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2세 김형률씨의 죽음 앞에서
  • 정희상 전문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5.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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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판 기사] “그들이 외롭게 병마와 싸우는 한 대한민국은 정상 국가 아니다”

 
20여 년 넘게 병마와 싸우며 한국 원폭 피해자 2세의 건강과 권익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온 한국원폭 2세 환우회 김형율 회장(34)이 지난 5월29일 끝내 숨을 거뒀습니다. 

2002년 봄 자기가 원폭 피해자 2세로서 유전병을 앓는다는 주장을 처음으로 공론화한 김형률씨의 고통스러운 삶과 활동에 대해 <시사저널>은 그동안 세 차례에 걸쳐 보도했습니다. 
  
고인은 2002년 ‘원폭2세 환우회’에 이어, 그 이듬해에는 ‘원폭2세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원폭 2세 환자의 권익을 되찾기 위한 싸움을 벌여왔습니다.

김씨는 지난 5월20일부터 사흘 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의 과거 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심포지엄에 참석하고 귀국한 뒤부터 건강 상태가 급격하게 악화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인 1983년 급성 폐렴으로 병원을 드나들기 시작한 김씨의 정확한 병명은 선천성 면역 글로블린 결핍증. 김씨의 어머니 이곡지(6)씨는 여섯 살이던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 방사능에 노출된 뒤 지금까지 종양과 피부병 등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김씨는 폐기능이 정상인의 30% 수준에 지나지 않아 계단으로 오르내리기도 버거워 했습니다. 담배 연기나 탁한 공기를 들이마시면 기침이 멈추지 않아 40여 분이나 몸을 가누기 힘들어 지곤 했습니다.

숨지기 나흘 전인 5월25일 시사저널 기자 앞으로 마지막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삼가 김형률씨의 명복을 빕니다.

다음은 기자가 지난 3년 동안 김형률씨의 삶과 투쟁을 취재한 결과를 정리한 글입니다.  일반 기사와 달리, 비교적 분량이 많습니다(200자 원고지 100매 정도).

김형률씨에 대한 글은 다음과 같은 소제목으로 나누었습니다.

--원폭2세 환우 모임 참관기
--한국인 원폭 피해의 실상
--피폭 2세를 처음 취재한 경위
--김형률씨와의 첫만남
--원폭 2세 찾아 대구, 합천으로 가다
--환우회 결성과 인권위 진정 과정
--인권위 실태 조사의 한계


피폭자 2세 환우 모임

 
쪽빛 바다가 발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부산시 동구 수정동 산자락에 자리한 연립주택 한켠에서 젊은이가 핼쓱한 얼굴로 연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매일같이 침상에 누워 링거를 맞으면서도 그가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화면은 포털사이트 다음에 있는 한 인터넷 카페이다.

그 자신이 인터넷 카페를 개설해 운영해온지 올해로 2년 째. 170여명의 회원을 확보한 조그만 카페이지만, 여기에는 그의 운명이 걸려 있다. 아니 그가 목숨을 걸었다.

올해 34세인 그의 이름은 김형률씨. 김씨는 선천성 면역 글로블린 결핍증이라는 희귀병과 싸우고 있다. 그동안 20여 차례 이상 계속된 폐렴 재발로 만성 폐쇄성 폐질환을 앓는 김씨는 현재 폐기능이 70% 이상 상실되어 나머지 30%만 가지고 호흡을 한다. 그래서 계단을 오른다든지 담배연기와 같은 탁한 공기를 들이마시면 자지러지는 기침이 계속되어 보통 40여분씩 몸도 가누지 못한다.

의료진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지금 기적과 같은 삶을 산다. 이 질환을 앓는 환자는 대개 10세 이전에 세상을 떠난다. 김씨 외에 그동안 국내에서 이병으로 가장 오래 산 경우는 29세로 보고 되고 있단다.

그러나 김씨의 질환은 단순히 개인적인 희귀병이 아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사정이 있다. 그는 원자폭탄 피폭자 2세이다. 유전성 질환인 면역 글로블린 결핍증에 대해 그는 어머니가 히로시마에서 겪은 원자폭탄 피폭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심하게 몸이 아프면서도 숨어서 지내는 전국 각지의 피폭 2세 환자들을 수소문해 인터넷 카페를 만들었다. 혼자서는 시시각각 목을 조여 오는 병마조차 감당하기 힘든 상태이련만 자기 처지와 비슷한 피폭 2세 환자 60여명을 찾아내 인터넷 카페 운영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면 그의 어디에서 저런 힘이 솟아날까 싶다.

아직 겨울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2005년 3월 초순, 김씨는 쿨럭이는 기침을 가까스로 참아가며 며칠째 전화 번호를 눌러 댔다. 벌써 수백통째다. 지난 2년간 연락처를 찾아낸 전국 각지의 피폭 2세 환자들과 그 보호자인 원폭 피해자 부모에게 거는 전화였다.

통화는 3월12일,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에 있는 원폭피해자 회관에서 열기로 한 ‘피폭자 2세 환우회 오프라인 모임’에 꼭 참석해달라는 당부로 끝을 맺었다. 2004년 9월1일 첫 번째 모임 개최에 이어 다시 시도하는 이번 환우회 모임은 김형률씨에게는 목숨을 건 행사이다.

 “정기자님, 그날 환우 모임에 꼭 와주실거죠?”
 “반드시 가리다. 2세 환우들을 많이 봤으면 싶은데 반응은 어떤가요?”

 “한집당 서너통씩 전화를 거는데 병세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자기를 드러낼지를 놓고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많이 아픈 환자와 그 부모는 모임 참석에 적극적이고, 신체 이상은 있지만 아직 움직일만한 2세들의 경우 참석하지 않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겠구나 싶었다. 또다른 차별과 편견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그들 스스로 깨기에는 아직 우리 사회의 토양이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장애인이나 환자 등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사는 사회적 풍토가 유럽이나 다른 선진 각국에 비해 우리가 유난히 취약하다는 점은 익히 알려져 있는 터이다.

그래도 김형률씨의 ‘목숨을 건’ 열정에 하늘은 무심하지 않았다. 3월12일 경남 합천 피폭자 복지회관에서 열린 제2차  환우 모임에 40여 명의 피폭 2세 환우 가족이 참석한 것이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심진태 합천 지회장은 이날 김형률씨가 극도로 악화된 건강상태 속에서도 기를 쓰고 피폭자 2세 환우회를 꾸려온 과정에 대해 “원폭 피폭 60년 동안 건강한 우리 1세들도 이렇게 열심히 뛰고 연락해서 스스로의 조직을 만든 일이 없었다. 병마와 싸우는 김형룰씨의 이런 열정은 한국 피폭자 운동에 큰 모범을 보여주는 사례이다”라고 말했다.  

행사를 주관한 김형률씨는 그동안의 활동 결과를 보고하면서 피폭 2세의 고통은 이제 가만히 앉아서 호소만 하고 있으면 아무도 해결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원폭 2세의 원인 모를 질병과 후유증이 우리 개개인의 책임은 아니지 않습니까. 왜 정부는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습니까. 어렵지만 이렇게 모인 환우와 가족들이 힘을 합쳐서 복지부와 인권위원회, 일본대사관을 찾아다녀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추진하겠습니다”.

김형률씨의 굳은 의지표명에 비슷한 처지의 참석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보냈다. 말하는 것조차 힘에 부쳐 뒤이은 낭독문은 그의 부친이 대신 읽어가며 치른 눈물겨운 행사였다.

사실 피폭자 문제는 물론 장애인과 희귀병 환자 인권 문제에 한국 정부가 그동안 지나치게소홀했던 것은 분명하다. 헌법에는 모든 국민의 건강권과 기본 생존권을 명시해두고 있지만 진정 국가와 사회의 돌봄이 필요한 희귀병 환자들은 찬밥신세였다.

그동안 국가와 세상이 당연히 버릴 줄 알고 있었기에 천형처럼 숨어 살아야만 했던 한센병 환자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들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당연한 헌법 정신이 나라가 세워진지 60년이 다되어서야 반영되어 17대 정기국회에서 특별법 제정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달에 3백만원 씩 하던 백혈병 환자들의 글리벡 약값에 대해 의료보험료를 적용하지 않아 속수무책으로 환자들이 죽어가도록 방치했던 것이 국가의 태도였다. 그나마 뒤늦게 환자들이 쓰러져가며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자 정부는 마지못해 대책을 내놓음으로써 약자와 소외된 자에 대한 인권의 후진성을 다시 한번 입증해주었다.

피폭 2세의 건강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부의 무책임성과 잔인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원폭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피해의 정도는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위험과는 비교하기 힘든 특수성과 심각성이 있다.

이들의 고통이 일부 2세 환우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으므로 국가는 인권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는 이들에 대한 특별한 지원체계 마련하는 데 인색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지금껏 이런 인권보장 책임을 외면했다.  나아가 일본과 미국 정부가 배상 책임 이향하지 않는데도 계속 눈 감아준 점 역시 피해자의 본국으로서 당연한 책임을 외면한 것이다.

이날 김형률씨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어렵게 만든 2세 모임 장소에는 서울의 보건의료 운동 단체 인사와 평화운동 관계자들도 여러 명 참석했다. 병세가 심해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것만 같은 김형률씨가 발로 뛰는 것을 보며 감동을 받아 기꺼이 김씨를 껴안고 ‘사람사는 세상으로 함께 가겠다고 나선 이들이다.

행사를 마친 김형률씨는 이날 유난히 합천댐이 보고 싶다고 했다. 부산에서 함께 온 그의 부모님과 원폭피해자 협회 심진태 합천 지회장, 그리고 서울에서 온 평화 인권운동 관계자 일행은 함께 합천댐을 찾았다. 봄을 시샘하는 매운 바람이 그의 아픈 폐를 모질게 건드려대 고통스러워했지만 이날 김씨의 마음만은 모처럼 밝았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 말은  피폭자 2세 환우회 카페에 걸려있는 모토이다. 시시각각 죽음과 맞서고 있는 김형률씨의 절실한 염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합천댐정상에서 김씨는 나에게 ‘너무 힘들어 죽음 앞에 굴복할 것만 같다’라고 말했다. 지금껏 피폭 2세 건강 문제를 소 닭보듯 하는 보건복지부의 태도 때문이다.

한국인 원폭 피해의 실상은?

1945년 8월 6일과 9일, 단 두개의 폭탄으로 순식간에 70만여 명의 사상자를 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는 인류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비극이었다. 비록 원폭 투하로 5년에 걸친 태평양전쟁과 36년에 걸친 일제의 한반도 강점은 종식되는 계기를 맞이했지만 핵의 후유증이 남길 상처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섬광은 한순간이었지만 그 버섯구름 아래 펼쳐진 참상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것이었다. 원폭이 떨어진 지점인 폭심으로부터 반경 1km 안에 거주하던 사람의 90%는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당시 인구 42만명이 거주하던 히로시만시에서는 7만명이 즉사했다. 그해 말까지 16만명이 후유증으로 죽었고, 피폭 15년 뒤에는 20만명이 사망했다. 인구 27만명이던 나가사키 시에서는 그해 말까지 7만4천명이 사망했다.

피폭 당시 화강암을 녹일만큼 뜨거웠던 섭씨 6천도의 열기, 잇딴 핵폭풍과 열풍으로 인한 시가지  초토화, 그리고 방사능 피폭에 따른 급성 장애가 대량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 요행히 목숨을 부지한 피폭자도 그 비참함에서는 죽은 자보더 더 나을 것이 없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대부분 대폭발 후 찾아온 죽음의비(방사능을 포함한 검은 비)에 노출돼 시간이 지나면서 원인모를 병마를 키워나갔다.

가공할 핵참사 현장인 두 도시에는 일제에 의해 징용 징병 등으로 끌려간 약 10만여 명의 한국인과 가족이 살고 있었다. 군수 공장이 밀집해 있던 지역이라서 히로시마에 7만명과 나가사키에 3만명의 조선인이 몰려 살았다. 그 가운데 히로시마에서 3만여명, 나가사키에서 1만여명의 한국인이 즉사했다.

살아남은 5만여명의 한국인도 대부분 심한 화상과 부상을 입었고, 여기에 더해 죽음의 비로 인한 방사능 질환을 앓기 시작했다. 이중 2만3천여 명은 일제가 항복하자 부산행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원폭으로 입은 상처나 화상도 변변히 치료받지 못한 채 아픈 몸을 이끌고 귀국하는 길은 혹독했을 수밖에.

태풍이 대한해협을 내습하는 9월과 10월에 집중적으로 건너왔는데 아직 연락선도 제대로 운행하고 있지 않아 대부분의 조선사람들은 작은 암거래 선박에 의지해 바다를 건널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고향 땅을 밟기도 전에 귀국길이 황천길이 된 피폭자도 부지기수였다.

살아서 가까스로 조국땅에 발을 디딘 이들에게도 희망 대신 무지로 인한 주변의 오해와 편견이 먼저 반겼다. ‘원자병은 전염된다’는 밑도끝도 없는 악성 소문에 친지들조차 기피했다. 소란스런 해방정국과 이어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이들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생계조차 막막한 상황에서 수많은 피폭자들이 진료는커녕 약한 첩 변변히 못써보고 갑자기 나타나는 이상한 증상에 시달리다 삶을 마감했다. 같은 원폭 피해자이면서도 ‘패전 국민’인 일본인 피폭자들은 곧바로 일본정부 차원의 무료진료를 받았고, 미국에서조차 원폭 후유증 연구 및 치료 기금을 일본에 대던 상황에 비춰볼 때, 가장 억울한 피해자인 한국인 피폭자들에게 드리운 운명을 가혹하고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귀국한 피폭자들이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신음하며 원인 모를 질병으로 하나둘씩 스러져가고 있던 1965년, 박정희 정부는 한일협정을 통해 이들 피폭자를 포함한 일제 강점기 피해 국민들이 배상받을 권리를 포기하는 ‘청구권협정’을 체결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67년, 그동안 숨어 살다시피 했던 피폭자들이 비로소 한데 모여 한국원폭피해자협회를 만들었다. 일본을 상대로 침략전쟁에 대한 보상과 치료를 요구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초창기에 협회에 등록한 피폭자 수는 2천여 명 뿐이었다. 후유증으로 일찌감치 사망한 이들도 많았지만 사회적 편견이 두려워 알고서도 가입을 기피한 피폭자도 적잖았다. 이렇게 한일 양국 정부가 외면해버린 피폭자들이 뒤늦게나마 움직이자 양국 정부의 반응은 냉담했다. 68년 3월 일본 아사히 신문에서 특파원의 눈이라는 지면을 통해 ‘한국에도 원폭피해자가 살고 있었네’라고 본국에 타전하고서야 그 실태가 일본에 처음 알려질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하랴.

협회 결성 뒤에도 한동안 계속되던 한국정부와 사회의 무관심에 그나마 변화가 생긴 때는 1974년 교회여성연합회 등 민간단체가 피폭자의 치료와 대일 배상 요구, 모금운동 등을 펴나가면서부터였다. 민간차원에서나마 처음으로 국내 피폭자 실태 파악 작업과 원자병의 참상 홍보, 가해국 일본에 대한 피해보상 청구 및 모금운동 등 다양한 작업이 이뤄졌다.

그러나 피폭자들의 끈질긴 요구와 투쟁에도 한일 두 나라 정부는 좀체 지원의 손길을 보내지 않았다. 73년 12월 일본 민간단체인 ‘핵병기 금지 협회’에거 1천9백만엔을 모아 합천에 원폭 진료소를 건립해 경상남도에 기증한 것이 그나마 일본도 한가닥 양심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최초의 사례였다.

그 후 한국 교회여성연합회와 피폭자 협회의 끈질긴 노력으로 한국인 피폭자 문제가 국제적 이슈로 떠오르자 일본 정부는 마지못해 ‘원폭피해자 진료협정’을 체결하고, 히로시마에 있는 원폭 병원에서 한국인도 무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가난과 질병, 고령으로 시달리는 한국인 피폭자들에게 1970~80년대에 자비로 일본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라는 것은 이들이 처한 현실을 너무도 무시한 처사였다.

1987년 원폭피해자 협회가 일본정부에 23억달러에 이르는 피해보상을 청구하자 일본 정부는 65년 한일협정으로 이미 끝난 문제라며 고개를 돌렸다. 80년대 말 이같은 한일 양국 정부의 비인도적 처사와 무성의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한국정부는 그제서야 일본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0년 들어 비로소 쥐꼬리만한 조치가 나왔다.

한일 양국 정부가 일본 돈 40억엔씩 총 80억원(당시 1백84억원)을 부담해 한국인피폭자 치료기금을 지원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인도적 차원이라며 40억엔을 출연하겠다고 밝혔지만 그것도 일시불이 아닌 분할 지불에다가 10억엔은 의료 장비로 대신했다.
절반을 부담하겠다던 한국정부는 제대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일본에서 받은 40억엔의 현금과 장비는 대한 적십자사의 관리 아래 합천에 5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폭피해자 치료시설인 복지회관 건립에 쓰였다. 그것도 1991년과 93년 두차례 뿐이었다.

그러면 일본인 피폭자들의 사정은 어땠는가. 일본 정부는 1957년 ‘피폭자 의료법’을 제정한 이해 1968년에는 ‘피폭자 특별조치법’, 1994년에는 ‘피폭자 원호법’등을 잇따라 제정해 피해자들의 치료와 재활을 도왔다.

그들은 피폭자 의료법이 제정된 57년 이래 1998년까지 약 25조원을 투입해 피폭자와 가족을 구호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시를 중심으로 전국에  원폭전문병원을 세우는 등 59년 동안 ‘원폭치료 전문시스템’을 구축했다. 일본인 피폭자는 건강수첩을 발급받아 일본 전역의 어느 병원에서나 고가의 검사 장비를 저렴하게 이용해 각종 검사와 치료 입원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일본인 피폭자는 일반인처럼 차별없는 복지 혜택을 충분히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일본인 피폭자의 10%인 7만여명의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은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서 핵무기에 당했지만 일본 정부의 무책임과 한국 정부의 외면에 가려 지난 60년간 철저히 인권유린과 차별대우를 받아온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인 피폭자는 지금 ‘병고와 빈곤의 악순환’에 시달리며 남은 여생을 보내왔다.

그나마 한국인 피폭자 곽귀훈씨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피폭자 원호법 평등적용’을 요구하는 소송이 2001년 6월1일 승소하면서 한국인 피폭자들이 일본을 방문할 경우 건강수첩을 발급받아 무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적어도 일본인 피폭자와 동등한 원호를 받고자 하는 한국인 피폭자의 오랜 염원 중 한가지가 실현된 것이다. 커다란 진전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 한국원폭협회에 등록된 피폭 1세대는 약2천2백여명. 2만여명이 귀국했다고 볼 때 1만 7천여명은 누락된 셈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병마와 고령으로 세상을 떴다. 그러나 피폭자에 대한 사회의 무지와 편견, 정부의 외면과 방치 등으로 아직도 피폭 사실을 숨긴 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최근까지 원폭피해자협회에 등로간 피폭자 2천2백여명 중 절반 가량이 일본을 방문해 수당 수급권을 취득했다. 피폭자 2세와 3세는 약 5만명으로 추산되지만 이 가운데 등록된 2세는 8천여명에 불과해 이들이 1세보다 더 노출되기를 꺼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대부분의 피폭자 1세들이 병마와 가난 때문에 자기의 원폭 후유증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사이에 일부 2세들 가운데 ‘이상한 질병’이 발생하면서 이들 가족은 남몰래 흘리는 눈물도 많아졌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 질환에 시달리는 피폭 2세 환우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피폭 2세를 처음 취재한 경위

사회적 편견과 냉대 등 부당한 대접이 두려워 누구나 드러내려 하지 않는 문제를 용기있게 세상에 스스로 드러내는 경우를 ‘커밍아웃’이라 한다. 2002년 봄, 김형률씨가 피폭자 2세 환우 문제를 스스로 커밍아웃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피폭 2세의 건강 문제는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몇 차례 추적취재를 벌여 기사화한 바 있었는데 피폭자의 인권과 관련해 매우 민감하고 복잡한 주제였다. 

내가 최초로 피폭 2세 문제에 주목한 때는 광복 50년을 맞이하던 1995년 해방 무렵이었다. 당시만 해도 사회적 관심은 주로 원폭 1세대 문제에 모아지고 있던 때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의 피폭자들은 한일 양국의 무관심 속에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1세 문제 해결도 벅찬 판국에 그들의 2, 3세 문제는 언론 보도의 사각지대에 놓일 수밖에. 

나는 1990년대 중반 교회여성연합회의 도움을 받아 피폭 2세 환자들을 취재하는 그 과정에서 이 주제가 인류의 미래에 엄청난 숙제와 의미를 던져주는 무게를 가졌으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사실상 ‘금기’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가운데 일부 피폭자 가정에서는 2세 또는 3세에게 나타나는 원인모를 희귀 질환이나 신체적 이상 현상을 지켜보면서 ‘혹시 그 일 때문에,,,’하며 불안해하는 가정들이 적잖았던 것이다. 남몰래 고통 받는 이들의 딱한 사정을 먼저 알아채고 어루만져 준 곳이 종교계 시민운동 단체인 교회여성연합회였다. 이때 나는 다양한 질환을 앓고 있는 피폭자 2세들 가정을 방문한 뒤 실태를 조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기도 성남시 태평동에서 눈물로 세월만 보내는 백효순씨 일가족이었다. 내가 그들의 집을 방문했을 때 백효순씨와 남편, 그리고 백씨이 친정어머니는 기구한 가족의 병력에 하늘만 원망하고 있었다 .

백씨는 일곱 살난 해부터 시작된 근육이완증으로 팔다리를 제대로 못쓰고 앉은뱅이 신세가 되어 남편과 친정어머니에 기대 겨우 살아가야 하는 딱한 처지였다. 이들 가족의 가슴이 더 미어지게 만든 것은 그 무렵 백씨가 낳은 딸이 뇌성마비와 안막감염증에 걸려 앞을 보지 못한 채 식물인간처럼 연명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들 가족은 대를 이어 발생하는 이상한 증세들이 백씨 친정아버지의 원폭 피폭이라는 불행에서 말미암았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경기도 이천이 고향인 백씨의 친정아버지는 일제 말기 징용으로 끌려가 1945년 8월9일 나가사키에서 피폭당했다. 요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귀국 후 방사능 피폭 후유증으로 다리가 오그라드는 증세가 나타나 노동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평생 방에만 틀어박혀 보내다 끝내 두 다리로 일어서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뒤 백씨 가족에게는 아버지와 똑같은 원인모를 질환이 줄줄이 나타났다. 멀쩡하던 백씨의 큰오빠도 다리가 오그라들더니 일어서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어서 언니와 백씨 자신도 같은 증세를 보이며 지금까지 앉은뱅이가 되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누가 보아도 방사능 유전성을 의심할만한 백씨 가족의 병력도 의료진에게는 뭐라 말하기 조심스런 대상일 뿐이었다. 나는 백씨 가족을 진찰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의료진을 찾아가 만났다.

“의학적으로 뭐라고 단정하기 힘든 증세다. 근육이완증이라는 사실만 확인했지 왜 그런 증세가 생겼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가족은 원폭 후유증이라고 믿고 있는데 우리 임상팀으로서는 그에 대한 조사를 할 수가 없었다. 역학조사팀이 1세부터 3세까지 오랜 시간 조사해야 연관성을 규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한마디로 유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애매한 답변이다.

이와 비슷한 딱한 경우가 원폭 3세에게도 있었다. 서울 오류동에 사는 박아무개씨(27)는 온 몸이 검은 털과 점으로 뒤덮여 있다. 박씨의 어머니는 “시아버지가 나가사키에서 피폭당한 뒤 귀국해 평생 다리를 제대로 못쓰고 몸에 반점과 털이 나서 사시다 80년대 말에 돌아가셨는데 2세인 남편과 시동생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가 우리 아들에게 나타났다”라고 말했다.

국내 큰 병원이라고는 안가본 데 없이 다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았지만 한결같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 증세’라는 답변만 했다고. “우리 부부는 저 아이가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방사선 유전증상이라고 확실하게 믿고 있다”.

이런 박씨 역시 교회여성연합회의 도움으로 세브란스 병원 의료진에게 진찰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세’라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이처럼 비록 소수일지라도 원인 모를 질환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피폭자 2,3세는 원폭 1세대와는 또다른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절실한 형편이다. 특히 이런 가정의 원폭 1세대는 이상한 질환을 앓는 자녀를 돌볼 여유조차 없이 자기의 피폭 후유증마저 감당하지 못한 채 일찍 사망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피폭 2,3세 문제는 더 이상 사회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우려한 피폭 1세들이 자녀들이 앓고 있는 고통을 드러내기를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2000년대 들어 피폭 2세 본인이 커밍아웃하면서 적극적으로 자기의 처지에 대해 국가와 사회에 책임을 묻는 작업에 나선 김형률씨의 사례는 나에게 다시금 그들의 문제를 들여다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김씨의 움직임이 앞으로 피폭자 권익 운동의 새로운 방향설정과 핵 공포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사건이 될 것이 틀림없다.

김형률씨와의 첫만남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왜 희귀병마의 고통에 내 인생을 저당잡히고 있는가”

김형률씨가 자신의 희귀병에 대해 알고 난 2001년부터 스스로에게 물었다는 질문을 나에게 처음 던진 때는 2002년 7월 초순이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지 57년 째 되던 날인 2002년 8월7일, 나는 그를 만나러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날 밤 그와 만나기로 사전 약속한 부산대학교 정문 앞에는 한치 앞을 분간하기 힘든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폭우 속에 모습을 드러낸 김씨는 삐쩍 마른 몸매에 연신 자지러지는 기침을 해대는, 누가 보아도 한눈에 심한 기관지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였다. 163cm의 키에 37kg. 한손에는 나에게 건네줄 두툼한 서류뭉치를 들고 있었다. 그는 부산대학교 도서관에서 자기 병에 관련된 문헌을 뒤진 끝에 복사해서 나온 길이었다.

“내 자신으로 보면 개인적인 병이지만 결코 개인에게만 떠넘겨버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국정부와 일본정부 등 책임 있는 곳에서 원폭 피폭자 가족의 건강 이상 실태에 관심을 기울이고 책임을 져야 한다”.

김씨는 이날 나에게 복사해온 한 무더기의 서류를 건넸다. 유전학 관련 사전과 1995년에 실시했다는 김씨의 병에 대한 부산 침례병원 측의 검사 소견서, 그리고 국내외 내과학회지에 실린 방사능 유전병과 관련된 각종 문헌들이었다. 김씨는 이미 방사능 유전학 분야에 `박사‘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피폭자 어머니를 둔 내 병은 문헌상 X염색체 열성 유전에 기인하는 유전병입니다”. 웬만한 이라면 숨길법한 특이 질환과 가족력을 이렇게 기자에게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나선 김씨에게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저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아무도 제 병의 원인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는 상황에서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제 생존이 걸린 몸부림이기도 합니다만 비슷한 원인으로 각종 질환을 앓고 있는 피폭자 2세들의 건강에 누군가 관심을 기울이고 책임져야 한다는 점에서 결코 개인적인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연신 기침을 해대면서도 애써 목소리에 힘을 실은 그에게서는 건강한 이에게서도 찾기 힘든 강인한 생명력이 전달되어 옴을 느껴졌다. “하늘이 나에게 이런 질환을 내린 것은 소외 당한 채 죽어가는 피폭자 2세 환자들 문제에 짧은 삶이라도 바치라는 소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날 밤 김씨의 집을 차았다. 수정동 산자락에 자리한 김씨의 집에서는 소녀 때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한 어머니 이곡지씨와 피폭자가 아닌 아버지 김봉대씨가 우리 일행을 맞았다.

“태어날 때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동생은 18개월 만에 죽고, 형률이만 살아남았소.”
 3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난 형률씨만 유독 건강이 나빴다. 해마다 한해에 20일 정도는 폐렴을 앓아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고.

“아들의 병이 원폭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점도 7년 전에야 처음 알았어요. 방사능 유전과 연관 있다면 개인적인 병이라기 보다 국가대 국가간에 범죄에 의해 생긴 병이고, 그 책임도 일본 정부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평생 아들의 병치료를 하느라 어렵사리 지켜오던 2층짜리 단독주택마저 팔았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병원을 오가며 근근히 마쳤지만 고교에 진학하면서부터 증세가 심해져 도저히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결국 고교를 중퇴한 김형률씨는 이때부터 초량에 있는 침례병원에서 20년간 전속 치료를 받으며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 4년제 대학을 마칠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아픔을 이겨내며 동의전문대 컴퓨터학과로 옮겨 학업의 꿈을 계속 잇는 투지를 과시했다.

아들이 살아온 과정을 들려주는 아버지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그렇게 자꾸만 밀려나 지은 지 25년 된 산비탈 허름한 연립주택까지 오게 된 아버지는 병세가 개선되지 않는 아들 형률이만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그러나 언제 쓰러질지 모를 안쓰러운 아들이 저리도 정열적으로 자기 병의 뿌리 찾기에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죽는 날까지 기꺼이 그의 다리가 되어주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말못할 가슴앓이를 해왔다. 아들이 자기 때문에 이런 몹쓸 유전병이 걸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믿고 싶지 않다가도 이젠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내가 6살에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했지예. 당시 아버지와 9살난 언니는 즉사했고, 엄나와 여동생, 나 셋이 살아남아 해방되던 해에 고향 합천으로 귀국했어예”. 피폭 후 이곡지씨와 여동생은 평생 원인모를 피부병으로 고통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자기의 피폭 후유증이 2세에까지 영향을 미칠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내가 저 애를 낳았지만 지금 저렇게 살겠다고 뛰는 걸 보면 불쌍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괜히 밉고 대견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복잡합니더”.

이렇듯 원인모를 질환에 시달리는 자녀를 둔 피폭자들은 어디에 하소연할 데 없는 죄스러움과 미안한 마음을 안고 살아간다. 사실 자녀의 질환이 방사능 유전과 관련이 있더라도 결코 그들 개개인의 책임이 아니건만 현실에서 그들이 받는 마음 상처는 너무도 깊기만하다.

김형률씨가 자기의 병이 방사능 유전과 연관이 있다는 단서를 잡은 것은 지난 2001년이었다.  1995년 폐렴 증세가 심해졌을 때 부산의 한 종합병원에 입원해 검사와 치료를 받았는데 이때 김씨의 희귀병은 의료진에게도 연구 대상이었다.

피폭자 어머니를 둔 가족력과 김씨의 질환의 상관관계에 주목한 의료진은 김씨를 대상으로 연구를 벌여 <면역글로불린 M의 증가가 동반된 면역글로불린 결핍증 1례>라는 제목의 의학 논문을 작성해 학계에 보고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2001년 어떤 경로를 통해 나에 대한 연구 논문이 발표됐다는 사실을 알고서 이를 입수한 결과 내 벼이 방사능 유전과 연관된 질환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김형률씨는 이 논문을 입수한 뒤 처음에는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1995년 입원했을 때 장기간에 걸쳐 진료한 의료팀이 김씨를 연구 대상으로 논문을 작성하고도 그 뒤로 한번도 귀띔조차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1년 논문을 입수하고서야 이 사실을 안 김씨는 침례병원 담당 의료진을 찾아갔다. 그러나 의료진은 그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는 않았다고 한다.

나는 방사능 유전 문제의 진실과 관련해서는 물론이고 환자의 기본 인권 문제와 관련해서도 침례병원 의료팀이 김씨에게 자초지종에 대해 똑부러지는 입장을 밝혀야 된다고 생각했다. 의료 직업상 환자에 대한 신의 성실의 의무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튿날 나는 김씨를 대동해 당시 연구를 수행한 부산 침례병원을 찾아 연구 대표인 황아무개 내과 과장을 만났다.

“가족력에 피폭자가 있어서 희귀병 사례인 김형률씨의 질병에 대해 연구 보고서를 냈다. 유전적 원인을 보다 확실히 밝혀내려면 유전학 분야에서 전문적인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본다”.

자기의 연구가 방사능 유전 문제와 관련해 파문이 일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 하는 기색이었다. 어쨌든 그의 입장은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학계에 보고를 했으니 관련 전공 분야에서 더욱 깊이있는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씨가 앓는 질병의 정확한 의학적 명칭은 `igM 증가성 면역글로블린 결핍증‘이다. 국제 유전학 사전에는 이 질병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혈청 중의 igG와 igA의 농도가 매우 낮아 항체 결핍 증후군을 나타내는 질환으로  혈청 중의 igM과 igD의 농도는 증가된 상태를 나타낸다. X염색체상에서 열성 유전병으로 유전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해서 자기의 병의 원인의 단서를 찾아낸 김씨는 이후 번민에 휩싸였다. 피폭자 유전병 환자가 자기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한 경우는 아직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프지 않는 다른 형제들에게 사회적으로 미칠지도 모를 부작용도 염려되었다.

자신의 병에 대해 오랜 시간에 걸쳐 아버지와 상의한 김씨는 지난 2002년 3월 15일 드디어 세상에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대구에 있는 `원폭피해자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을 찾은 김씨 부자는 당시 기자회견을 통해 피폭자 유전병 당사자 가족으로서 국가적인 실태조사와 책임 규명을 요구했다. 피폭자 2세로서 최초로 스스로 커밍아웃한 셈이다. 그러나 김씨 가족의 절규는 메아리가 없었다.


피폭2세 찾아 대구와 합천으로 가다

 김형률씨를 처음 만났던 2002년 8월6일 오전, 나는 부산에서 차로 두 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대구의 한 미군기지 앞을 먼저 찾았다. 원폭 피폭자 1세들이 핵을 투하한 미군을 향해 반핵 시위를 벌인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지 57년이 지난 바로 그 시각 아침 일찍부터 대구시 남구 대명동 미군기지 앞에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50여명의 피폭자들이 모여들어 미국과 일본 정부를 성토하는 집회를 열고 있었다.

끔찍한 원자탄 투하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들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로 다들 온몸에 한많은 세월의 그루터기가 그대로 각인된 모습이었다. 이들 중 아직도 얼굴 한켠에 피폭 당시 입은 끔찍한 화상 상흔이 드리운 가운데 집회에 참석한 김영희 할머니의 사연은 남달랐다.

김할머니는 그날 사라져간 한국인 피폭자들 영령을 위로하는 제사상 앞에서 기어이 북받치는 설움을 토해내고 말았다. 그의 설움은 단순히 자기가 몸을 크게 다친 피폭자라는 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피폭 후 귀국해 결혼을 하고 슬하에 5남매를 둔 김할머니는 최근 자녀들에게 `친권포기각서‘를 써줘야 했다. 김할머니에게 천륜마저 앗아가버린 그날 이후의 비극은 이렇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던 무렵 김할머니는 히로시마의 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의사의 지시로 급한 산모의 출산을 준비하던 오전 11시경, 눈앞이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무너진 병원 건물더미 한견에 깔려있었다.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원폭의 섬광과 열선으로 왼쪽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은 간호사 김영희씨는 그날 이후 중화상 환자가 되어 변변한 치료도 못받고 버텼다. 이상하게 방사능 후유증인지 피를 토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래도 간호사로서 의학적 지식이 있었기에 책에서 본대로 이런 경우 스스로 목숨을 부지하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 고향 대구로 돌아온 김씨는 대구의 한 병원 간호사로 들어간지 얼마지 않아 결혼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씨는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으로만 믿었다. 그러나 비극은 예기치 않은 데서 찾아왔다. 첫 딸을 낳았는데 아이가 자라면서 허벅지에 혹이 생기기 시작했다.

둘째딸도 마찬가지였다. 팔뚝에 주먹만한 혹이 생기더니 어린 나이 때부터 간기능이 급격히 나빠졌다. 간호사인 그녀는 본능적으로 ‘원자병이구나’하고 짚이는 데가 있었다. 그래서 방사능에 좋다는 것은 다 찾아서 자녀들을 정성스레 간호했다. 그러나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자녀 3남매가 비슷한 증상을 보이자 김씨의 남편은 실의에 빠져 모든 것이 아내 탓이라며 걸핏하면 가정 폭력을 일삼았다. 아이들이 자라자 엄마에게 “왜 우리를 낳았느냐”며 원망하고 대드는 일도 잦아졌다. 천형처럼 따라다니는 세 자녀의 신체 이상 증세에 충격을 받은 김할머니는 벼라별 노력을 다 기울였으나 보람도 없었다. 그녀는 죄의식에 시달릴 겨를도 없이 가족에게 버림받고 혼자 살아가고 있다.

기구한 사연을 들려주던 그녀는 “자식들이 철부지일 때는 팔다리에 주먹만한 혹이 생기니 엄마가 피폭자라서 그렇다며 빨리 죽어 없어져 달라는 구박까지 해댔지만 아직도 모진 목숨 붙어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오열했다.

결국 김할머니는 최근 친권포기각서를 요구하는 자녀들에게 각서를 써주고 연락을 두절한 채 지내고 있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54세인 큰딸과 43세인 둘째딸이 의문의 혹덩이 때문에 결혼을 기피한 채 독신으로 살아가고 있다.

당사자들은 그 원인을 원폭 유전으로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호적상으로나마 피폭자 가족 기록을 지워버리려 한 것이다. 죽기 전에 이런 자녀들 데리고 일본에 가서 건강수첩 받아 치료를 해주는 것이 소원이라는 김할머니는 연신 그날의 화상 상처 자국이 남은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이날 위령제에 참석한 이분이 할머니(76) 역시 스스로 원폭 후유증이라고 믿고 있는 자녀들의 건강 이상을 전하며 오열했다. 부부가 함께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한 후 귀국해 3남매를 둔 이분이 할머니의 큰아들은 불임 증세, 둘째는 정신질환, 막내는 폐결핵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24년 전 원폭 후유증으로 남편이 먼저 세상을 뜨자 홀로 3남매를 키워온 이할머니도 피폭 후유증인 만성 백내장에 시달리고 있지만 자기의 건강을 돌볼 겨를도 없이 자녀들에게 나타난 `이상한 증상들‘ 때문에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피폭자 1세들로서는 일부 자녀에게 나타나는 이상한 증상들을 원폭 유전병이라고 강하게 믿으면서도 이를 세상에 드러내는 데는 심적 갈등이 적지 않았다. 위령제에 참석한 피폭자 박용수씨는  “자식들이 나보고 `아부지예, 어디 나가서 피폭자라 하지 마소, 우리들 결혼 안시킬랍니꺼‘라며 역정을 내는 통에 자식에게 지장 줄까봐 말을 몬하겠심더”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히로시마에서 크고 작은 피폭 상처를 입고 살아남은 사람들 중 피폭 후 2~3개월간 방사능 오염지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살다가 귀국한 경우는 일부 자녀 중에 원인 모를 희귀병 증세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가장 많은 피폭자가 있어서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리는 경남 합천으로 발길을 돌렸다. 합천 읍내에서 자동차로 1시간여 달린 끝에 나타나는 오지 마을 쌍책면 상신리에는 피폭자 1세 전상근씨(69)가족이 살고 있었다.

전씨는 9세 때 히로시마에서 부모와 3형제가 피폭당했다. “학교에 가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펑 소리가 들리더니 기왓장이 날아다니고 불바람이 불어댔다. 학교 복도 기둥을 붙잡고 숨어 있다가 얼마 뒤 집에 가보니 집이 다 내려앉고 없어졌다. 몇 달간 히로시마 거리를 헤매며 지내다가 해방되고 귀국해 결혼했고, 4녀1남의 자녀를 두었다”.

전씨는 마냥 담배연기를 허공으로 날려 보내더니 땅이 꺼지듯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원자폭탄을 맞은 것도 모자라 멀쩡하던 자식 3명이 줄줄이 정신이상자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우리 부부는 원자 폭탄 유전병이라고 알고 있다. 지금이라도 유전 검사를 받아 병명을 밝혀 내고 치료를 받을 길을 찾으면 소원이 없겠다”.

전씨의 큰딸 옥남씨(43)와 둘째 딸 영희씨(37)는 지금도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중증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툇마루에 앉은 두 딸 중에 둘째 영희씨의 증세가 한눈에 알아볼만큼 심각했다. 20년 가까이 실어증에 걸린 채 사실상 식물인간처럼 돌봐주는 이가 없으면 살지 못한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큰딸 옥남씨도 말을 걸어보니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기색이 이내 드러난다.
 
전씨의 두 딸이 태어날 때부터 이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학교까지 고향에서 마친 이들 자매는 대구로 나가 고교를 다닌 후 직장을 잡았다. 그러나 20대 초반부터 두 자매에게 동시에 원인모를 정신 질환이 발병해 아버지 전씨가 급기야 고향으로 데려다 놓았다. 증세가 점점 악화해 사회 생활은 물론 결혼도 시킬 수 없었다.

“둘째는 집밖으로 나가면 집을 찾을 줄도 모르는 심각한 상태고, 거동이 좀 나은 큰딸도 질환이 심해지면 헛소리를 마구 해대는 증상 때문에 혼사 줄이 나서지 않는다. 그동안 두 딸을 데리고 마산 대구 등 정신과를 전전하며 약을 타다 먹이고 있지만 원인이 무엇인지, 과연 우리 부부가 죽기 전에 치료가 될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같다”.

설상가상으로 전씨의 아들 시환씨도 고교를 졸업한 후 같은 증세가 나타났다. 마흔살의 시환씨를 포함해 두 딸까지 혼기를 훌쩍 넘겨 장년층에 접어드는 3남매이지만 아직도 전씨 노부부가 시골에서 뒤를 돌봐주어야만 살아가는 처지이다. 전씨의 부인이 근처 식당을 돌며 품삯을 받아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게다가 전씨마저 피폭 후유증이 심해지고 중풍 증상이 생겨 집에서 세 자녀와 함께 뒤치다꺼리를 받아야 하는 나날을 보내야 한다. 전씨는 “어릴 때는 건강하던 자식들이 다 커서 줄줄이 정신병이 생기고 보니 우리 부부 죽고나면 이 애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같다”라며 한숨을 내쉰다.

피폭자 2세 후유증에 대해 정밀한 연구와 진단이 내려져서 자식들의 병을 치료할 길이 열린다면 죽더라도 여한이 없겠다고 말한 전씨는 이런 실태조사를 위해 찾아온 외부인은 기자가 처음이라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동구박까지 배웅을 나왔다.

전씨가 사는 마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최정식씨도 피폭 2세 환자이다. 올해 43세인 최씨는 어머니 이일갑씨가 피폭자이다. 어머니 이씨는 부모를 따라 히로시마에 갔다가 7세때 학교 등교과정에서 원자폭탄을 맞았다.

“번쩍하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가 깨보니 왼팔에 온통 화상을 입고, 동생은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해방 후 들어와서 결혼을 해 5남매를 두었는데 큰아들이 멀쩡하게 고등학교까지 다니다 스무살 무렵부터 몸에 종양이 생기고 암치료 때 방사선을 쬔 사람처럼 털이 빠지기 시작했다. 다른 자녀들은 건강 이상이 없었다. 원폭 유전병이라고 믿고 있지만 어디가서 하소연할 길이 없다”. 쇠꼴을 베어 들어서던 이일갑씨가 눈물을 훔치며 아들의 이상한 병에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을 풀어놓는다,

최정식씨는 20대 때부터 가슴에 생기기 시작한 이상한 종양을 보여주었다. 육안으로 보아도 손가락 굵기의 두드러기가 가슴에 여러 줄 걸쳐 나 있었다. 피부과에 갔지만 원인을 알수 없는 양성 종양이라고만 나왔다. 그러나 가끔 벌겋게 온몸이 일어날 때면 걱정이 앞선다.

최씨에게 신체 이상 증세는 머리에도 나타났다. 극심한 탈모증으로 최씨의 머리는 마치 방사선 치료나 항암 치료를 받은 암환자처럼 듬성듬성 머리카락이 나있다. 피부 가려움과 가슴의 원인을 알 수 없는 선형 물집에 대해 본인은 물론 가족도 원폭 유전병으로 확실하게 믿고 있다.

최근에는 일년 내내 온몸이 쑤시고 가려운 증상이 나타나 약을 달고 산다고 한다. 피폭자인 어머니 이씨는 “히로시마에서 내 3자매가 다 피폭 당했는데 귀국 후 모두 결혼해서 낳은 자녀들 중 한명 정도씩은 정신병과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고 있어 모이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들의 이상 증세에 대해 수심이 가득한 이씨는 “피폭자 2세 중에서 우리 아들처럼 몸에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는 정부가 나서서 정확한 원인을 조사하고 치료 대책을 마련해주었으면 여한이 없겠다”라고 호소했다.

김형률씨의 환우회 결성과 인권위원회 진정과정

나는 2002년 여름 당시 며칠간 합천 지역을 돌며 파악한 피폭 2세 환자 실태와 r족 연락처를 부산에 있는 김형률씨에게 건네주었다. 혼자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환자였기에 나더러 취재가는 길에 피폭 2세 환자 정보에 관한 도움을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는 이때부터 인터넷에 ‘한국원폭 2세 환우회’라는 카페를 개설했다. 합천의 피폭자 2세 환자들처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교류하기 위해서였다.

피폭 2세 환자의 권리에 대한 그의 의지와 집념은 대단했다. 건강한 이도 따라가기 힘들만큼 강한 추진력과 열정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물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죽습니다. 불쌍한 피폭 2세 환우들도 숨어서 다들 죽어갑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한마디로 살아야겠다는 절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오죽했으면 환우회 인터넷카페에 들어가면 뜨는 문장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로 정했겠는가. 다른 희귀병 환자와 마찬가지로 정부의 무관심이 계속되면 김씨는 좋은 치료약이 있더라도 접근조차 하기 어렵다. 실제로 매년 6백만원씩 들어가는 주사약 값을 감당하지 못해 그는 치료 시기를 놓치면서 병세를 키운 상태이기도 하다.

한국정부와 언론의 무관심에 지친 김씨는 커밍아웃을 한 뒤 처음에는 관심을 일본으로 돌렸다. 인터넷을 통해 일본인 피폭자 2세 모임에 자기 사연을 담은 메일을 수시로 보낸 것이다. 일본에서 반응이 왔다. 히로시마에 있는 ‘한국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회’(이하 시민회)라는 민간단체에서 2002년5월23일부터 1주일간 김씨를 초청한 것이다.

김씨는 자기를  상대로 한국 의료진이 비밀리에 제출한 연구보고서와 방사능 유전 관계 자료들을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한국원폭 2세 환자의 일본 방문과 커밍아웃은 그무렵 일본 언론에도 널리 보도되었다.

히로시마의 시민회에서는 김씨의 질환에 대해 히로시마대학 의과대학에서 혈액내과 전문의의 정밀 진료를 주선해줬다. 히로시마 시에서 운영하는 건강검진센터는 일본인 피폭자 2,3세의 건강을 지속적으로 체크하는 곳이다. 김형률씨를 비롯해 한국인 피폭자 2,3세가 개별적으로 찾아오면 정밀 건강검진을 받아주고 있다.

한국 정부와 의료계가 피폭자 2,3세 건강 실태에 대한 추적 조사와 환자 진료 지원을 철저히 외면하는 가운데 일본측에서 한국 피폭자 2세의 건강 검진도 받아주고 있다는 점은 사줄만하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찾아오는 극히 일부의 피폭자 2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 해결책은 될 수 없는 실정이다.

김형률씨를 초대한 후지와라 류코쿠 일본 시민회장은 방일에서 김형률씨가 돌아온 후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일본에서도 피폭 2세에 대한 지원은 아직 건강검진을 해주는 수준이다. 그러나 병에 걸린 2세에 대해서는 '난병 지정 대상‘으로 분류해 생활보호상 무료 의료 등으로 어떤 식이든 국가의 보조를 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피폭자 2세의 질병에 대한 원조가 없어서 안타깝다. 자기 병에 대한 한글 의학 연구서를 일어와 영어로 번역해들고 일본에 찾아와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김형률씨의 열의가 일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협력 태세가 갖춰지고 있다”.

자기 병의 뿌리를 원자폭탄이 떨어진 일본에서 찾으려고 애쓰던 김형률씨에게 일본인 원폭 연구가 이치바 준코 교수가 쓴 <한국의 히로시마>라는 일본어 책 두권이 들어왔다. 김씨는 이 책의 저자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한국어판으로 국내에 소개하자고 설득했다.

마침내 피폭 2세 중 한사람인 이제수씨가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했고, 출판은 역사 비평사가 맡았다. 2003년 7월 이렇게 해서 한국어판 <한국의 히로시마>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피폭 2세 유전병을 밝히겠다는 일념으로 뛰는 김형율씨이 투혼에 감복한 이치바 준코교수는 이렇게 책의 서문을 썼다.

“나의 용기의 원천이자 본서가 한국에서 출판된 원동력은 부산에 사는 피폭 2세 김형률씨이다. 그는 내게 ‘일본의 식민지지배가 한국인 피폭자에게 안겨주었던 피해가 청산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피해가 한국의 피폭 2세까지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김형률씨는 스스로의 병고와 불안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졸저를 만났다.


그러한 열정이 한국 역사비평사의 김백일 사장의 마음도 움직였다. 역사비평사는 계간 <역사비평> 1999년 겨울호에 ‘삼중고를 겪어온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을 게재하고 한국인 피폭자 문제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왔던 출판사이다. 한국인 피폭자 문제의 출발점은 일본의 조선식민지배에 있다. 한국인 피폭자 문제는 일본과 한국 역사를 바로 인식하지 않는 한 해결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한국어판이 출간되는 것은 큰 기쁨이다”.

그 뒤 김형율씨의 투혼은 스스로 찾아낸 전국 60여 피폭자 2세 환자들을 묶어 환우회를 결성하고 피폭자 2세 건강검진과 환자 진료 지원을 촉구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한국에 원폭후유증을 앓고 있는 원폭 2세 환우는 1991년 보건사회연구원 발표에 의하면 2천3백여명이라고 한다. 한국원폭2세환우회는 다양한 원폭 후유증을 앓고 있는 2세 환우들에 대한 인간된 권리와 존엄성을 스스로 찾기 위해 만들어졌다.”

“아울러 환우회는 원폭 2세 환우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회적 필연관계와 모든 사회 상황을 자각하면서 환우 모두가 서로 생명의 버팀목이 되어 원폭 2세들의 건강권과 생존권, 생명권까지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인간성과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있는 현실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정신 아래 김형률씨는 아픈 몸을 이끌고 서울의 각 시민 인권단체 문을 두드렸다. 인권운동사랑방, 건상세상네트워크, 평화만들기, 아시아평화인권연대 등 8개 시민인권단체가 뭉쳐 ‘원폭2세 환우회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를 꾸렸다.그가 주장하는 피폭자 2세들의 건강한 세상을 위한 지원과 연대는 이렇게 싹을 틔웠다.

공대위는 김형률씨의 주장과 뜻을 받아들여 국가인권위원회에 원폭2세 환우들을 위한 건강검진 실시를 촉구했다. 이와 더불어 피폭 2세 환우들의 생존권을 국가가 법적으로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진정서 작성은 인권운동사랑방이 도왔다. 부산에서는 아시아평화인권연대가 간사단체로 나서서 김형율씨의 활동을 지지했다.

김형률씨는 이때부터 초인적인 나날을 보냈다. 공대위 회의가 주로 서울에서 열리기 때문에 한달에 한두차례씩 아버지나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서울을 오가야 했다. 보통사람 천리길이 김씨에게는 10만리 길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고통스런 여정이었지만 그는 이겨냈다.

김형율씨와 공대위가 낸 진정서를 받은지 1년이 다되어가던 지난해 6월, 국가인권위원회는 드디어 제한적인 범위에서나마 피폭자 2세에 대한 건강검진을 실시하겠다고 공고했다. 3천만원의 예산을 들여 5개월간 진행하는 조사였지만, 국가 기관으로서는 최초로 시작한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김형율씨가 목숨을 걸고 세상과 사람을 감동시켜 움직여낸 결과였다.

2004년 12월 말까지 실태조사를 진행한 곳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였다. 피폭자 2세 건강 실태조사의 뒤안에서는 말못할 에피소드도 많았다고 한다. 정부가 무료로 피폭자 2세 건강진단을 해준다는 소문에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든 것이다. 그동안 숨어 지내던 2세와 환우들이 관심을 집중적으로 보이고 나선 것.

심지어 7남매의 2세 중 5남매가 ‘몸에 이상이 있다’며 함께 나타나 건강검진을 받기도 했다. 물론 환우는 아니었다. 당초에는 많이 아픈 2세를 중심으로 건강 실태를 조사하려 했는데 멀쩡한 2세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피폭 3세 환우도 문의가 많았지만 이번 조사는 2세로만 국한했다.


인권위 실태조사 결과발표문의 한계

2005년 2월14일, 드디어 국가인권위원회는 원폭 피해자 2세에 대한 기초 현황 및 건강 검진 실태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 원폭 2세들은 같은 나이의 일반인에 비해 빈혈, 심근경색, 협심증 등 만성질환과 우울증, 정신분열, 각종 암 등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의 원폭 2세 가운데 1226명에 대한 우편 설문조사 결과 남성은 일반인에 비해 빈혈 88배, 심근경색 및 협심증 81배, 우울증 65배, 정신분열증 23배, 천식 26배, 갑상성 질롼 14배, 위 십이지장 궤양 9.7배, 대장암 7.9배 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피폭 2세 여성의 경우도 심근경색 협심증 89배, 우울증 71배, 유방양성종양 64배, 천식 23배, 정신분열증, 18배, 위십이지장 궤양 16배, 간암 13배, 백혈병 13배 갑상선 질환 10배 등이 높게 나왔다.

또한 국내 원폭 피해자 1세 1,092가구의 자녀 4,090명에 대한 정보를 분석한 결과 이미 사망한 299명의 피폭 2세 가운데 절반이 넘는 156명이 10살 이전에 사망했다. 이들 중 사인조차 원인 불명으로 나온 경우도 열명 중 여섯명 꼴인 182명이었다. 생존한 원폭 2세들 중 선천성 기형과 질병이 있다고 응답한 이들도 19명에 달했다.

물론 이번 국가인권위 조사가 원폭에 의한 피해의 유전성여부를 규명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인권위는 조사 말미에 원폭 피해자 2세에 대한 더욱 정밀한 역학조사 및 분자생물학적, 유전학적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부가 제대로 조사에 나서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는 피폭 2세에 대해서는 어떤 실태조사도 실시하지 않겠다고 못박고 나섰다. 더 나아가 보건복지부는 인권위 조사에서 피폭과의 인과관계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복지부는 현재 일본에서 실시중인 피폭 2세 역학조사를 주시한다면서 그 결과를 기다려  대처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복지부의 이런 처사는 지나치게 무성의하고 비인도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또한번 가난과 질병의 대물림으로 고통받는 피폭 환자와 그 가족들을 우롱한 셈이다. 나는 최근 정부가 피폭자와 2세들 건강에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근거를 입수했다. 현재 복지부의 전신인 보건사회부에서 1974년에 작성해둔 비밀문서가 그것이다.

이 비밀 문서를 통해 살펴보면 피폭 2세들의 건강 실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이미 30여년 전부터 정부에서는 은밀한 실태 조사를 벌여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74년 당시 환자 인권문제 등에 지금보다 훨씬 둔감했던 유신독재 정권조차도 2세 환자 치료 지원까지 고려한 전국규모의 피폭자 병원 3곳을 신설하려고 했다는 점도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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