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월급쟁이 탓이냐”
  • 스트라스부르 · 류재화 통신원 ()
  • 승인 2005.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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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재난 대비 기금’ 법안 논란…직장인 임금 공제 등으로 자금 충당

 

 ‘노인들을 위해 휴가를 반납하라’. 5월16일은 프랑스의 정기 공휴일인 ‘팡트코트’(성신 강림 축일)다. 그러나 올해부터 프랑스 샐러리맨들은 이 휴일을 반납하고 무급 노동을 해야한다. 또 닥칠지 모르는 혹서 재난에 대비해 병약한 노인과 장애인 들의 ‘자립을 위한 연대 국가 기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정부는 이 날을 ‘국민 연대의 날’로 지정했다. 라파랭 총리는 지난 5월1일 이 국가 기금을 발족시키는 기념사에서 “노령화 사회에 대비해 전국민이 합심해야 하며, 지난 폭염 때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더 이상 생기지 않아야 한다”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 ‘가슴 훈훈한’ 행사를 바라보는 프랑스인들의 시선은 차갑다. “명분이야 좋다. 그러나 어딘지 정치적으로 구린내가 난다.” 퇴직연금 개혁안, 의료보험 개혁안에 이어 국민 고통 분담을 이유로 정부가 책임을 국민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전국 산업별 노조연합은 이 날을 ‘국민 비연대의 날’로 선포하고 총파업에 들어간다.

2년 전 프랑스는 살인적인 더위로 몸살을 앓았다. 갑자기 찾아든 찜통 더위는 당시 1만5천 명에 이르는 병약한 노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프랑스는 세계보건기구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 시스템과 국민의료보험 제도를 갖춘 나라다. 그러나 느닷없는 기상 이변에 여지없이 의료 시스템의 허점을 드러냈다.

또한 프랑스 사회의 고질인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부작용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웃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 없다는 태도였다. 당시 의료진들 대부분이 바캉스를 떠나 진료실을 비웠다. 시라크 대통령만 하더라도 빗발치는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바캉스를 다 보내고서 뒤늦게 구릿빛 얼굴로 엘리제궁에 나타나 분노를 자아냈다.

수혜자인 노인들도 “직장인 지갑 터는 것은 싫다”

프랑스는 수준 높은 양로원 시설을 자랑하지만 독거 노인의 수도 상당하다. 지난 폭염 때 응급 구원 요청을 위해 하루에 한 번도 울리지 않는 전화통 쪽으로 몸을 이끌고 가다가 수화기 앞에서 실신해 안타깝게 세상을 버린 노인들의 일화가 전해지기도 했다.

2003년 사태 이후 보건장관은 ‘2004년 폭염 대비안’을 발표한 바 있다. 의료기관과 기상청 간의 상호 연계 시스템 가동, 온도 변화에 따른 4단계 정밀 이상 기온 경보 장치 및 예방 제도, 병원 및 양로원 등 관련 시설에 냉방 장치 및 설비 지원, 응급 의료 인원 보충 및 노인 보호 시설 확충이 그 주요 내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재원 마련이었다.

 

국민적 합의 없이 의회 표결을 통해 지난해 6월 법제화한 ‘자립을 위한 연대 국가 기금’안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첫째, 공기업 사기업을 막론하고 모든 직장인의 임금 총액에서 0.3%를 뗀다.

이를 충당하기 위해 휴일 하루를 반납하고 보충 근무 수당 없이 일해야 한다. 둘째, 각종 사회단체 기부금을 통해 9천만 유로 상당을 확충한다. 셋째, 기존 의료보험 예산안과 별도로 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13억 유로 상당의 새 자금을 마련한다.

필립 두스트-블라지 프랑스 보건장관은 라파랭 총리의 아이디어가 도덕적 명분만 앞섰지 실질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20억 유로 정도로는 부족하다. 더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 국가 기금의 혜택을 받게 될 노인 단체 연합 및 장애인 단체들도 직장인들의 호주머니를 터는 데에는 반대한다며, 5월16일 총파업에 동참하기로 했다.

수은주가 크게 올라가는 등 최근 날씨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자 프랑스에서는 2년 전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하지만 그 대책에 대해서는 국민적 저항이 거세다. 실업률은 10%를 넘어서는데, 기업 이윤은 연일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다. 굳이 근원적으로 따지면, 기후 온난화의 주범은 산업화의 주체인 기업이다.

그런데 이 국가 기금 마련 캠페인에 기업들만 유독 면제 대상이다. 기업 이윤에서 지원금을 받든지, 휴일을 반납하되 근무 수당은 내놓으라는 주장이다. 폭염과 같은 자연 재난의 최대 피해자는 병약한 노인과 장애인이며, 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것도 사회적 약자인 월급쟁이들이니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이상 기온이라는 자연 현상과 휴일 반납 소동처럼 개인의 일상 생활에 깊이 침투한 사회적 현상의 함수 관계를 ‘에코-소시알’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화폐 가치 변동이나 각종 보험 및 연금 정책 등의 경제 현상도 자연 현상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의 파괴 행위에 대한 자연의 복수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쓰나미·대홍수·지진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연 재앙 앞에 가장 큰 피해자는 병약자나 빈곤층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현대 사회에도 들어맞는다. 강한 자만 살아 남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후 온난화 위기에 처할 만큼 자연이 완전 파괴된 현대 산업 사회에서는 약자가 반드시 노인이나 병자가 아니다. 자원과 부를 가지지 못한 자, 재난에 대비할 수 있는 의학과 과학 기술 정보를 가지지 못한 자가 바로 환경 위기 시대의 약자인 것이다. 이상 기후에 대처하는 실력이 국가적 부의 실력이 되는 것도 그래서이다.

2003년 폭염 재난 때 프랑스 전기전력공사는 전력 공급의 한계를 절감해야 했다. 프랑스의 주요 전력 공급원은 원자력이다(전체의 78%). 그러나 전체 58개 원자로 가운데 15개는 이런저런 이유로 가동할 수 없었다. 더위에 물이 졸아드는 바람에 수력발전기(13%)는 무용지물이었다.

석유 및 석탄, 천연가스 같은 에너지원도 별다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이들은 바로 온실 효과의 주범들이다. 이미 독일 등 유럽 선진국들은 재생 가능 에너지 개발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

자연 재난 앞에 빈부 격차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사회학자들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 뚜렷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경제 산업 선진국과 빈곤 국가의 환경 오염 분담금이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2월부터 정식 발효되기 시작한 교토 협정이 프랑스에서 최근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전지구 이산화탄소의 4분의 1을 방출하고 있는 미국이 빠져버린 마당에 교토 협정이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프랑스인은 이제 더위가 오면 바캉스 짐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 근심이 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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