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진통 딛고 희망으로 부활하나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5.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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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의 마르크시즘 재조명 활발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쓴 <공산당 선언>은 이렇게 시작한다. 21세기 한국에 마르크스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지난 5월 말 세계적 규모의 마르크스주의 학술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계간 <역사비평>(2005년 여름호)은 ‘다시 사회구성체 논쟁을 생각한다’는 제목의 특집을 싣고, 마르크스적 문제 의식의 복원을 시도했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지 10년이 훨씬 지난 뒤다. 우파의 목소리가 넘쳐나고, 옛 좌파마저 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바꾸어 다는 시대에 벌어진 일들이다.

지난 5월29일 낮, 김수행(서울대·경제학) 김세균(서울대·정치학) 강내희(중앙대·영문학) 손호철(서강대·정치학) 교수 등 좌파 학자들이 서울 건국대 교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재야운동가 백기완씨, 단병호 민주노동당 의원도 보였다. 이 날부터 이틀간 열린 ‘맑스 코뮤날레’에는 2백명이 넘는 국내외 학자와 일선 연구자들이 참가했고, 이틀 동안 논문 40여 편이 발표되었다. ‘맑스, 왜 희망인가?’ 이 날 모인 이들이 벌인 토론 주제다.

코뮤날레는 코뮤니티와 비엔날레를 합쳐서 만든 말. 이번 대회는 2003년에 이어 두 번째로 열렸다. 지난 대회가 사회주의 붕괴 이후 10여년 만에 만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서로의 고민을 토로하고 해후하는 자리였다면, 올해는 새로운 문제 의식을 모색하고 공유하기 위한 성격의 대회였다.

이번 대회의 최대 화두는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이른바 ‘포스트모던 마르크스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로 모아져,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뉴레프트’ 성향 학자들이 논쟁을 벌였다. 노동·화폐의 동일성과 차이라는 철학 개념의 해석을 둘러싸고 진행된 논쟁은 대중이 공유하기에는 다소 어려워 보였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진지했다. 

전통 마르크스주의와 뉴레프트의 논쟁

전통 마르크스주의를 향해 맨 먼저 포문을 연 이는 왕년의 ‘사노맹’ 논객에서 안토니오 네그리 전도사로 변신한 조정환씨(웹진 ‘자율평론’ 대표).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개념인 노동의 동일성을 부정하고, ‘다중’의 자발적인 네트워크를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코뮤니즘은 자본주의를 극복한 정치 체제가 아니라 ‘삶의 문맥 속에 내재한 윤리 정치학’, 다시 말해 자본주의에 이미 내재하고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인 셈이다.

과거 민중 민주(PD) 계열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던 이진경씨(서울산업대 교수)는 ‘차이의 정치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수정을 시도했다. 계급적 적대보다 차이에 기초해 새로운 코뮤니즘을 구성하자는 것이 이씨 주장의 뼈대. “모든 것을 자본(화폐)으로 동일화하는 권력에 맞서 자본에 포섭되지 않은 삶의 가능성을 창안하려는 사람들에게 마르크스는 여전히 중요한 이론적 자원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밖에 소수자 운동과 ‘욕망의 혁명’을 강조한 윤수종씨(전남대 교수·사회학) 등이 뉴레프트 성향의 새로운 해석을 선보였다.

이에 맞서 박영균(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원) 이성백(서울시립대 교수) 안드레아스 아른트(베를린자유대학 교수) 씨 등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유효성을 여전히 주장했다.

이들은, 계급보다 다중을 내세우고 적대보다 차이를 강조한 포스트모던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 사회의 적대적 성격을 해체하고, 나아가 실천적으로도 자본에 맞선 투쟁을 어렵게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포스트모던 마르크스주의는) 관념적인 사상에 불과하며 현실성을 획득할 수 없다”(이성백)는 것이다. 

역사문제연구소가 발행하는 계간 <역사비평>도 6월 초 발간한 2005년 여름호 특집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 분석의 부활을 모색했다. 코뮤날레가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비전을 탐색하는 자리였다면, <역사비평> 특집은 좀더 현실적인 주제를 택한 셈. ‘다시 한국사회구성체론을 생각한다’는 제목의 특집에는 정성기(경남대·경제학) 이병천(강원대·경제학) 정성진(경상대·경제학) 신광영(중앙대·사회학) 교수 등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 당시의 주요 논객들이 다시 필자로 참여했다.

추상성·복고 경향 못 벗어나 아쉬움

“(사회주의 붕괴를 보며) 9·11 사태로 무너지는 뉴욕 쌍둥이 빌딩의 모습을 쳐다보던 미국 사람들보다 더 심했을 정신적 공황에 빠졌다”라고 고백한 정성기 교수와 이병천 교수는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이 현실 감각 결여와 사회과학 연구의 일천함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한국에 적합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도 실패했음을 반성했다.

반면 1980년대부터 트로츠키주의자를 자처했던 정성진 교수는 “1980년대 국내에 소개된 마르크스주의는 소련 국가자본주의의 지배이데올로기인 스탈린주의였을 뿐이며, 마르크스의 문제 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얼마 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고려대를 방문했을 때 시위 사건을 주도했던 좌파 조직 ‘다함께 그룹’의 교수 회원이다.

맑스 코뮤날레 참석자들은 이미 1년여 전부터 수 차례 예비 모임을 갖고 대회를 준비했다. <역사비평> 필진과 편집위원들도 기획 단계부터 의견을 교환하며 역할을 분담했다. 그러나 두 기획 모두 주최측의 기대만큼 내용이 따라주지는 못한 듯하다. 맑스 코뮤날레의 주제는 너무 추상적이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부족했다. <역사비평> 특집 또한 너무 복고적이어서 제목에 어울릴 만큼 적합한지는 의문이다.

 
이번 일로 인해 국내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의 인적 한계도 일부 노출되었다. 한국사회경제학회는 과거 국내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의 집합소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붕괴 이후 회원 상당수가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좌파 케인스주의로 ‘개종’했다. 이 학회는 이번 코뮤날레에 공식 참가를 모색했으나 회원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역사비평> 특집 또한 후속 세대의 새로운 필진을 확보하지 못하고 옛 필진을 다시 동원해야 했다. 

맑스 코뮤날레 집행위원 박성인씨(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소장)는 “빈사 상태였던 마르크시즘이 신자유주의 모순이 커지면서 복원과 혁신을 위한 진통을 겪고 있다”라고 말했다. <역사비평> 특집을 기획한 김동택 교수(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는 “마르크스가 대안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의 함의는 유효하다”라고 말했다.

19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 거대 담론이 사라졌다. 사회구성체론이나 대안사회론 같은 거대 담론이 과대한 것도 문제지만, 과소한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한국 사회가 양 날개로 날기 위해서도 좌파 학자들이 벌인 최근 기획은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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