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심판 피할 자 누구냐
  • 김봉석 (영화평론가) ()
  • 승인 2005.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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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혈의 누

 
연출 : 김대승
출연 : 차승원·박용우·지 성


조선 시대 말기인 1808년 동화도라는 섬에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현대에나 가능할 것 같은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 정갈하고 단정한 이미지가 지배하던 조선 시대의 풍경과 어떻게 어우러질 것인가. 비극적인 판타지 <번지점프를 하다>를 만들었던 김대승 감독이 보여주는, 조선 시대 말기의 끔찍한 현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제지업으로 살아가는 동화도에서 조공품을 싣던 배가 방화로 불타버린다. 뭍에서 온 수사관 원규 일행은 불타버린 배와 함께 나무에 몸이 꿰어 죽은 시체까지 발견한다. 주민들은 7년 전 천주쟁이로 몰려 온 가족이 참형당한 강객주의 원혼이 일으킨 범죄라고 믿는다. 당시 강객주를 고발했던 자들이, 강객주의 가족이 당한 형벌의 모습 그대로 죽어가는 연쇄 살인을 본 원규는 7년 전 사건에 뭔가 비밀이 있음을 깨닫는다.

임권택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김대승은 데뷔작 <번지점프를 하다>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환생과 동성애, 사제 간의 사랑 등 복잡하고 첨예한 주제를 능숙하게 엮어내는 안정된 연출력은 인상적이었다. 전작과 180℃ 다른 장르인 <혈의 누>도 복잡한 플롯과 주제로 만들어져 있다. 일단 연쇄 살인의 범인을 쫓는 미스터리 구조가 중심이다. <혈의 누>는 제1일, 제2일로 나뉘어 진행되는 단락마다 한 사람씩 죽어가고, 그 때마다 하나씩 단서가 드러나면서 전체 사건을 꿰어맞추는 재미를 준다. 딱히 잔재주를 부리지 않으면서도 이야기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한다. 멜로와 스릴러를 엮어내는 솜씨도 탁월하다.

‘미스터리+멜로+사회 비판’한 감독의 뚝심

하지만 역사 미스터리가 단지 과거의 풍경과 사건을 재현하는 데 그치면 부족하다. 과거의 수수께끼를 통해, 현재적인 의미를 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혈의 누>는 치밀하게 7년 전 사건을 되짚는다. 제지소를 만든 강객주라는 인물은 양반과 상놈의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평등한, 자유로운 사상의 인물이었다. 모든 섬 주민이 존경하는 어진 인물. 그런 강객주가 억울하게 죽어간 것은, 멀리 떨어진 육지의 조정에서 벌어진 당파 싸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 아니었다. 발고자 다섯 사람에게는, 그들만의 이유가 있다. 재물이건, 복수건, 그들의 욕망은 강객주를 천주쟁이로 몰아간다. 발고자 이외의 섬 주민은 어떨까? 그들은 왜 강객주를 변호하지 않은 것일까. 주민들이 함께 강객주의 무고를 호소했다면, 그처럼 억울하고 참혹한 죽음은 없었을 것이다.

<혈의 누>의 시대 배경인 조선 말기는 개화의 물결에 휩쓸리면서 유교주의가 한계에 달해 있던 혼돈의 시기다. 변화를 요구받으면서도, 과거의 사상과 틀에 사로잡혀 자신만의 안위를 지키려는 양반들. 강객주에게서 제지소를 빼앗은 김치성 대감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말로는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공만을 생각했던 원규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혈의 누>가 지배 계급의 탐욕만을 고발하는 것은 아니다. ‘피의 비’를 맞아야 하는 이들은, 그 모든 것을 묵인했던 자들이다.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 진실과 정의에 눈을 감았던 이들. 그리고 미신과 허위에 물들어 몰려다니는 이들. 이들 모두가 심판받는다. 

후반부에 원규 일행이 섬으로 오가는 장면은 언뜻 전반부와 비슷해 보이지만, 원규의 마음만은 분명 달라져 있다. 과거의 대의는 이미 사라졌고, 뭍으로 간 원규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해야 한다. 고립된 섬은, 집단은 결국 썩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혈의 누>는 역사 미스터리에 멜로를 넣은 것으로도 부족해, 신랄한 사회 비판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정직한 영화다. 모든 것을 한데 뭉쳐 넣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김대승 감독의 뚝심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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