것이 이 학교의 특징이다. 동네 중국집 아줌마가 교사가 되어 요리 수업을 진행하고, 수학 학원 원장인 학부모가 방과후 수학 지도를 맡는 분업이 이 학교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남자 어른들이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는 것 또한 특징이다. 아파트 부녀회라도 꾸려 나가는 여자들과 달리 도시에서 남자들은 설 땅을 잃어 버렸다. 그러나 마포에서는 다르다. 성미산학교 학부모인 박종호씨는 국어 교사인 자기 경험을 살려 아이들 독서 모임을 이끌고 있다. 감정평가 법인을 이끌고 있는 주창복씨는 지난 겨울 ‘일센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창업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과 함께 군고구마와 닭꼬치 장사를 직접 해 보며 주씨는 스스로도 큰 공부를 했다고 한다. “뒷 세대에 뭔가를 전수해야겠다고 생각하니 마음가짐부터 달라지더라”라고 그는 말했다. 김찬호 하자센터 부소장은 이같은 경험이 남성들에게 각별한 정체성을 갖게 해준다고 말한다. 곧 핵가족으로 원자화한 도시 생활에서 동네 아이들에게 어른으로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남성에게 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성미산학교는 마포 공동체의 재생산 구조를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도 중대한 의미가 있다. 성미산학교, 나아가 마포 공동체는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의미 심장한 실험을 하고 있다고 조한혜정 교수는 말한다. 어찌 보면 도시에서 공동체적 생활 양식을 추구한다는 것부터가 기성 질서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다.

  자본이 숭배하는 속도와 효율의 신화 또한 이 곳에서는 맥을 못춘다. 이곳에 이사 온 사람들이 맨 처음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무슨 회의가 그렇게 길어요?”이다. 하다못해 ‘내일부터 천막치고 농성에 들어가자’는 간단한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밤 새워 회의하는 것이 이곳의 전통이다.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충분히 발언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 

  처음 참여한 이들은 이런 분위기에 복장이 터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를 ‘소통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마포연대 공동 대표 김종호씨는 말한다.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게 만드는 이같은 소통 방식의 또 다른 강점은 스스로를 주체로 만든다는 것이다. 곧 자기 스스로 입 밖에 내뱉은 말을 책임지려다 보면 꼼짝없이 공동체에 더 깊이 엮이게 되는 ‘공범 만들기 논리’가 이곳에서는 유쾌하게 통용된다. 

  이같은 마포의 실험을 조한혜정 교수는 ‘386세대가 일궈낼 가능성의 최대치’라고 평가한다. 한때 ‘좋은 사회’를 꿈꾸며 그 실현을 위해 노력했던 386 세대의 순수 정신이 이곳을 생장시킨 자양분이라는 것이다. 

  386세대 일부가 타락했다고 욕을 먹는 동안 이들은 마포에서 고군분투했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이들이 스스로를 진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동체를 중시하다 못해 집체주의로 빠지기 쉬운 386 정서에 머무는 대신 이들은 후기 근대 사회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개인을 존중하는 공존의 질서 감각' 을 익혀 나가는 중이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 이런 몽상가들로 인해 세상은 때로 살 만한 곳이 된다. 

 
 1. 공동 육아 협동조합
  1994년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세워진 ‘우리어린이집’이 효시였다. 이후 우리어린이집 입소를 기다리다 지친  대기자들을 중심으로 ‘날으는 어린이집’(1995년)‘참나무 어린이집’(2002년)이 잇달아 조직되었다. 공동육아 출신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도토리’(1998년)와 ‘풀잎새’(1999년)라는 방과 후 교실도 생겨났다.
 ‘네 아이’ ‘내 아이’ 가리지 않고 ‘우리 아이’로 키우는 것이 공동 육아의 철학이다. 현재 5개 조합에 가입한 조합원은 1백50가구 정도이다.


 
2. 마포두레 생활협동조합
  2001년 2월 문을 연 마포두레 생협은 유기농산물 직거래 외에 다양한 지역 활동을 펼치고 있다. 생협 바로 곁에는 유기농 반찬 전문점인 ‘동네부엌’이 있다. 동네부엌은 생협에서 제공받은 식재료로 조리한 반찬만을 만들어 파는 만큼 일반 가게보다 20% 가량 비싸다.
  2003년 11월에는 조합원들이 출자해 ‘성미산 차병원’이라는 카센터를 만들기도 했다. 국내 최초의 조합형 카센터인 이 곳을 이용하면 자동차 정비로 인한 바가지 걱정을 덜 수 있다고 조합원들은 말한다.
     
 
 
3. 우리마을 꿈터
  생협이 출자해 2002년 8월 문을 연 ‘우리마을 꿈터’는 문화센터 개념의 마을 학교라 할 수 있다. 꿈터는 출입 문턱을 대폭 낮추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곧 조합원 자격 및 출자금 지급 능력을 갖추어야 참여가 가능했던 기존의 공동 육아와 달리 꿈터는 처음부터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교육 공간을 상정했다. 현재 이곳에서는 택견, 요가, 글쓰기, 숲속학교, 자전거 행진, 힙합, 미술 치료 등 강좌가 진행되고 있는데, 수강료는 일반 학원의 반값 수준이다.


 
  4. 마포연대
  성미산 지키기 과정에서 탄생한 지역 시민단체가 마포연대(2004년 6월)이다. 요즘 이 단체는 상암동 쓰레기소각장 백지화에 힘을 쏟고 있다. 월드컵공원 바로 곁에 대규모 쓰레기 소각장(750t/일)을 지은 것은 기만 행위라고 김종호 대표(사진)는 주장한다. 소각 아니면 매립,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후진적 쓰레기 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주민들이 일방적으로 희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안 있는 시민운동'을 표방하는 마포연대는 요즘 음식물 쓰레기를 퇴비로 바꿔주는 지렁이 화분을 회원들에게 분양하는 중이다. 짓다 만 박정희기념관 터에 어린이 기념관을 세우자는 캠페인 또한 이 단체의 주요 활동 중 하나이다.

 
  5. 성미산학교
  2004년 9월 개교한 성미산학교에는 흔히 세 가지 진입 장벽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설립 기금의 장벽이다. 이 학교 입학 희망자는 학생 1인당 천만 원 가량의 설립 기금을 내야 한다. 맨 주먹으로 학교를 짓다 보니 생긴 고육책이다. 이렇게 짓고 있는 학교는 오는 7월께 완공된다(현재는 단독 주택을 빌려 수업 중이다).
  두 번째는 5(초등)-5(중등)-2(후기 중등) 학제에 따른 교과 과정의 장벽이요, 세 번째는 문화 장벽이다. 그러나 장벽을 넘어서는 것은 순간이요, 이 장벽만 넘어서면 성미산학교의 매력에 곧 흠뻑 빠질 수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구성원들은 입을 모은다.

 
  6. 동네 방송-마포 FM 라디오
  마포 공동체가 드디어 미디어까지 소유하게 됐다. 지난해 11월 방송위원회로부터 소출력 라디오 시범 사업자로 선정된 ‘마포FM 라디오’는 오는 5월~6월 개국을 목표로 하고 있다.
  ‘우리 동네 우리 방송’을 모토로 내건 마포 FM 송덕호 편성국장은 제대로 된 지역 밀착형 방송을 보여 주겠다고 말한다. 시간 때우기식 오락, 음악 프로그램은 사절이다. 대신 동네 쇼핑센터 정보도 좋고, 민원성 하소연도 좋다. 좀 더 다양한 주민이 방송에 참여해 공동의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게끔 마포 FM은 ‘톡톡~ 마포!’‘랄랄라 아줌마’ 등 다양한 코너를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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