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P3 제국’에 해는 지는가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5.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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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기업 레인콤, 애플·소니·삼성 등 협공에 ‘곤욕’

 
고비다. MP3 플레이어 종주국의 자존심이자 벤처 신화의 주역이었던 레인콤에 ‘노란 불’이 켜졌다. 70%까지 치솟았던 국내 시장 점유율이 40%대로 떨어졌고, 지난 1/4분기에는 당기 순손실 13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6만원대를 넘보던 주가는 요즘 1만원대로 추락했다.

1999년 창사 이래 한 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고, 2004년 한 해 동안에만 순이익 4백35억원을 올리며 쾌속 질주하던 이 회사에 급제동이 걸렸다.

가장 큰 이유는 MP3 플레이어 시장이 ‘별들의 전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딸린 기사 참조). 삼성전자·소니·필립스·델 등 글로벌 IT 기업들이 지난해 말부터 이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시장의 절대 강자 애플은 지난 1월부터 레인콤의 ‘안방’인 국내 시장을 공격적으로 파고들었다.

애플은 지난 1월까지만 해도 국내 시장 점유율이 3%에 불과했으나, 지난달에는 10%까지 껑충 뛰어올랐다. 게다가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사업부 안태호 전무는 “세계 MP3 플레이어 시장은 애플·소니·삼성전자의 3파전으로 압축될 것이다”라고 공언하며 레인콤의 존재를 깔아뭉갰다.

‘감성 마케팅’으로 벤처 신화 창조

브랜드 인지도나 자금, 인력, 마케팅 능력 등 모든 면에서 달릴 수밖에 없는 레인콤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찬 경쟁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경쟁이 치열해지는 바람에 레인콤은 올 1/4분기 마케팅 비용을 지난해보다 3배 이상 썼다. 하지만 시장점유율은 오히려 줄어들었고, 제품 가격은 20% 가량 떨어져 적자를 내고 말았다.

 
돌아가는 상황을 볼 때 레인콤은 ‘죽을맛’이다. 레인콤 홍보팀 김충은 과장은 “남들이 보기에는 물 위에 뜬 오리처럼 평화롭고 한가로워 보이지만 ‘물 아래’에서는 물살을 젓느라 쉴 틈이 없다. 우리는 지금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다리를 휘젓고 있다”라고 말했다.  

레인콤이 그동안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소비자의 감성을 정확하게 읽어내 신속하게 제품화한 데 있다. LG경제연구원 김성환 연구원은 “레인콤은 대용량 플래시 메모리를 빠르게 제품에 채용했고, 전문 디자인 업체 이노디자인과 제휴해 끊임없이 새로운 디자인을 출시했다.

또 온라인을 통해 수집한 고객 요구를 신제품 개발에 재빨리 반영했다”라고 평가한다. 레인콤은 게시판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고객 의견을 듣고, 10대들로 구성된 후원 그룹을 결성해 제품 개발과 홍보 일꾼으로 활용했다. 10대, 20대가 주 타깃인 이 시장에서 온라인 마케팅과 입소문 마케팅은 회사를 급격하게 성장시키는 힘이 되었다.

“시장 독주가 오히려 화 불렀다”

삼성전자에서 일할 때 반도체 엔지니어이자 해외 마케팅을 담당했던 양덕준 사장의 독특한 캐릭터와 리더십 역시 레인콤 성장의 견인차였다. 양사장은 ‘벤처의 성공은 직업의 창의력’임을 강조하며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하고, 직원들의 고충을 직접 들어가며 문제를 개선했다. 또 처음부터 해외 시장을 목표로 제품을 개발하고,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세워 수출 기반 회사로 성장해 왔다.

그 과정에서 운도 따랐다. 이 시장에는 애플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었다. 특히 국내 시장은 레인콤의 독무대나 마찬가지였다. 삼성은 자회사에 맡긴 채 이 시장을 방치했다. 소니는 소니뮤직·소니픽쳐스 등 그룹 내부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통에 이 시장에 선뜻 나서지 못했다. MP3 플레이어를 내놓기는 했지만 제품 수준이 떨어져 국내 소비자들은 ‘소니가 아니라 소냐가 만든 것 아니냐’고 비아냥거릴 정도였다. 

 
세계 시장의 절대 강자인 애플마저도 하드 디스크 타입에만 주력했고, 한국 시장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애플의 아이팟을 이용하려면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유통망이 턱없이 부족해 액세서리 하나 구입하려면 몇 달씩 기다려야 하고, 애프터서비스도 쉽지 않다. 또 아이튠스 뮤직 스토어를 이용해 파일을 내려받을 수도 없다. 그래서 일부 소비자들은 ‘애플코리아는 보따리상이나 다름없다’고 비난했다.
덕분에 국내 시장에서는 레인콤의 독주가 가능했다.

그러나 독주(獨走)는 독약(毒藥)이 되고 말았다. ‘눈앞의 열매에 도취해 미래를 내다보는 데 소홀했다’는 지적을 받게 된 것이다. 레인콤은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한 제품을 내놓은 애플과 달리 트렌드를 따라가는 제품을 내놓기에 급급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한국싸이버대학 곽동수 교수는 “레인콤은 규모에 비해 잘해왔지만, 아쉬운 점도 적지 않다. 사내 슬로건을 ‘아이팟 죽이기’로 내세운다거나 아이팟을 모방한 제품을 내놓는 것은 제살깎기나 다름없다”라고 꼬집었다. ‘애플 따라잡기’로는 애플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 시장에서는 애플 따라가기도 급급한 상황이었는데, 이제는 강력한 경쟁자들이 무더기로 나타났다.  삼성전자는 2007년 세계 1등에 오르겠다며 독기를 품었고, 소니가 MP3 플레이어팀을 제대로 구성한 뒤 낸 첫 제품은 ‘드디어 소니다운 제품을 내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애플코리아 역시 서울과 지방의 오프라인 매장을 늘리고, 전국 애프터서비스망을 갖추는 등 단점들을 보완해가고 있다. 싸이월드에 브랜드 홈페이지를 운영하는가 하면, 펩시콜라 병뚜껑에 있는 번호를 응모하면 1천2백명에게 아이팟 셔플을 주는 등 대대적인 프로모션도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MP3 플레이어에 대한 우울한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애플과 신경전을 벌이는 빌 게이츠는 ‘음악 파일만을 재생하는 독립적인 형태의 MP3 플레이어가 아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음악 재생 기능을 아우르는 휴대전화가 대표적인 휴대형 멀티 미디어 기기로 선택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동부증권 노효종 연구원도 “디지털 카메라 열풍이 너무 빨리 식어버린 것처럼 MP3 플레이어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라고 전망했다. 디지털 카메라 열풍이 빨리 식은 것은 소비자에게 '화소' 이외에는 보여준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는 분석한다. 일반 소비자에게는 300만이나 500만이나 똑같은 제품이라는 것이다. MP3 플레이어 역시 지금까지는 '용량' 이외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사용자 편의성(User Interface)이나 디자인, 크기 변화는 일반 소비자들이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노효종 연구원은 “레인콤은 MP3 플레이어로 뭘 더 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컨버전스가 완벽하게 이뤄진 뒤에도 소비자들이 삼성이나 소니가 아닌 아이리버를 먼저 고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레인콤의 고민은 또 있다. 열매를 따먹으며 덩지를 키우는 동안 과거에 가지고 있던 장점을 잃어가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 때문이다. 회사 내부에서조차 ‘몸집이 너무 무거워졌다’는 불평이 쏟아지고 있다. 과거에는 제품을 만들 때 실무자와 양덕준 사장이 머리를 맞댄 자리에서 바로 ‘좋아, 밀어붙여’가 통했지만, 요즘에는 양덕준 사장에게 올라갈 때까지 받아야 하는 사인이 수없이 늘었다.

“해외시장 경쟁력 건재하다” 낙관론도

이제는 트렌드를 따라잡는 제품을 발 빠르게 내놓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시스템이다. 게다가 ‘글로벌 기업들의 저가 전략이 문제’라며 남 탓하기 바쁜 모습도 볼썽사납다는 평을 듣는다. 한 시장 전문가는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가격도 무기다. 상대방의 무기를 비난하기 보다는 상대방이 따라올 수 없는 나만의 무기를 먼저 찾는 기업이 성공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레인콤의 최근 행태를 꼬집었다.

물론 레인콤의 미래가 암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희망적인 근거와 징후들이 더 많다. 최근 레인콤의 MP3 플레이어 ‘IFP-895'는 미국의 유명 정보기술 전문지 <PC월드>가 뽑는 ‘올해 100대 최고 제품’ 순위 37위에 올랐다. ‘예약 및 녹음 기능, 라디오, 다이렉트 인코딩 기능 등이 아이팟 셔플에 비해 우수하다’는 평을 받았다. 또 5월에 내놓은 신제품 T10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컨셉트로 인기를 끌었다. 휜 디자인과, 클립을 달아 고리에 연결하면 가방·옷 등 어느 부위에나 착용할 수 있는 혁신적인 제품이다. 

해외 시장에서 삼성이나 소니와 비교할 때 크게 불리하지 않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굿모닝신한증권 오재원 연구원은 “기업 브랜드에서야 뒤지지만, 아이리버라는 제품 브랜드는 북미나 유럽 시장에서 이미 꽤 알려져 있다. 삼성도 옙을 해외에 수출하지만 아이리버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라고 말했다. 삼성은 중국 시장에서만 잘 팔 뿐이지만, 레인콤은 미국이나 유럽 시장에서 ‘센 놈들과 맞짱뜨고도’ 선전한다는 것이다. 오연구원은 미국 유럽 일본 시장에서 삼성은 5위 안에도 들지 못하지만 레인콤은 선진국 시장에서도 5위 안에 들어간다고 덧붙였다.

MP3 플레이어 시장이 컨버전스화한다고 해서 레인콤은 손 놓고 있을 생각이 아니다. 레인콤 전종달 상무는 “당분간은 컨버전스 제품과 음악 재생 기능에 중점을 둔 제품을 함께 개발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시장의 추이를 보면서 언제든지 새로운 컨셉트의 제품, 새로운 사업에도 뛰어들 수 있다고 덧붙였다. 레인콤은 시장을 선도하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지난 봄 얼리어답터 사를 계열사로 끌어들였다. 제품 리뷰에 탁월하고 아이디어가 기발한 ‘얼리어답터’들을 신제품 개발에 적극 활용하겠다는 뜻이다.

또 레인콤은 이 달 말 신제품 5~6개를 출시한다. 이 제품들은 레인콤의 향후 전략에 ‘안테나’가 될 것이다. 얼리어답터 임창진 이사는 “이번 신제품들은 앞으로 레인콤이 가고자 하는 제품 방향에 대해 시장의 반응을 체크하는 시험대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컨셉트의 제품이 나올 것이라고 귀띔했다.
고비란 넘기 힘들지만 일단 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레인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이 고비 역시 훗날 돌이켜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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