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혼에 씌인 기자
  • 문정우 편집장 (mjw21@sisapress.com)
  • 승인 2005.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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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편지]

소설가 황석영씨가 <장길산>을 한창 쓸 때는 뭔가에 홀린 듯한 느낌을 종종 받았다고 한다.  그는 알 수 없는 힘에 사로 잡혀 신들린 듯 원고지를 메웠는데, 그럴 때마다 글을 쓰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 같다는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 땅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수많은 민초들의 혼이 씌었던 것 같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기자들도 한 가지 취재에 몰두하다 보면 신기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뭔가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마구 떠밀어대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이다. 기자 초년병 시절에 들었던, ‘기사는 기자가 쓰는 게 아니라 역사가 쓰는 것’이라던 선배들의 호언이 허풍으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시사저널> 편집국의 동료 기자들은 정희상 전문 기자를 ‘원혼에 씌인 사나이’라고 부른다. 본인의 말마따나 무슨 기구한 팔자인지 그는 오랫동안 한국 현대사에서 억울한 죽음의 원인을 캐는 기사들을 많이 써왔다.

그 중에서 가장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기사는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 보도였다. 그는 공동경비구역(JSA) 내에서 남한과 북한 병사 사이에 보통의 휴전선에서라면 상상도 하기 힘든 진한 교류가 있었으며, 그것이 소대장이었던 김훈 중위의 죽음을 불렀을지도 모른다는 기사를 썼다. 이 기사는 대박을 터뜨린 영화 <JSA>의 소재가 되었으며, 군대 내 다른 숱한 의문사 사건이 재조명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사진).
 
얼마 전 <시사저널>이 커버 스토리로 다룬 김형욱 암살 관련 보도도 정기자의 작품이다. 정기자는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대부분 이름 없이 죽어갔고, 이제는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북파공작원들의 한을 파고들어 가다가 그들과 비슷한 처지인 중앙정보부 특수공작원 출신들을 만나 암살 고백을 듣게 되었다.

정기자는 오랫동안 6·25 때의 양민 학살 사건과 군사 독재 시절의 운동권 학생 의문사 사건도 추적해왔기 때문에 정기자 주변에는 한국 현대사의 그늘에서 죽어간 온갖 망령들이 들끓고 있는 셈이다. 그는 가끔 망자들과의 질긴 인연을 끊고 싶다고 비명을 지르기도 하는데,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너무나 많고 다양한 ‘억울한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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