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건 거품이 아니다?
  • 고제규 차형석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5.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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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대통령감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고 건 전 총리가 높은 도덕성과 ‘준비된 후보’라는 강점을 부각하며 ‘대망의 발걸음’을 조용히 내딛기 시작했다.

 
지난 5월31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연지동 여전도회관. 고 건 전 총리(67)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0층에 위치한 자신의 집필실이자 독서실인 개인 사무실로 가기 위해서다.

이 날도 고씨는 어김없이 매일 같은 시간에 일정한 곳을 도는 ‘칸트의 산책’을 즐기고 사무실에 나왔다. 새벽 5시에 일어나 CNN을 보고, 집 근처 낡은 대중 목욕탕에서 목욕을 한 뒤, 동숭동 한 카페에서 지인들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규칙적인 일상의 반복이었다. 

그런데 이날 그는 뜻밖의 일을 당했다. 그가 올라탄 엘리베이터가 3층에서 ‘덜커텅’ 하고 멈춘 것이다. 불이 꺼졌고, 문이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순간 고씨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침착을 되찾고 비상용 호출 버튼을 눌렀다. 10여분 후 가까스로 문이 열려 그는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10층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을 올랐다. 사무실에 들어선 고씨는 긴 숨을 토해냈다.

이날처럼 고씨에게 고비와 도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동안 고 건씨는 안전한 엘리베이터 삶을 살아왔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관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평할 만큼, 역대 정부에서 그는 ‘관직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기에 바빴다. 굳이 높은 곳을 오르려고 안달복달할 이유가 없었다. 서울시장(두 번), 국무총리(두 번), 도지사, 교통부장관, 농수산부장관, 내무부장관 등 그는 군사 정권부터 참여정부까지 다 통하는 멀티플레이어였다. 멀티플레이어인 그도 못 오른 자리가 있다. 권한대행까지만 하고 나온 대통령. 그런데 그 자리에도 고 건씨는 성큼 다가가 있다.

대권 후보 고 건의 강세가 계속되고 있다. 고씨가 처음으로 차기 대권 후보 1위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지난해 9월. <시사저널> 제779호 여론조사가 처음이었다. 그때 고 건 총리(22%)는 오차 범위 이내였지만 박근혜 대표(20.3%)를 따돌리고 1위에 올랐다. 그때만 해도 ‘뜻밖’이라는 반응이 우세했다. 정치권의 가파른 대치가 그에게 어부지리를 주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일시적인 현상이고 조만간 바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3개월, 6개월, 그리고 9개월이 지나도 고 건 독주는 계속되고 있다. 지지율은 오히려 더 올랐다. 여론 전문가들은 당분간 이같은 강세가 계속될 것으로 본다.

“고 건 현상은 김대중 현상에 가깝다”


 
고 건은 이제 2007년 대권 가도의 핵심 변수로 자리를 굳혔다. 문제는 ‘고 건 현상’이 대선 막판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이다. 여기에는 ‘완주론’과 ‘거품론’이 엇갈린다.
차기 대선 주자 선호도를 정기적으로 조사하고 있는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정창교 수석전문위원은 이제는 거품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 건 돌풍의 원동력이 단순한 반사이익이 아니라, 고씨 본인의 인물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난 5월24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전국민을 상대로 행한 조사에서 단순 인지도만 따지면 고 건 전 총리는 박근혜 대표에 비해 10% 정도 뒤졌다. 아무래도 현역 정치인보다 언론 노출 빈도가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 건을 안다고 응답한 사람들에게 다시 호감도를 묻는 이른바 ‘인지호감도’에서는 고씨가 여타 후보를 압도했다.

73.2%로 50%대인 나머지 대권 주자들에 비해 월등히 높게 나온 것이다. 고 건의 장점을 물으면 도덕성(27.1%), 능력(25.7%)이라는 응답이 다수였다. 무응답은 10.9%에 그쳤다. 정창교 전문위원은 고 건이 무엇을 잘하는지 국민이 구체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기성 정치권에서 고 건 현상을 단순한 거품으로 보는 것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대목이라는 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고 건 현상이 적어도 박찬종 현상은 아니고, 오히려 김대중 현상에 가깝다고 분석한다. ‘김대중= 준비된대통령’처럼 고 건 역시 능력과 경륜을 겸비한 인물로 국민에게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최근 불거지는 정치권의 각종 의혹 사건도 고 건씨에게는 역으로 득점 요인이다. 고 건 하면 떠오른 이미지가 도덕성이라고 꼽듯, 그의 또 다른 강점인 청렴 결백이 차기 덕목으로 우선시될 수 있기 있기 때문이다.
고씨의 좌우명은 지자이렴(知者利廉). ‘현명한 사람은 청렴한 것이 자신의 장래에 이로움을 안다’는 다산 정약용의 가르침을 그는 늘 새겨왔다.

덕분에 1961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 생활을 한 이후, 그는 한 번도 비리 의혹이나 스캔들에 휘말린 적이 없다. 여기에는 알려진 대로 아버지의 가르침도 한몫 했다. 부친은 고형곤 박사. 박정희 시절 윤보선씨가 이끈 민정당의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고형곤씨는 공직에 나가는 아들에게 ‘공직삼계’를 내렸다. ‘누구 사람이라고 낙인 찍히지 말고, 남의 돈 받지 말고, 술 잘 먹는다고 소문내지 말 것’이 그것이다. 고박사는 또 아들이 만 37세에 전남도지사로 취임하자, 일가친지를 전부 불러 청탁 금지 명령을 내리고, 친지들로부터 십시일반 모아 아들에게 판공비를 보내준 일로도 유명하다.

기존 정당에 입당 않고 ‘국민 후보’로 나선다?

고 건 ‘완주론’의 또 다른 근거는 호남지역의 두터운 지지도다. 여론 전문가들에 따르면, 고 건씨는 주로 40대, 대학 재학 이상, 자영업자, 서울과 호남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호남 지역의 지지도가 높다. 엄밀히 따지면 고 건씨는 호남 출신이 아니다. 그의 출생지는 서울이다. 부친이 전북 옥구 출신이고, 그도 12대 때 군산·옥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적이 있다. 그런데  고 씨가 호남 쪽의 지지를 받는 것은 ‘30대 도백’에 대한 이 지역의 강렬한 기억 때문이다.

 
1975년 고 건씨는 전남도지사에 임명되었다. 그때 나이 서른일곱. 새파란 젊은 도백에 대한 우려가 컸다. 하지만 그는 인사 잡음이 많기로 소문 난 전남도를 다잡았다. 1979년 그가 도지사 직을 떠날 때, 도민들이 유임 탄원서를 냈다는 일화는 지금도 호남권에서 회자된다. 노풍의 진원지에서 고풍이 분다면, 완주를 위한 충분한 바람이 될 수 있다고 여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렇게 인물만 놓고 보면, 고 건 현상은 충분히 이해될 만하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엘리베이터를 올라타듯 저절로 대권까지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때론 불이 꺼지고 멈추어 설 수도 있다. 직접 걸어서 올라야 할 난관도 놓여 있다. 고 건씨가 이런 난관을 뚫고 완주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 때문에 정치권 안에서는 아직 거품론이 우세하다.

정치권은 고 건 전 총리가 세월을 낚듯, 고 건 현상도 지켜보아야 한다고 본다. 나아가 고 건씨가 움직이는 순간 거품이 걷히리라는 쪽에 더 무게를 싣는다. 그의 선택지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 건씨가 대권을 향해 걸을 수 있는 길은 대략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 길은 열린우리당행이다.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정동영·김근태가 버티는 열린우리당에서는 당내 경선조차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의원은 좀더 직설적으로 ‘고 건 불가론’을 주장한다. “고 건은 열린우리당 창당 정신뿐 아니라 시대정신과도 맞지 않는다. 오히려 한나라당에 가깝다”라는 것이다. 이 의원은  ‘행정의 달인’ 뒤에 감추어진 ‘처세의 달인’이라는 그림자도 장차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씨가 걸을 수 있는 두 번째 길은 한나라당행이다. 지난 5월11일 박근혜 대표는 고 건 영입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실제 속내는 다르다. 친박 성향인 한 의원은 “원론적인 언급이다. 영입되더라도 고씨 역할은 킹메이커에 한정될 것이다. 주자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당직자는 고 건의 한계를 이회창씨에 빗대 이렇게 분석했다.  “이회창씨가 YS에게 대들고 총리에서 물러났을 때 여론조사를 하면 차기 대통령감으로 압도적으로 꼽혔다. 그런데 검증에 들어가니 사정이 달라졌다. 고 건도 예외가 아니다. 본인과 아들의 병역 문제, 그의 무색무취 리더십이 본격적으로 검증되면 위력이 떨어질 것이다.” 게다가 박근혜·이명박·손학규 등 잠룡들이 버티고 있는 한 고씨의 한나라당행 역시 녹록치 않다.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행에 비해 가능성이 높은 것은 민주당행이다. 기사회생을 바라는 민주당은 고 건 영입에 적극적이다. 이낙연 의원이나 최인기 의원이 고씨와 접 촉하며 계속 의사를 타진하고 있다. 그러나 고씨 처지에서 민주당행은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 고씨의 고교 후배인 민주당 최인기 의원조차 “민주당으로서는 플러스이겠지만, 고 건 전 총리 처지에서는 마이너스이다”라고 말할 정도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제4의 길인 ‘국민후보론’이다. 다음 대선이 지금 판도로 치러지기보다는 지각 변동이 일어날 것이고, 이때 민주당이 중심이 되어 정계 개편을 하든, 아니면 전혀 다른 성격의 신당이 출현해 고씨를 대선 주자로 영입하면 경쟁력이 있다는 예측이다. 1998년 고씨가 국민회의 후보로 서울시장에 나설 때와 유사한 경우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서울시장 후보로 유력하던 한광옥 의원을 주저앉히고 고씨를 영입했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도 “고 건씨 행적을 보면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는 스타일이다. 그것도 승산이 있는 곳에 얹는다”라고 말했다.

6월 말, 월드컵 경기장에서 ‘호프 데이’ 계획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고씨가 자기가 직접 상을 차리는 창당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릴 것으로 정치권에서는 보고 있다. 이렇게 끝까지 기다리는 것도 현재로서는 그에게 유리한 편이다. 당장 내년 지자체 선거를 전후로, 정치권 지각 변동과 함께 개헌론도 꿈틀대기 때문이다. 현재 거론되는 유력 대권 주자 모두가 4년 중임제에 정·부통령제를 선호하기에 고 건의 주가는 더 올라갈 여지가 많다.

물론 이때도 각 당에서는 고씨의 역할을 부통령으로 제한하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고씨가 부통령급에 만족하겠는가? 지금은 대권에 대해서 철저하게 묵언수행을 하는 고씨지만, 그도 한때 큰 꿈을 화끈하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1988년 4월23일, 13대 총선에서 민정당 후보로 나선 고 건은 마지막 합동 유세장에서 한 월간지를 손에 들고 열변을 토했다. “이 월간지가 1990년대 대통령감으로 나를 지목했습니다. 장차 대통령감인 나를 국회로 보내주십시오.” 지금도 군산 시민들은 이 날의 고 건을 기억하는 이가 많다. 하지만 관운을 타고난 고 건도 DJ의 황색 돌풍에는 무릎을 꿇었다. 평민당 채영석 후보에게 큰 표 차로 낙선한 것이다.

 
지난 5월31일 연지동 사무실에서 만난 그에게 대권 행보를 시작한 것이냐고 묻자, 그는 “소이부답하겠다”라고 말했다. 고 건씨는 스스로 언론과 접촉하는 ‘레드라인’을 설정해 두었다. 퇴임 후 1년 동안은 일절 인터뷰에 응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다.  지난 5월24일이 국무총리 직에서 물러난 지 1년째 된 날이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침묵하고 있다.

고씨는 “너무 이르다”라고 말했다. 대권 행보를 하기에 이르다는 것인지, 너무 일찍 자신이 후보로 떠올랐다는 것인지 아리송해 재차 물었지만 역시 입을 다물었다.
고 건씨는 당분간 정중동 행보를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이미 사이버상에서는 대권 행보를 시작했다. 5월9일 싸이월드에 그는 미니홈피를 개설했다. 고씨는 “미니홈피는 주민등록증이나 다름없어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해 연말만 해도 그는 오해를 살 수 있다며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려다가 포기했다. 그런 그가 사이트를 개설하고, 하루 두 차례 미니홈피를 방문하며 일일이 네티즌들의 댓글에 화답하고 있다. 영화배우 샤론 스톤과 만난 사진이나, 테니스를 치는 사진 등 ‘인간 고 건’을 알리는 사진을 올리며 네티즌들을 끌고 있다. 그래서인지 개설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10만명이나 방문했다. 일촌도 2천명을 넘어섰다.

 
월드컵 3주년이 되는 6월 말쯤에 고 건씨는 미니홈피 네티즌들과 ‘호프-데이’도 계획하고 있다. 장소는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장소 선정에도 그의 계산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의 취약층인 월드컵 세대를 공략하고, 월드컵을 치른 시장인 점을 부각하기 위해서다.

공직에 입문한 이후 지난 40년 동안 그는 공인과 야인을 넘나들었다. 공직에 있다가 야인으로 물러나기 일쑤였고, 또 물러나 있으면 공직으로 차출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박석무 전 의원(5·18기념재단 이사장)이 고씨의 아호를 ‘또 백성’을 뜻하는 우민(又民)이라 지어 주었다. 우민이 된 지금 그가 완주론과 거품론 사이에 내딛을 다음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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