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의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5.05.2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업 메세나 활동의 전범 보여준 아름다운 행보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이 지병인 폐암으로 타계하셨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저는 경영자로서 고인의 능력을 알지 못합니다. 고인을 직접 뵌 적은 몇 번 없지만 문화예술계에 한 다리 걸치고 있는 기자로서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합니다. 문화예술계에 그가 남긴 선 굵은 행보가 다른 기업가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업 메세나의 정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문화예술계 지원은 일회적이고 이벤트적이지 않았습니다. 문화예술인들이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헤아린 그는 지속적으로 조용히 지원했습니다. 뛰어난 감상자였던 그는 탁월한 안목을 바탕으로 메세나 활동에서도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낼 수 있는 지원을 했습니다. 대형 이벤트 공연에 쓸데 없이 거액을 쏟아 붓는 다른 기업의 무대뽀 지원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박 명예회장의 메세나 활동 중에 가장 돋보였던 것은 ‘금호현악4중주단’의 창단과 운영이었습니다. 역량 있는 연주자들로 4중주단을 구성한 그는 60개국에서 70여회 콘서트를 열게 해주어 한국의 발전된 클래식을 세계에 알리도록 도왔고 실내악 불모지였던 국내 음악시장에 실내악 붐을 일으켰습니다.

음악 영재 키워서 세계적인 교향악단과 협연 주선

효과적인 메세나 활동을 위해서 금호문화재단을 설립한 그가 말년에 집중했던 지원 프로그램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음악영재를 발굴해서 키우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계 10대 오케스트라 초청 공연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전자는 그의 메세나 활동이 정제되어 있음을, 후자는 그의 지원이 중후장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이었습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 바이올리니스트 이유라, 권혁주, 레이첼 리, 김소옥, 김혜진, 첼리스트 고봉인 등이 금호문화재단의 음악영재 지원프로그램의 도움으로 차세대 연주자로 성장했습니다. 2003년부터 시작한 ‘세계 10대 오케스트라 초청 프로젝트’를 통해 뉴욕필하모닉, NHK 교향악단,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 등의 세계 정상급 교향악단들이 내한공연을 가졌거나 가질 예정입니다. 

박 명예회장의 메세나 활동이 가장 절묘한 하모니를 빚어내는 순간은 이 둘이 하나가 될 때였습니다. 그는 세계 10대 오케스트라를 초청했을 때 자신이 키운 음악영재를 협연시켰습니다. 손열음을 주빈 메타에게 선보인 그는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내한 공연을 가질 때, 당당히 협연할 수 있도록 주선했습니다. 음악영재의 활동을 꾸준히 지원하고 세계무대 진출을 위한 초석까지 놓아주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박 명예회장의 치적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는 바로 고 윤이상 선생을 기려 만들어진 통영국제음악제를 후원한 것입니다. 그의 도움으로 통영국제음악제는 빠른 시간에 국제적인 음악제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통영국제음악제를 후원함으로써 현대음악의 발전에 큰 축을 담당했던 윤이상 선생의 음악적 역량이 국내에 이어지도록 도왔습니다.  

마지막 꿈은 세계적인 오페라하우스 건축

통영국제음악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그는 통영에 오페라하우스를 짓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오페라하우스를 세워 미항인 통영을 세계적인 음악도시로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오페라하우스 자리로 점찍은 곳은 박정희 대통령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적지를 방문할 때 묵기 위해 만든 호텔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무로 지켜낸 강토에 예술의 향기로 덧칠한다는 점에서 이 계획은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었으나 통영의 도시 규모를 생각했을 때, 오페라하우스를 짓는 것은 사실 무모한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페라하우스 건설 계획을 밝힐 때 그의 눈은 희망으로 이글거렸고 그의 말은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좌중을 사로잡는 그의 카리스마에 퇴락한 호텔에 웅장한 오페라하우스를 덧입혀 상상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박 명예회장의 죽음으로 이제 통영 오페라하우스의 꿈은 난망해진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이명박 서울시장은 한강 중지도에 오페라하우스를 짓는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비록 그 오페라하우스에서 오페라를 즐기지는 못하더라도 한강 조망권에서 오페라하우스를 보는 순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미묘한 예술적 파장이 생길 것입니다. 오페라하우스에서 발원한 예술의 선율은 한강 물줄기를 따라 일파만파의 감동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오페라하우스 건설 소식이 가슴이 설레어 저는 서울시의 오페라하우스 기획단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서 얻은 것은 실망뿐이었습니다. 아니 절망이었습니다. 책임자들은 자신들이 오페라하우스와 관련해서는 문외한이라고 실토했습니다. 외국의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오페라하우스의 적정 좌석수를 산출하는 프로그램을 찾았다고 좋아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고민했습니다.

예술을 지원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술을 이해하고 즐기면서 지원한다면 단순히 업적을 위해, 생색을 내기 위해 지원하는 것보다 그 효과가 비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부디 제2, 제3의 박성용 명예회장이 나와 척박한 한국의 문화예술계에 단비를 내려주기를 기대해 봅니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이 예술의 향기로 채워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