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는 삼성을 믿었다
  • 이문재 취재부장 (moon@sisapress.com)
  • 승인 2005.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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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 러시아 ‘국민 브랜드’로 우뚝…명품 전략·문화 마케팅 ‘결실’

 
크렘린궁은 ‘포위’되어 있었다. 두 개의 진입로는 물론 크렘린의 북쪽과 서쪽도 막혀 있었다. 크렘린으로 통하는 주요 도로이자 모스크바의 중심가인 트레스카야 거리 양쪽으로 늘어선 가로등에는 삼선전자가 지난해 말 선보인 블루블랙폰(D500) 광고(‘램프 포스터’라고 부른다)가 30~40m 간격으로 나붙어 있었다.

모스크바 강을 가로질러 크렘린 북쪽과 연결되는 발쇼이 카메니 다리가 ‘LG다리’로 바뀐 데 이어, 러시아 고위 관료들이 출퇴근하는 트레스카야 거리 2.2km가 ‘삼성 거리’로 불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크렘린 북쪽, 푸틴 대통령의 집무실에서도 보인다는 러시아 국립도서관(레닌 도서관) 옥상에는 삼성 로고가, 크렘린 서쪽 건물에는 LG 로고가 우뚝 버티고 있었다. 크렘린 주변만이 아니었다. 삼성과 LG 광고가 모스크바 주요 거리를 장악하고 있었다.

 
지난 4월 하순, 모스크바에는 눈발이 날리는 날이 많았다. 모스크바의 봄은 음울했다. 하지만 모스크바를 거점으로 러시아 시장을 개척하는 한국 기업인들의 표정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예상보다 빠르고 높은 성과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전망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1998년 이후 5년 연속 고속 성장했으며, 최근에는 ‘오일 특수’에다 신흥 중산층(노부이 루스키)이 늘고 있다. 중국·브라질·인도와 함께 4대 신흥 경제대국(BRICs)으로 꼽히는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원유 수출국이자, 세계 2위의 산유국이다.

사회주의의 옷을 과감하게 벗어버리는 과정에서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았지만, 한국 기업의 제품, 특히 휴대전화를 비롯한 전자 제품은 믿었다. 지난해, 삼성 휴대전화가 노키아와 모토롤라를 제치고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왼쪽 표 참조)한 데 이어, 지난 4월 러시아의 국민 브랜드로 선정된 것이다. LG전자의 전자레인지와 모니터도 러시아 국민 브랜드 대열에 합류했다.

삼성 전자제품, 8개 품목 시장 석권

한국 기업이 러시아 휴대전화 시장을 석권한 것 못지 않은 뉴스가 또 있다. 지난 4월, 삼성전자가 러시아 최고 브랜드 평가에서 코카콜라에 이어 2위로 올라선 것이다(표 참조). 러시아연방상공회의소와 국민브랜드선정위원회 등이 주관하는 ‘러시아 국민 브랜드’는 러시아에서 판매되는 20개 공산품을 놓고, 러시아의 대표적 일간지 이즈베스티아와 프라우다가 러시아 전역 4만6천여 소비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다. 상패와 인증 로고는 크렘린궁에서 수여한다.

 
삼성 휴대전화가 러시아 시장을 석권하는 데 걸린 기간은 7년. 하지만 그 이전에 예열기가 있었다. 한국 기업 러시아 진출사의 산 증인이자 러시아 프로젝트 지휘자인 은주상 삼성전자 러시아법인 영업마케팅 총괄상무에 따르면, 일본이나 유럽 기업에 비해 한국 기업이 훨씬 적극적이었다.

무엇보다 시장을 선점했고, 소비자 조사와 유통 구조를 확실하게 다잡았다. 삼성의 러시아 비즈니스는 1989년에 시작되었다. 핀란드 전자성 장관과 VCR 프로젝트를 협의한 것이 출발이었다.

초기에는 ‘합리적 가격’으로 승부를 걸었다. 소니와 필립스가 고가 전략으로 러시아 시장을 휩쓸고 있을 때였다. 동시에 전자제품 수입 절차와 판매 시간을 최대한 단축했다. 1993년 모스크바에 ‘보세 창고’를 세우고 여러 제품을 소량으로 단기에 공급했다. 주문하고 나서 실제 제품을 받기까지 오래 기다리던 러시아 소비자들에게 삼성의 짧은 배달 시간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삼성 현지 직원들의 의욕도 큰 힘이었다. 당시 일본 기업인들은 러시아 시장을 변방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직으로 밀려났다는 피해 의식 때문에 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하지 않았다. 하지만 삼성은 본사가 제시한 목표보다 높게 성장률을 잡았다. 그리고 인력들이 젊었다. 1998년 모라토리엄(지급 유예)이 닥쳤을 때, 다른 외국 기업들이 대부분 철수했지만 삼성이 거의 유일하게 마케팅을 강화했던 것도 러시아 소비자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방향을 틀었다. 휴대전화 판매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브라운관식 텔레비전이나 모니터 같은 저가 제품의 비중을 낮추었다. 2003년부터는 프리미엄 전략을 구사했다.

은주상 상무는 “휴대전화를 지렛대 삼아 다른 제품도 명품·고가 전략으로 밀고 나갔다”라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러시아 현지 광고 컨셉트를 ‘리더가 되어라’로 설정하고 휴대전화를 비롯해 텔레비전·노트북·세탁기 등 4대 기축 상품에 고급 이미지를 강화했다. 그 결과 삼성전자 러시아 법인은 지난해 인지도 조사에서 소니를 앞질렀고, 사용자 호감도에서도 올해 안에 소니를 추월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의 명품 전략은 러시아 젊은이와 비즈니스맨들에게 먹혀들어 가고 있다. 현지 통역을 맡은 모스크바 대학 대학원 유학생 이규영씨에 따르면, 러시아 젊은이들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선물이 삼성 휴대전화이다.

하지만 모토롤라나 노키아 제품에 비해 가격이 높아 가난한 학생들은 꿈도 꾸지 못한다고 한다. 휴대전화 평균 가격은 삼성이 1백28 유로인데, 노키아는 1백10 유로, 모토롤라는 75 유로 수준이다. 그 결과, 삼성 휴대전화는 시장 점유율뿐 아니라 매출액에서도 2위를 크게 따돌렸다. 지난해 3/4분기의 경우, 1위 삼성과 2위 모토롤라 매출액은 약 1억 유로 차이가 났다.

이처럼 한국 휴대전화가 러시아 시장을 빠른 시간에 거머쥘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다. 앞서 언급한 시장 선점과 유통망 구축, 기술력과 디자인 이외에도 문화 마케팅 전략이 주효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러시아 6개 주요 도시에서 ‘삼성 모바일 로드쇼’를 열어, 큰 호응을 얻었다. 삼성은 러시아가 문화·예술의 나라라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월평균 임금이 3백 달러 미만인 경우에도 한 달에 한 번 이상 발레나 음악회나 연극 공연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주요 도시에는 삼성 디지털 갤러리를 오픈하고, 로드쇼를 병행했다. 지난해 여름 두 달 동안 사마라·불고그라드 등 여섯 도시를 순회하며 다양한 문화 행사를 펼쳤다. 특히 지난해 7월10일 사마라에서 개최한 로드쇼에는 20여 만 관객이 몰려들어 최신 휴대전화를 직접 사용해 보고, 인기 록 그룹 브라보의 공연을 관람했다. 또한 볼쇼이 극장·톨스토이 문학상·에미르타쥐 박물관 등을 후원하고 있다. 최근에는 모스크바 시의 올림픽 유치 프로모션에도 협력하고 있다.

이같은 입체적인 접근을 통해 삼성전자는 70억 달러 규모에 달하는 러시아 전자제품 시장에서 휴대전화를 중심으로 모두 8개 제품을 시장 점유율 1위로 올려놓았다. 판매 수량을 기준으로 할 때, 프린터(39%) 전자레인지(32%) 모니터(29%) 청소기(24%) 휴대전화(23%) 홈시어터(20%) 텔레비전(16%) 세탁기(14%)가 각 분야에서 1위를 달리고 있고, 판매액을 기준으로 할 때 프린터와 세탁기를 제외한 나머지 6개 부문이 모두 1위에 올라서 있다.

은주상 삼성 러시아법인 상무는 “러시아에서 삼성의 도약은 한국 기업은 물론 한국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LG전자, 현지 공장 세우고 본격 공략 채비

1990년대 말부터 어린이 사생대회·미스LG 선발대회·가라오케 경연대회로 구성된 ‘LG 페스티벌’을 비롯해 바둑대회·장학 퀴즈 등 다양한 문화 마케팅과 현지화 전략을 펼쳐온 LG전자로서는 올해가 러시아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원년이 될 것 같다.

 
지난 4월20일 (주)LG 구본무 회장은 모스크바 인근 루자 지역에 들어서는 15만평 규모의 현지 공장 기공식에 참석해 “러시아에서 추진하고 있는 사업들이 상승 효과를 거두어 LG 브랜드가 러시아에서 고급 브랜드로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LG 현지 공장은 LG가 2007년 ‘디지털 가전 글로벌 톱’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초 기지라는 성격이 강하다. LG는 현지에서 열린 전략회의를 통해 러시아 시장에서 전자·화학 부문 경쟁력을 강화하고, 자원 개발 및 플랜트 사업에도 진출하기로 했다.

오는 5월10~14일 모스크바에서는 러시아의 세빗이라고 불리는 러시아 최대 정보·통신 전시회 ‘시바즈 엑스포콤 2005’가 열린다. 올해 17회째로, 10만명 가까운 관람객이 몰릴 것으로 예상되는 이 전시회에는, 한국의 삼성·LG·팬택을 비롯해 지멘스·소니에릭슨·파나소닉·NEC·알카텔 등 글로벌 기업들이 참가해 미래의 경제 대국 러시아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각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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