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 ‘이산가족’, 집 떠나니 출세?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5.06.1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룹 해체 후 엇갈린 계열사 행로/조선·건설 등 우량기업 변신
 
대우그룹 최후의 날 1999년 7월19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주식 1조2천5백53억원, 부동산 4백52억원을 내놓고 경영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또 그룹 계열사가 갖고 있는 주식과 부동산을 합쳐 총 10조1천3백45억원을 채권단에 담보로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초단기 기업어음(CP)을 만기 6개월짜리로 바꾸어주고 4조원을 추가 지원하는 조건으로 김회장의 경영권 포기와 대규모 구조 조정을 종용한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대우그룹이 시한 폭탄이라면 뇌관은 제거되었다”라고 말했다.

김회장이 물러나면서 뇌관은 없앴는지 모르지만 대우그룹 안에서는 이미 화약에 불이 붙어버린 상태였다. 대우그룹 붕괴를 알리는 첫 신호탄이 오르자 한때 재계 2위까지 올랐던 대우그룹 계열사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주요 계열사 12곳이 1999년 8월 워크아웃(기업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부도와 다름없는 처지로 은행 관리에 들어간 것이다.

몰락 재촉한 ‘자동차 집착’

대우그룹 계열사 처리는 산업은행과 2000년 초 발족한 대우계열구조조정위원회가 맡았다. 정부와 채권단은 대우그룹 붕괴로 제2의 경제 위기가 오는 것이 아니냐는 위기감을 느끼고 대우 사태를 빨리 종식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주력 계열사인 대우자동차는 팔고 대우전자·대우중공업·㈜대우를 비롯한 나머지 계열사들은 부채 탕감·기업 분할·출자 전환을 거쳐 생존을 모색했다. 수십조 원이나 되는 공적자금이 투입되고 부채가 탕감되자 계열사들은 빠르게 정상을 되찾았고 수익성이 양호한 일부 계열사는 팔렸다.

대우 몰락의 주범은 대우자동차. 김우중 전 회장이 1999년 7월16일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원장과 만난 자리에서 사재 출연과 경영권 포기를 약속하면서도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곳이 대우자동차였다. 그는 대우 계열사 지분을 모두 포기하면서도 대우자동차 전문 경영인으로 남고 싶어했다. 하지만 김회장은 기술력을 뒷받침하지 못한 채 라노스·누비라·fp간자를 잇달아 출시하고 공장 설비를 늘리면서 대우자동차의 몰락을 재촉했다. 2002년부터 대우자동차 처리 업무를 맡은 이종대 대우자동차 전 회장은 “기아차는 자동차 기술이 훌륭했고 개발된 차량도 다수 확보하고 있어 독자 생존이 가능했을 수 있으나 대우차는 기술도 형편없었고 개발된 차량도 없어 매각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포드와 매각 협상이 성사 단계에서 결렬되자 채권단은 기아자동차 처리 경험을 가진 이종대씨를 대우자동차 회장으로 끌어들였다. 이종대 회장이 전체 직원 3분의 1인 6천8백명을 내보내는 강도 높은 구조 조정을 실시하고 부채 16조원 가운데 90%를 탕감받자 GM이 인수 의사를 밝혔다. GM은 결국 배드컴퍼니와 해외 공장은 빼고 국내 주요 공장과 유럽·아시아 지역 판매법인을 인수해 GM대우차를 출범시켰다. 부평공장은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그 조건이 충족되면 인수하겠다고 약속했다.  

우량 회사였던 대우중공업과 ㈜대우는 번 돈을 자동차에 쏟아 부어야 했다. ㈜대우와 대우중공업은 ‘세계 경영’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동유럽 회사들을 인수하며 세계 시장을 개척했다. 김우중씨는 1998년 초 ㈜대우·대우중공업·대우자동차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김씨는 해외 법인 3백70개와 지사 1천40개를 ‘자동차 총력 지원 체제’로 재편했다. 자금줄은 대우중공업이었다. 호황을 맞은 조선업종에서 낸 수익 5조원 이상을 계열사들에 공급하고 수천억 원에서부터 수조원에 이르는 부채에 대해 보증을 섰다. 대우중공업은 1999년 해외 법인 지분을 대우자동차에 넘겼고, 대우자동차에 대한 출자 비율이 높아져 ㈜대우를 제치고 대우자동차 최대 주주가 되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다가 지친 대우중공업 임직원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그들은 대우중공업이 워크아웃에 들어가자 채권단에 가장 협조적이었다. 대우그룹 속박에서 벗어난 대우중공업은 2000년 10월 대우조선해양·대우종합기계·배드컴퍼니(대우중공업)로 분할해 우량 사업 부문인 조선과 종합기계를 살리고자 했다. 채권단은 대우조선해양에 1조7천14억원, 대우종합기계에 7천4백70억원을 출자 전환했고 부채 6조원 가량을 배드컴퍼니에 남겨 청산 절차를 밟았다. 대우조선해양과 대우종합기계는 대우그룹 주요 계열사 12곳 가운데 제일 먼저 워크아웃에서 졸업했다. 대우조선해양은 지난해 당기순이익 2천4백억원을 기록할 정도로 우량 회사로 변했고, 대우종합기계는 2001년 매출 1조5천4백억원·당기순이익 8백42억원을 달성해 채권단의 추가 지원 없이 살아났다. 두산그룹이 대우종합기계를 인수해 올해 4월 두산인프라코어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우그룹 지주 회사였던 ㈜대우는 건설 부문인 대우건설과 무역 부문인 대우인터내셔널로 분할되었다. 대우건설은 공공부문 수주 1위를 기록할 만큼 우량 회사로 탈바꿈했다. 대우건설 최대 주주인 자산관리공사는 대우건설을 곧 매각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대우인터내셔널은 지난해 매출 5조원·당기순이익 1천1백억원을 기록했다. 대우인터내셔널이 최근 미얀마에서 발견한 가스전의 시장 가치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대우인터내셔널은 미얀마 ‘쉐(Shwe)’ 가스전 사업운영권자로서 지분 60%를 보유하고 있다. 이미 3차ㆍ4차 평가전 시추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오는 7월 말까지는 정확한 매장 규모를 발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올해 당기순이익 1천5백억원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고 성장 잠재력까지 갖추고 있다.

대우전자, 가장 혹독한 정상화 과정 거쳐

정상화 과정을 가장 혹독하게 거친 회사는 대우전자였다. 2001년 10월 주식을 7 대 1로 감자했으나 소액주주들이 주총결의 무효 가처분신청을 내는 시련을 겪었다. 또 2001년 10월에는 하이마트와 법정 분쟁을 겪어야 했다. 하이마트는 1998년 대우전자에서 분리되면서 채무 4천5백76억원을 떠안았으나 얼마 안 가 이자를 갚지 않겠다고 하면서 법정 소송으로 치달았다. 재판을 맡은 서울지법 서부지원이 2002년 7월 하이마트에게 채무 원금 3천3백억원과 이자 3백억원을 대우전자에 지급하라고 강제 조정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출자 전환으로 대우전자의 최대 주주가 된 채권단은 대우전자를 해외에 매각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2002년 10월 백색가전과 영상사업 같은 우량 사업 부문을 떼어내어 대우모터공업으로 이전했다. 대우모터공업은 2002년 12월 대우일렉트로닉스로 이름을 바꾸고 세계 최초로 나노실버 기술을 적용한 제품을 잇달아 출시하고 틈새시장을 주로 공략하면서 국내 제3위의 가전 업체로 부활했다.

김우중 전 회장은 6월17일 이전에 귀국할 예정이다. 자기가 경영할 때는 적자를 면치 못했던 대우그룹 계열사들이 하나같이 우량 회사로 탈바꿈한 것을 보고 무엇을 느낄까? ‘세계 경영’ 시절부터 대우그룹 내에 축적된 잠재 역량 덕분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재계 2위의 기업집단을 파국으로 몰고간 리더십이라는 뇌관이 없어진 덕이라고 생각할까?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