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공용 포르노는 없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5.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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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실업가와 비뇨기과 여의사가 말하는 ‘섹스, 포르노 그리고 페미니즘’

그 남자, 보무도 당당하다. 처음 찾은 비뇨기과 앞에서도 좀처럼 주눅드는 기색이 없다. 그러나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남자의 얼굴에 당혹해 하는 빛이 역력하다. ‘젠장, 여자 의사라니….’ 그렇다. 그를 맞은 것은 국내 최초의 비뇨기과 여성 전문의 윤하나씨(35·이대목동병원)이다.

청년필름 대표 김광수씨(40)와 윤씨의 무대 위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두 사람은 오는 6월18일 서강대에서 열리는 ‘2005 안티성폭력 페스티벌 포르노 포르나’에 <페니스 수난사>라는 콩트를 들고 참가한다(관련 기사 참조). 성기 콤플렉스를 겪는 남자 환자와 그를 상대하는 여의사 간의 은밀한 상담 일지가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요 모티브이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안티성폭력 페스티벌 무대에까지 서게 되었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은 페미니즘과 별 인연이 없었다고 두 사람은 입을 모은다. “나는 극단적인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순종적인 여자도 아니다.” 남자 환자들을 숱하게 상대해야 하는 비뇨기과 여의사로서 남성도 여성도 아닌 채 어정쩡하게 살아왔다는 윤하나씨는 이렇게 말한다.
 
남자인 김씨는 더더욱 페미니즘이 낯설다. 더욱이 요즘 그는 7월1일로 예정된 공포 영화 <분홍신> 개봉을 앞두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 와중에 무대에 서겠다는 그를 두고 영화사 후배들은 제 정신이냐며 아우성이다.

“기혼 남성들, 여전히 포르노 즐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일찌감치 이번 행사에 참가할 결심을 굳혔다. 포르노에 관해서라면 두 사람 모두 남들 못지 않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김광수씨의 경우 포르노와 관련해 특별한 개인적 체험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보통의 한국 남자들이 그렇듯 사춘기 때 친구들과 어울려 포르노 비디오를 보기 시작했고, 그 버릇이 청년기-성인기로 이어졌다. 그에게 포르노는 그냥 ‘습관적인 볼거리’였을 따름이다.
 
딱 한 번, 포르노 때문에 낭패한 경험은 있었다. 학생운동 하던 대학 시절 일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경찰에 잡히는 신세가 되었는데, 문제는 자기집 책꽂이 한켠에 은밀하게 숨겨두었던 포르노 테이프들이었다. 자기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방 청소에 나설 어머니와 운동권 동료들이 그 테이프를 발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는 한동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 공권력에 들키면 진짜 문제가 될 불온 서적이나 유인물은 그 순간 그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 후 한동안 잊고 지냈던 포르노 문제를 그가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친구들과의 대화 때문이었다. 미혼인 그는, 막연히 이런 생각을 품고 살았다고 한다. ‘결혼하면 더는 포르노를 보지 않겠지?’ 그런데 웬걸. 기혼인 친구들은 지금도 여전히 주기적으로 포르노를 본다고 고백했다. 

아내가 잠든 사이 인터넷으로 몰래 포르노를 보고 자위 행위를 하곤 한다는 그의 한 친구는 심지어 “아내에게 미안해서가 아니라 포르노로 한껏 달궈진 성적 흥분이 깨질까 봐 아내를 깨우지 않는다”라고 말해 그를 놀라게 했다. 그 친구 지론은 이랬다. “포르노는 잠시나마 일탈을 맛보게 해주지. 간접 외도를 하는 기분이랄까.”

이처럼 남녀의 성적 공상이 다른 데 따른 잠자리의 부조화는 <페니스 수난사>의 주요 주제이기도 하다. 진료실에서 보면, 속된 말로 스스로를 ‘빨래판’이라고 조소하며 사는 여자들이 너무 많다고 윤하나씨는 말한다. 빨래판마냥 남편한테 일방적으로 ‘대주기만 한다’는 이들은 잠자리에서도 성행위에 집중하지 못한다. 남편이 ‘일’을 마치고 내려가기까지 이들의 머리 속에는 ‘내일 아침에는 무슨 국을 끓일까?’ ‘애 도시락 반찬은 뭘로 하지?’ 같은 잡생각이 꽉 차 있다.

 이런 아내와의 잠자리를 견디다 못해 병원을 찾은 남성들은 대뜸 아내 탓부터 한다. “이 여자 몸에 문제가 있다”라는 힐난은 그래도 점잖은 축이다. 어떤 60대 노인은 “이 할망구가 바람이 난 것 같다”라며 진료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이렇게 병원에 와서도 시종 떳떳한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십중팔구 눈물부터 터뜨린다. 이들은 이렇게 하소연한다. “사실은 이제까지 견디고 살기가 너무 힘들었다”라고.

 “성에 관해서도 평생 공부해야 한다”

 이같은 불행의 씨앗은 왜곡된 성교육에서부터 배태된다고 윤씨는 지적한다. “초등학교 때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가’ 류의 성교육밖에 받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제대로 된 성을 알겠느냐”라고 반문하는 윤씨는, 그 빈자리를 포르노가 메우면서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고 말한다. 포르노에 자극받아 강간을 저지르는 따위는 극단적인 예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의 생활에도 포르노는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고 그녀는 말한다.

포르노는 무엇보다 남성 중심적·성기 중심적인 성 환상을 유포함으로써 실제의 성생활을 그르치게 한다. 포르노에서마냥 삽입에만 몰두하는 남성은 현실의 여성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남성들의 뿌리 깊은 ‘크기 콤플렉스’ 또한 포르노에서 기인한 바 크다. ‘목욕탕에 한번 다녀오면 심리적 서열이 바뀌는’ 수컷들의 세계는 현실의 암컷들에게 비웃음거리일 뿐이다.
  
그래도 의문은 이어진다. “크기는 상관없다고들 하지만, 실은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은 것 아닌가요?” 김광수씨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번 <페니스 수난사>에서 김씨는 이처럼 보통 남성들을 대변해 평소 같으면 입 밖에 꺼내기 어려웠을 온갖 민망한 질문들을 하나둘씩 늘어놓는다. 이에 대해 윤하나씨가 어떤 충고와 처방을 해줄지가 이번 무대의 최대 관심사이다.

또 다른 관심사라면 과연 대안적인 포르노, 곧 남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포르노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두 사람 의견은 부정적이다. “여자를 섬세하게 자극할 수 있는 포르노라고 대안 포르노인 것은 아니지 않느냐”라고 반문하는 김광수씨는, 성을 상품화한다는 목적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포르노는 포르노일 뿐이라며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윤하나씨 또한 대안 포르노를 논하기에는 자원 자체가 너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레지던트 시절, 윤씨는 환자 치료용 섹스 비디오를 직접 만들어 본 일이 있다. 당시 남성용 비디오 만들기는 무척 쉬웠다. 영화와 포르노 필름을 아무 데나 잘라 짜깁기하면 되었다. 음악이고 조명이고 필요없었다. 여자의 벗은 몸만 있으면 됐다.

 그러나 여성용은 달랐다. 여성의 관점을 담은 필름, 여성을 흥분시킬 만한 장면을 담은 필름은 귀하기만 했다. 결국 윤씨는 <나인하프위크><투문정션> 같은 외국 영화를 샅샅이 뒤진 끝에 간신히 5분짜리 비디오 테이프를 만들어냈다. 

지금도 이런 사정이 크게 바뀐 것 같지 않다는 윤씨는, 그럼에도 성 관련 정보가 과거보다 훨씬 공개적으로 유통되고, 의학 기술 또한 크게 향상된 데서 희망을 찾는다고 말했다.

“아무리 맛있는 밥을 지어놓으면 뭐하나? 밥맛을 모르는 사람한테는 여주 쌀이나 안남미나 그게 그거다. 성도 마찬가지이다. 웬만큼 기초 지식이 있어야 즐길 수 있다”라는 윤씨는 다른 분야에서만 평생 교육을 외칠 것이 아니라 성에 관해서도 평생 공부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것이 개인의 행복을 찾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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